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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대상에 대한 실천적 고찰 운영자 201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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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대상에 대한 실천적 고찰

A Practical Study on the Object of Prayer

 

이정현 교수(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목차

 

I. 서론

 

II. 기도의 어원과 정의

 

A. 기도의 어원

 

B. 기도의 정의

 

III. 기도의 대상에 대한 성경적 배경

 

A. 구약적 배경

 

B. 신약적 배경

 

IV. 기도의 대상에 대한 실천적 방안

 

V. 결론

 

참고문헌

 

 

 

I. 서론

 

신자가 마땅히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항상 기도하라’고 한 성경의 권고 때문이다. 이 권고가 단순한 권고가 아닌 명령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이 말씀을 받아 그대로 순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공적 기도회와 개인 기도를 통하여 이 말씀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써야 한다.

 

그런데 정작 성도들에게 ‘기도가 무엇이냐?’고 묻거나 ‘왜 기도하며 누구에게 기도하느냐?’고 물으면 성경적으로 대답하는 자가 많지 않다. 기도는 하지만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도하고, 중얼거리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말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타종교의 기원이나 치성을 드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본 소고에서는 기도의 어원과 정의 그리고 핵심 논의 주제인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고찰한다. 중심 주제를 기술함에 있어서 성경과 칼빈의 저서와 정통적인 기독교문서 몇 편을 통하여 기도의 대상을 알아본다. 여기에서 드러난 기도의 대상과 한국교회의 기도의 정황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연구를 근거로 현대교회에 이 사실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몇 가지 일반적인 상황에 적용함으로 기도의 대상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이해를 수정하려고 한다. 올바로 시행되고 있지 않은 기도의 부분들을 수정, 보완하여 기도의 대상을 정확히 부르고 그분께만 기도하도록 할 것이다.

 

II. 기도의 어원과 정의

 

성경에 ‘기도(하다)’에 해당하는 용어들이 많이 나타난다. 구, 신약의 몇 단어들을 찾아 살펴봄으로 기도의 의미를 좀 더 깊이, 폭 넓게 알기 원한다. 그리고 이 용어들을 근거로 또한 학자들이 말하는 기도의 정의를 알아본다.

 

A. 기도의 어원

 

1. 구약

 

구약에서 기도를 뜻하는 전형적인 단어는 ‘팔랄’(פלל)이고, 여기에서 ‘중재하다’, ‘기도하다’란 뜻이 파생되었다. ‘테필라’(תפלה)는 ‘팔랄’의 명사형으로 시편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시편 17편, 86편, 90편, 102편 그리고 142편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재하다’, ‘부르짖다’의 의미로 쓰인 다른 한 단어는 ‘카라’(קרא)이다. 이것은 이중 의미로 사용되는데, 즉 하나님에 대한 중재(렘7:16, 27:18, 욥21:15)와 사람들에 대한 중재(룻1:16, 창23:8)의 양방향으로 쓰인다.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단어는 ‘샤알’(שאל)인데, 이것이 시편 27편 4절과 122편 6절에서는 ‘기원하다’, ‘요구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민수기 27장 21절과 여호수아 9장 14절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묻다’의 의미로 쓰였다. 즉, ‘샤알’이란 말 속에는 인간의 필요를 겸허히 요구하는 것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여쭙는 것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사기에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자아크’(צעק)는 사람에게 긴급히 필요한 것이 있어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삿3:9, 6:6-7). 히브리 음역(자아크)은 마치 사람의 마음을 짜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내어놓는 듯한 감을 준다.

 

이외에도 기쁨이나 슬픔으로 인해 간구 할 때는 ‘라난’(רנן)이 쓰였고(시17:1, 렘31:12, 애2:19), 애원의 기도로 ‘하난’(הנן)이 사용되기도 했다.

 

2. 신약

 

구약과 다르게 신약에서는 더 많은 용어가 기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기도’ 그리고 ‘기도하다’와 관련된 헬라어 단어와 그 사용상의 특징들을 알아보기로 한다. 기도의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프로슈케’(προσευχή)와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υχομαι)이다. 전자는 여성명사로 ‘기도’라는 뜻이고 후자는 동사로 ‘기도하다’ 또는 ‘간청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명사는 총 37회 사용되었고 동사는 86회 정도 사용되어 ‘기도(하다)’라는 의미로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공관복음서(53회)와 사도행전(25회), 바울서신(33회)에서는 많이 나타나나 요한서신(계시록 제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신약의 기자들(요한은 제외)은 ‘기도’와 ‘기도하다’를 나타낼 때 ‘프로슈케’와 ‘프로슈코마이’를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된 단어는 ‘아이테오’(αίτέο)이다. ‘요청하다’ 또는 ‘간청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 총 70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사복음서(45회)와 사도행전(10회)에 주로 편중되어 나타난다.

 

다음으로 많이 나타나는 단어는 ‘에로타오’(έρωτάω)이다. 이것은 ‘묻다’ 그리고 ‘간청하다’는 뜻이다. 63회 중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28회,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15회를 사용한다.

 

‘기도하다’는 의미와 유사하게 자주 사용되는 동사 중 하나가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έω)인데, 주로 예배와 관련하여 쓰였다. ‘경배하다’, ‘숭배하다’ 그리고 ‘충성을 맹세하다’는 의미로 60회 정도 사용되었으며 다른 단어와 달리 요한계시록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24회).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알아볼 단어는 ‘크라조’(κράζω)이다. ‘외치다’, ‘부르짖다’는 의미로 사용된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 12회,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에 각각 11회, 마가복음에 10회 등을 비롯하여, 총 56회 나타난다.

 

이상과 같은 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약에서 기도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프로슈코마이’이며 또한 신약의 기자들 중 누가가 기도와 관련된 용어를 가장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가 다른 기자들보다 기도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각 단어의 의미가 전달하듯이 기도는 단순히 소원을 간청하거나 아뢰는 정도를 의미하지 않고 묻고 요청하고 경배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B. 기도의 정의

 

전술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도는 인간의 바람을 단순히 아뢰는 정도를 지나서 대상자와 대화하며 대상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이 같은 용어고찰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은, 기도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포괄적인 의미로 인하여 기도를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여기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도 다양하다. 본고에서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중요한 몇 사람의 정의를 간추려 본다.

 

알렉산더(Eric Alexander)는 “참된 기도”에서 기도의 정의에 대해 말하면서 존 칼빈의 이사야서 주석 중 한 부분을 빌어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라고 소개한다. 또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3권 20장에서 “기도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훈련이며, 우리는 날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으뜸가는 특권을 기도하는 것으로 본 그는, 성도들이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믿음의 참된 증거를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기도를 ‘믿음의 영속적 행사’(perpetual exercise of faith)라고 부른다.

 

“기도”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오 할레스비(O. Hallesby, 1879-1961)는 그의 책에서, “기도란 우리의 메마르고 시들은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일이며, ....무력한 자가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수단이며....여기(무력함)에 믿음이 연합하여 기도가 된다.”고 기술했다.

 

영국의 평신도 설교자이며 캠브리지 대학교의 교수였던 루이스(C. S. Lewis, 1898-1963)는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도란 불완전한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 만남이다.” 존 알 라이스(John R. Rice) 박사는 그의 책(기도-간구와 응답)에서, “기도는 두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문을 여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기도에 관해 훌륭한 석사학위 논문을 썼던 스피어(Wayne R. Spear)는 “기도란 하나님께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라고 말함으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기도에 포함된다는 여운을 남겼다.

 

기도에 대한 머레이의 해박한 성경적 지식은 “그리스도의 기도학교에서”라는 책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기도학교’(The School of Prayer)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도 한 그는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기도를 “초기에 있어 가장 연약한 어린아이조차도 할 수 있을 만큼 쉽지만 동시에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일이며, 그것은 보이지 않으나 가장 거룩하신 자와의 교제”라고 했다. 이어서 머레이는 “그것은 바로 참 종교의 정수(精髓)요, 모든 축복의 통로요, 능력과 생의 비결이다. ...기도를 통해 약속은 성취되며, 하늘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차원에서 그가 말하는 정의도 있다. “기도는 달리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달리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할 수 있고 달리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일어나게 하는 능력이다.”

 

기도의 사람이며 기도에 관한 실제적인 책들을 많이 내놓았던 이 엠 바운즈(E. M. Bounds, 1835-1913)에 따르면, “기도란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친교이다. 기도란 하나님을 즐거워함이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엄숙한 봉사이며, 경배이며, 예배이며, 무엇인가 요청하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또 어떤 소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도는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내민 자녀의 손이다. 들으시고 느끼시고 해결해 주시는 아버지의 귀에, 아버지의 심장에, 아버지의 능력에 부르짖는 자녀들의 울부짖음이다.” 이 정의대로 그는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났으며 보통 7시까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필자가 듀엘 박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영적 은혜였다. 그의 강의를 듣고 그와 함께 짧은 시간 교제함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특히 중보기도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책들 중 “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라”(Touch the World Through Prayer)는 한국교회의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듀엘은 힘주어 펜을 눌러 다음과 같이 기도를 정의한다. “기도는 교회 최대의 재산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은 아니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는 길일뿐 아니라 영원하며 확실한 투자이다.”

 

이런 사람들의 정의를 종합, 분석해 보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루이스, 스피어, 머레이, 바운즈 등은 대화를 통한 교제로 기도를 정의하며, 응답의 통로로 기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머레이, 도움을 구하는 수단으로 보는 사람은 할레스비, 바운즈, 듀엘이다. 이것은 각자의 강조점에 따라 구분해 본 것이다.

 

필자는 기도를 ‘영적 대화’, ‘응답의 통로’로도 생각하지만 이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기도가 ‘사역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신자에게 복음증거가 당연한 임무이고 사역(일)이듯 기도 역시 동일한 일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듯 항상 엎드려 기도하는 것 또한 모든 성도들의 주요한 사역이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행6:4)고 했던 사도들의 고백은 비단 사도들이나 현대의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본다. 이런 견지에서, “기도는 인간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일임과 동시에 땅 위에서 하늘의 뜻을 펼치는 중요한 사역의 일환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III. 기도의 대상에 대한 성경적 배경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사람들이 기도한 각각의 예를 통하여 그들은 누구에게 기도하였는지를 보고 기도의 대상에 대한 성경적 배경을 고찰한다.

 

A. 구약적 배경

 

구약 성경을 크게 모세오경과 역사서와 시가서와 선지서로 나누어서 그곳에 나타난 성도들은 누구에게 기도하였는지를 알아본다.

 

1. 모세오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 어떤 모습으로든지 기도한 사람은 가인, 에노스,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종, 이삭 그리고 야곱이다. 가인과 에노스는 ‘여호와’께 기도하였고(창4:13, 4:26)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 대상이 ‘주’(창18:23, 25, 30, 32)와 ‘여호와’(창18:33)와 ‘하나님’(창20:17)으로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브라함의 명을 따라 이삭의 신부감을 얻기 위하여 타국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며 기도한다(창24:12, 42, 48).

 

이삭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창26:25), 아울러 그의 아들 야곱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 여호와’(창27)께 기도한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면서 벧엘에서 기도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한다. 그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얍복강에서 ‘주’와 씨름하는데(창32:12) 이것을 호세아 12장에서는 기도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난 후에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고 고백한다. 야곱이 나이 늙어 죽게 되었을 때 요셉을 위하여, ‘하나님,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창48:15-16)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결국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과 주’를 대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여호와의 사자’(창48:16)께 기도한 것이다.

 

출애굽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주로 기도한다. 모세는 ‘하나님’(출3:11, 13)과 ‘여호와’께(출4:1, 8:12, 30, 9:23, 14:10, 15:25, 17:4, 19:23, 32:31, 민12:13, 27:5, 15, 신3:23, 9:19, 9:20, 10:10, 26:7-8) 기도하며 또한 한 기도 안에서 ‘여호와와 주’를 반복 교대로 사용하여 기도하기도 하며(출4:10, 5:22, 32장-33장, 민11:11, 14:14, 16:15, 21:21, 신3:24, 3:24, 9:26) 뿐만 아니라 ‘주’께(출5:23, 32:13, 33:16, 34:9, 민11:12, 15, 14:15), ‘여호와, 하나님’께(신9:23) 기도하기도 한다.

 

결국 모세오경에 나타난 기도의 대상은 ‘주’와 ‘여호와’와 ‘하나님’이지만 한 기도에서 여러 번 서로 혼합된 용어, 즉 ‘주와 하나님’, ‘주와 여호와’,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도의 사람 아브라함은 ‘주’를 부르며 기도하는 횟수가 많고 모세는 ‘여호와’를 기도의 대상으로 부를 때가 가장 많지만 아울러 ‘여호와와 주’를 교대로 번갈아 사용하는 횟수도 많이 나타난다.

 

2. 역사서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는 ‘여호와’께 아뢴 사실(수10:12, 24:7)과 ‘주’(수22:22)께 기도한 내용이 성경에 나온다. 이것은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 전임자였던 모세로부터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여호수아의 뒤를 이은 시대가 12지파 동맹 시대로 곧 사사시대이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사들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기도의 대상을 ‘여호와’로 보고 그분께 기도한 경우가 가장 많고(삿4:3, 6:6-7, 11:11, 27, 30, 20:27-28) 다음은 ‘주와 여호와’로 나타나는 경우이다(삿6:13, 10:15, 13:8, 15:18, 16:28, 6:17-18, 37). 그 외로는 ‘하나님과 주’(삿6:36, 39)가 두 차례, ‘하나님’(20:18)이 한 번, ‘여호와 하나님’(10:10)이 한 차례 나타난다.

 

사무엘 상하에 나타난 기도에 관한 분석에서는 ‘여호와’(삼상1:10, 7:5-6, 9, 8:6, 18, 21, 10:22, 12:8, 10, 18, 28:6, 30:8, 삼하2:1, 5:19, 23, 22:)를 기도의 대상으로 부르는 경우가 가장 많고 다음은 주로 혼합형식이다. 혼합형식으로는 ‘여호와, 하나님, 주’(삼상23:2, 4, 11-12, 삼하7:27-29)와 ‘여호와와 주’(삼상1:11, 3:10, 7:28, 삼하24:10, 17, 25)와 ‘하나님과 여호와’(삼상12:18, 14:41) 순으로 나타나고 물론 ‘하나님’(삼상14:37, 삼하12:)을 대상으로 기도하는 형식도 기록되어 있다.

 

열왕 시대의 기도는 기도의 대상을 부르는 용어 사용상 주로 혼합형식이 많이 나타난다. 한 기도 속에 ‘주, 여호와, 하나님’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다(왕상3:6-8, 8:, 17:20-22, 36, 왕하19:15, 대상14:, 17:18-27, 29:11-18, 대하1:8-9, 6:, 14:11, 20:3이하). 물론 이 시대에도 기도의 대상을 단독용어인 ‘여호와’(왕하6, 대상30:20)와 ‘하나님’(대상5:20, 대하33:18)으로 부르는 경우가 나타나지만, 주로 3개의 호칭을 혼합해서 사용하는 경우와 ‘여호와와 주’(왕하20:2-3, 11), ‘하나님과 주’(대상4:10), ‘하나님과 여호와’(대하33:12-13)로 교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책에서는 각 사람들이 ‘하나님’(에8:23, 느2:4, 4:9)과 ‘주’(느1:6이하)께 기도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나 더 많은 구절에서 기도의 대상으로 ‘하나님, 여호와, 주’(느9:4, 11-28)의 통합된 형태를 사용한다.

 

3. 시가서

 

욥기서에 나타나는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21:14, 22, 22:2, 17, 33:26, 31)과 ‘주’(욥30:20-23)가 여러 번 출현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혼합형식으로 기록된 것이 더 많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주’(욥10:2-4, 7, 9-14)의 형태와 ‘여호와와 주’(욥40:3-4, 42:1-10)의 형식이다.

 

잠언서에서는 ‘여호와’(잠15:8)께 기도한 것과 ‘주’(잠30:7)께 기도한 것이 각각 1회 나타날 뿐이다.

 

시편은 각 장 전체가 기도로 되어 있는 부분이 많아서 장별로 살펴보면 여기서도 기도의 대상을 부를 때 여러 이름이 병행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여호와, 주’(시5, 7, 25, 30, 40, 45, 59, 71, 84, 99, 140, 144)께 기도하는 경우와 ‘여호와와 주’(시3, 18, 26, 28, 31-33, 35, 39, 41, 85-86, 88, 92, 102, 104, 130, 141, 143)나 ‘하나님과 주’(시16, 43-44, 56, 61-62, 65-66, 68-69, 74-76, 139)나 ‘여호와와 하나님’(시42)으로 병합되어 나타나는 경우들이다. 물론 하나의 호칭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주로 ‘여호와’(시6, 20, 34, 107, 108, 120, 142)와 ‘주’(시8, 17, 22, 62, 73, 119, 138)께 나아간다. ‘하나님’(시77)께 기도하는 형식은 한 장에서만 등장하며 시편 5편에는 기도의 대상이 ‘왕’으로 표현된 특이한 곳도 있다.

 

시편 기자들의 대부분은 한 기도의 문맥 속에서 대상을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하나님과 주와 여호와를 병합해서 사용하는 경우나 적어도 두 가지 이름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기도의 대상으로 특정한 이름인 ‘여호와’를 사용하기도 하나 일반적인 의미로의 ‘하나님’이나 ‘주’를 교대로 사용하므로 대상의 호칭에 별다른 차이를 두지 않는다.

 

4. 선지서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상대로 예언자 활동을 했던 선지자들의 글에는 주로 선지자 자신의 기도가 나타난다. 이사야서에는 ‘주와 여호와’(사6:11, 26:16, 37:21)를 병행하거나 ‘여호와, 주, 하나님’(37:15)의 형태와 ‘여호와와 하나님’(38:2, 5)의 혼합 형태의 기도문이 나오고 예레미야의 저술에서는 ‘여호와와 주’(렘10:24, 11:20, 15:15, 20:7, 11-12, 애가2:20, 3:64, 66, 5:21-22)의 형태와 단순히 ‘주’(렘11:19, 애가3:56-38, 5:20)와 ‘여호와, 주, 하나님’(렘14:20-22)의 형태가 발견된다.

 

다니엘은 ‘주, 하나님, 여호와’를 번갈아 부르며 기도하거나(단9:3-4, 7-10) 때로는 ‘하나님과 주’(단2:23)를 부르기도 하고 다니엘 2장 18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한다.

 

호세아 선지자는 7장 10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을 교대로 사용하며 기도하고 요엘은 기도의 대상으로 ‘여호와’(호1:14, 19)를 찾으며 요나는 여호와(욘1:16)와 하나님(욘3:8)을 찾을 때도 있으나 여러 부분에서 그는 ‘주와 여호와’(욘1:14, 2:7, 9)와 ‘하나님, 여호와, 주’(욘2:1-2, 4:2)를 교대로 사용하며 기도한다.

 

미가는 미가서 3장 14절에서 보여 주듯이 ‘여호와’께 기도하며 하박국은 ‘여호와와 주’(합1:2, 3:2, 8)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 주’(합1:12-14)를 더 자주 사용한다.

 

선지서에서의 선지자들, 즉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 그리고 하박국의 경우도 기도의 대상을 한 호칭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구약성경, 즉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선지서에 나타난 기도의 대상은 단독적인 명칭을 사용하여 기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 기도 문맥 안에서도 여러 가지 명칭을 교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세 용어(하나님, 여호와, 주)에 특별한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B. 신약적 배경

 

기도의 대상에 대한 신약성경의 배경도 구약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로 구분하여 고찰한다. 사도행전을 포함한 4복음서 속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바울 서신 속에서는 누구에게 기도하며 요한과 베드로 서신에서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살펴본다.

 

1. 4복음서와 사도행전

 

복음서 안에서 주님이 기도를 가르치신 것에서는 ‘본인에게와 성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교훈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에서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해 아버지께로 가라가 아니라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신다. 여기서 ‘오라’는 말은 분명히 기도-위탁의 기도, 쉼의 간구를 의미하며, 그런 자를 ‘그’가 쉬게 하시겠다고 강조하신다. 요한복음 14장의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3-14)는 말씀에서 주님은 분명 당신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당신이 응답하시겠다고 하셨다. 이 구절은 주님이 자신을 통해 기도할 수 있고, 자신이 기도의 대상이며, 응답자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가르침에 근거할 때 주님은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다른 가르침과 모범기도에서는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심으로 기도의 대상을 성부 하나님으로 가르치셨다(마6:6-9, 18). 마태복음 18장에서는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시리라’(19)고 하셨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대상이 하나님’(눅18:11, 13)이심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이 실제로 기도하신 것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 아버지로만 나타난다.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시기 전에 기도하시는데, ‘아버지’를 부르며 간청하신다(마11:25-27). 주님이 가장 많이 아버지를 찾으며 기도하는 곳이 요한복음 17장이다. 그곳에서는 많은 횟수의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 대상을 역시 ‘아버지’라고 부르며(마26:39) 십자가 위에서도 동일한 대상-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다(마27:46).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기도의 대상을 주님에게 둔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 가면서 ‘주여’라고 외치며 간청하고(마14:30) 가나안 여인이 자기 딸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다윗의 자손 예수’에게 기도했으며(마15:21) 맹인 두 사람이 ‘예수’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마20:29). 그리고 십자가 위에 달린 한 강도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고 기도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 성령을 구하겠다’고 하셨고,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셨다. 이 표현에서,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은 성부 하나님이셨고 또한 아버지가 기도의 응답자이심을 엿볼 수 있다.

 

사도행전 속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누구에게 기도했는가? 성도들이 환란을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데 ‘대 주재여’(행4:24)라는 말과 ‘주여’(행4:29)라는 말을 쓴다. 스데반의 기도도 ‘주 예수’(행7:59-60)께 드렸고 아나니아도 그랬다(행9:17). 하지만 고넬료는 ‘하나님’(행10:2)께 항상 기도했고 교회가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하여 ‘하나님’(행12:5)께 기도했으며 바울과 실라도 한밤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했다(행16:25).

 

2. 바울서신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사건 이후 곧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 기도하는 데 열중했던 인물이고(행9:11), 뿐만 아니라, 남들보다 방언을 더 말했던 사람이다(고전14:18). 이것은 바울이 초대교회의 그 누구보다도 기도에 뒤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바울은 누구에게 기도한 것으로 나타나는가? 바울의 기도를 세 부분, 즉 기도에 대한 교훈과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 것, 그리고 직접 실제적으로 기도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기도에 대한 권면의 대표적 성구는 빌립보서 4장 6-7절이다. 여기서 그는 기도자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이 평강으로 지켜 주신다고 교훈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한다. 바울이 기도의 사람으로서 기도생활에 힘쓰고 있다 할지라도, 이 요청은 결코 무리한 부탁이 아니다.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세 가지 기도제목을 던지며 진지하게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는데(롬15:30-32), 분명한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또한 골로새교회에게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골4:3)는 부탁을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직접 기도한 내용 중에서 누구에게 기도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육체의 가시와 관련하여 바울은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기를 주께 세 번 기도하였다’(고후12:8). 선교지에서 당하는 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바울은 주님께 세 번이나 이 제목으로 기도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추구해야 할 기도의 모델이 될 만한 기도가 에베소서에 두 개 나타나는데(엡1:15-19, 3:14-19) 이것은 바울서신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깊이 있고 본질적인 간구이다. 앞 성구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뒷 구절에서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도 처음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다가, 나중에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는 말로 기도한다(살후2:13-17).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고(요17),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바이며(마6:9), 또한 초대교회의 관습이었다. 바울도 그 본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자애로운 부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3. 기타

 

야고보서에는 기도의 대상이 분명한 두 개의 본문이 있다. 먼저는 지혜를 위한 기도(약1:5-8)이고 다음은 치유를 위한 기도(약5:13-18)이다. 전자의 기도의 대상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뒤에는 주께)’이시다. 칼빈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은 우리의 궁핍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는 뜻이라고 적당한 말을 했다. 그리고 후자의 기도 대상은 ‘주님’으로 되어 있다. 기도의 서두 부분에는 기도의 대상이 명확히 언급되지 않다가 뒷부분에서 기도의 응답자로 주님을 거론한다. 평소 무릎 꿇고 많이 기도함으로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되었다는 야고보는 ‘하나님과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기도는 대부분 그리스도에게 드려진다. 요한계시록 1장 5-6절, 5장 13절, 22장 20절에 그 예가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성구는, 기도는 성자에게도 드릴 수 있음을 가르친다.

 

상술한 것에서 우리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이 확실하다. 그러면 우리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라 할 때에 그 하나님은 어느 위격이신가? 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만약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뿐이시라면 하나님의 위격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으며, 반대로 만약 하나님의 위격 중 한 위에게 기도를 드리게 된다면 신성의 연합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이 같은 고민을 많이 한 폴 틸리히(P. Tillich)는 결국 삼위일체론을 부정한다. 그는 조직신학 3권(Systematic Theology Vol.3)에서 이것을 나타낸다. “종교적 경건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거룩하신 한 실체 속에 존재하는 삼위일체는 서로에 대하여 기도하며 또 기도를 받는데, 우리는 그 중 어떤 한 위(位)에게 기도하는가? 만약 위격(位格)의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 단순하게 기도하지 않는가? 만약 차이가 있다면, 예를 들어 기능의 차이가 있다면, 삼신론(tritheism)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우시아’(ousia)와 ‘하이포스타시스’(hypostasis) 혹 실체와 위격의 개념들은 그 문제를 복잡하게 할 뿐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기도와 성자에게 기도하는 일 사이에 신학적 구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숭배와 성자숭배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한없이 많은 기도대상들에 대하여 길을 열어 놓게 된다.” 틸리히는 기도의 경험 속에서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난점을 발견하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신약에 나오는 기도와 관련되어 있다.

 

신약성경에서 성부는 기도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 또한 아버지께 직접 기도하셨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음도 교훈하셨다. 이 같은 사항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삼위 중 제1위 되시는 성부께 기도할 수 있다. 기도의 대상이신 성부 하나님은 영이시며,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시며, 창조주이시다. 그는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시며, 전지하시고 인격적인 참된 신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친절히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나 우리의 뜻대로가 아닌 당신의 뜻대로 주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사 거기에 대답하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며, 철학적인 제일 원인이나, 도덕적 이상이 아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그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응답을 받았고 인도를 받았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3대 족장과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와 하박국 선지자가 여호와께 기도함으로 응답을 구했다. 또 신약성경의 기록을 통해서는 예수님 외에 바울, 고넬료, 야고보가 성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갔음을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가 되시는 성자께서도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 주지하듯이 예수님은 자신이 기도의 대상이며 응답자이심을 친히 말씀하셨다(마11:28, 요15:13-14).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 기도한 사례들이 신약성경에 여럿 나타난다. 물에 빠진 베드로, 딸의 문제를 가지고 나온 가나안 여인, 맹인 두 사람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께 기도했으며 스데반과 아나니아가 주 예수께 기도를 드린 장면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여러 기도들은 그리스도가 기도의 대상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런데 재미있는 연구가 알렉산더 맥도널드(Alexander B. Macdonald)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공 예배 안에서 기도는 그리스도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 중보자의 이름으로 전능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강도나 스데반, 바울이 드린 기도는 단지 “짧게 내뱉는 간구”(short ejaculatory petitions)이며, “개인적인 기도들”(individual prayers)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에베소서 5장 19절(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요한계시록과 플리니(Pliny)의 글을 인용하여 “찬양의 노래들은 신성을 가지신 그리스도께 드렸다”고 했다. 맥도널드의 연구는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성경의 증거를 더 명확히, 세분화 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즉흥적, 개인적 기도 시 제2위이신 그리스도가 기도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나 공적 기도 시는 제1위이신 성부가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사(公私)의 차이로 그 대상도 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도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중요하며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없이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이 말은 중재자 없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지만 이것은 위대한 진리이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 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단9:18). 우리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두고 있고, 그의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바른 형식과 내용을 배우게 된다. 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 칼빈의 기도론에서도 인간의 의지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만을 통한 기도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의 모범이 된다(히5:7, 눅22:42).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음은 성경적 사실이다. 아울러 그리스도 자신이 기도의 대상이 되는 것도 성경적 진리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기도하는 원리를 가르친다.

 

우리의 기도는 성부와 성자에게 뿐만 아니라, 성령에게도 근거를 둔다.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인다운 기도를 할 수 없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시는 분이 성도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이시다. “그리고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라”(슥12:10; 욜2:28-29, 사32:15, 겔39:29 참조). 또한 성령은 빌 바를 모르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시는 분이시며(롬8:26-27)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롬8:15). 회개하도록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며,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인도해 주시는 이도 성령이시다. 할레스비는 기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기도의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아주 친밀하게 하여서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하자마자 곧 그것을 간구를 통해서나 또는 탄식이나 비통이나 열렬한 간청이나 감사 또는 경배 같은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아뢰도록 한다.”고 했다. 청교도의 시조인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도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들을 우리의 기도에서 제안하고 생각나게 하고 말하게 하신다.”고 적절히 표현했다. 요한복음에서, 그는 아버지에 의해 보내심을 받고(요14:16), 아들에 대해 증거 하실(요15:26) 별개의 위로 나타난다. 여기에다가 성령의 신성에 대한 증거를 덧붙여보면(행5:3-4) 삼위일체론이 옳다고 인정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며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며 또한 성령은 아들이 아니나 그들은 특별한 속성으로 구별되어진다.”고 한 칼빈의 말은 옳다. 그러므로 성령께 기도드리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의 본질은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위격을 구별하지 않고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또한 타당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제3위가 되시는 성령께도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기도의 대상이 된다는 성경의 증거는 없다.

 

어떤 한 위격에게 드리는 기도나 혹은 세 위격에게 함께 드리는 기도가 모두 타당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기도는 일반적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다. 신약의 기도형태는, 성령의 도움으로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 드리는 것이다. ‘성령이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도우신다.’(롬8:26-27)는 말씀과 요한복음 16장 23절의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IV. 기도의 대상에 대한 실천적 방안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가 기도를 시행할 때 특히 개인기도가 아닌 공중기도(public prayer)를 시행할 때에는 기도의 대상을 명확히 함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상이 분명하지 못한 그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아닐 수 있으며 그런 기도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 안에서 시행되는 공중기도의 대상으로 ‘주님’ 또는 ‘예수님’이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가 있다. 만약 2위이신 성자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 결국 2위의 이름으로 2위께 기도하는 경우가 된다. 바람직하지 못한 기도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 가운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는 부정적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도 시 ‘주여 주여’를 부를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버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니까 진심으로 ‘아버지’를 찾으며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주여 주여’ 하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갈 자가 있으나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천국에 못 들어갈 자가 없는 것이다. 또한 주님을 부르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종이라는 뜻이고 아버지라 부르면 상대적으로 자녀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종으로서 주인에게 나아가는 것보다,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나아가는 것이 신약시대 은혜 입은 자에게 더 걸맞는 호칭이라고 본다.

 

혹자는 ‘당신’이라는 말을 기도의 대상으로 사용할 때가 있다. 한글에서의 당신은 2인칭 단수일 수도, 3인칭 단수 높임말일 수도 있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회중들에게 하나님을 높이며 ‘당신께서는 참으로 사랑이 많으십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 시에는 하나님이 2인칭 단수가 되기 때문에 ‘당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건방진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국문학적으로 따질 때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공중기도를 할 때 감격하여 ‘할렐루야’를 연발할 때도 있다. 할렐루야의 정확한 의미는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 한 사람이 회중을 향하여 외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기도할 때 단수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복수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할렐루야는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할 수 있는 말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외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이 용어는 기도 중에 사용된 용례가 없으며 오로지 기도 전후의 단독적 의미로 사용이 되었다고 본다.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기도 중간에 ‘귀신을 추방’하는 축사(逐邪)를 행하는 때가 많음을 본다. 그 형태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중간에, ‘더러운 귀신아 내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떠나가라’는 것이다. 2인칭 단수이신 하나님께 정중히 아뢰는 기도 중에 또 다른 영적 존재를 향하여 명령하는 형태의 말이 들어가는 것은 적합지 않다. 성경에 축사를 말하는 근거가 있지만(마17:18, 막5:8, 9:25, 행16:18) 기도 중에 축사하는 경우는 없고 단순히 기도와 별개로 축사의 한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축사는 축사일 뿐 기도의 한 형태가 아니다. 손기철은 이 기도를 명령형 기도로 ‘왕의 기도’(king's prayer)라고 하지만 성경적 증거를 찾기 어렵다.

 

가톨릭에서 하늘의 성모에게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실제로 듣게 되고 문서에 기록된 것을 읽어 볼 수도 있다. 여기에 관해 칼빈은 “천사나 마귀나 그들이 꾸며낸 성자의 중보란 말과 비슷한 말을 한마디도 인간에게 계시한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성경에 없는 이 같은 말을 그들은 무슨 이유에서 꾸며내야 했는가? 인간의 지능이란 늘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원조(援助)를 찾고자 하는데, 그것은 인간지능의 불신앙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늘에 있는 성자나 마리아는 볼 수 없고, 인간과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데 이런 자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는가? “각 사람이 특정한 성자를 수호신으로 받아들여 그의 수호에 의지하는 것”은 미신행위이며 우상숭배이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칼빈은 성자들의 중보에 대해 강력히 반박하면서 “성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미친 짓이다”라고 말했다. 분명히 죽은 신자는 세상적인 염려에서 떠나 있으며 또한 성자들도 우리의 기도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기도했던 사람들이다.

 

이 문제에 대해 정통 기독교 문서들도 강력한 부정의 태도를 보여준다. 개혁교회의 많은 요리문답과 신앙고백들은, 기도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기본진리를 필수적인 내용으로 삼는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79문, “우리는 하나님께만 기도할 것입니까?”의 대답으로 “... 그만이 신앙과 종교적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예배의 부분인 기도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만 올려야 하고 그 한 분 외에 아무에게도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제2헬베틱 고백서(Second Helvetic Confession)도 마찬가지이다. “...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에게만 기도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하늘 아버지 면전에 계신 중보자나 대언자처럼 다른 신들이나 하늘에 있는 성자들을 숭배하거나 예배하거나 기도하지 않으며 그리고 감사하지 않는다.”

 

이 같은 내용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진실하신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하지 천사들, 동정녀 마리아 그리고 성자라 불리는 자들에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중보자’로서 성자들이 전혀 필요치 않는데, 그리스도가 하늘에 있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롬8:15).”

 

1530년 아우그스부르그 제국의회에서 군주들과 여러 시(市) 대표들이 황제 칼 5세에게 바친 글이 있는데, 여기에는 복음주의 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주요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21개조의 신조 중 마지막 사항이 성자숭배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성서는 우리 앞에 중보자, 화해자, 대제사장 및 중재자로서 그리스도 한 분만을 두며, 성자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성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진술들은 주로, 성자나 마리아를 숭앙하며 그들에게 기도하고 또한 예배에서 유물과 성상을 사용하는 가톨릭의 관습을 목표로 하여 기록되었다고 본다. 가톨릭교회가 ‘성자에 대한 간구는 직접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그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도를 요청하는 일이다. 이것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기도 지원을 요청하는, 성경적으로 인정된 행위의 연장’이라고 주장을 해도 개혁자들에 의해 그것은 분명 성경적 지원을 결핍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비판을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결코 마리아나 성자들은 우리 기도의 대상이나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다.

 

V. 결론

 

단적으로 말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 모두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성부 하나님이 기도의 대상이심은 여기서 논외로 하여도 무방할 만큼 분명하고도 명확하다. 구약의 여러 족장들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다수의 선지자들이 기도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갔으며 사도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교회 지도자들이 성부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다. 그러나 더 분명한 성경적 확증은 우리 주님에게서 나타난다. 예수님은 모범기도와 기도에 대한 가르침들에서 성부 하나님이 기도의 대상이심을 교훈하셨고 또한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께만 기도하셨다.

 

성자 예수님이 기도의 대상이 되심 또한 말씀 속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주님은 자신이 기도의 대상이시며 응답자이심을 밝혀 주셨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과 그 이후의 성도들도 주님께 기도한 것이 나타난다. 이처럼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가 되시는 성자도 기도의 대상임을 분명히 밝힌다.

 

성령님이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는 성경적 증거는 없으나 성령이 제3위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님께도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은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 중 한 위격에게 기도하거나 세 위격에게 함께 기도드릴 수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람직한 기도의 형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하는 것이다. 굳이 우리의 기도와 삼위의 역할을 구분한다면, 성부는 기도의 대상과 응답자로서, 성자는 기도의 준거와 중보자로서, 성령은 인도와 능력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삼위하나님의 기능적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명확한 성경을 근거로 제3위의 능력을 힘입어 제2위의 이름으로 제1위께 기도해야 한다면 기도 중 ‘주여’, ‘당신’, ‘할렐루야’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으며, ‘더러운 귀신들아 물러가라’고 하거나, ‘마리아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국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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