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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기도에 대한 이해와 평가 운영자 201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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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기도”에 대한 이해와 평가/ 이정현 목사

 

들어가는 말

 

신학교의 도서관장으로 있을 때, 최근 신학적 이슈가 되는 주제들을 잡아서 전문가들에게 글을 부탁한 적이 있다. ‘WCC의 신학적 문제’, ‘가정교회’, ‘신사도운동’, ‘관상기도’, 등등에 관한 것이었고, 필자는 전공을 따라 ‘이머징 예배’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나서 다른 사람에게 ‘왕의 기도’라는 주제로 글을 부탁하였지만 좋은 글을 받지는 못하였다.

 

몇 개월 전에 이 주제로 원고부탁을 받고 그때를 기억하며 이 책(왕의 기도)을 펴들고 읽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 자료들을 찾아보아도 아직 여기에 관한 긍정적, 부정적인 아티클(articles)이 나온 것이 많지 않아 보인다. 합동측과 통합측의 신학자가 여기에 관해 부정적으로 비평한 적이 있다.

 

이 책, 즉 “왕의 기도”의 저자 손기철 장로는 이 책 외에 몇 권의 책을 더 저술했다. 각 책의 전체적인 흐름은 비슷한 것 같다. 손 장로의 대표적인 저서가 “왕의 기도”로 보이며,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주제도 여기에 관한 것이라 이 책에 나오는 그의 주장을 주로 살펴본다.

 

1-2장은 손기철 씨가 이 주제로 책을 쓰게 된 배경과 주요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므로 왕의 기도에 대한 이해 부분이다. 도대체 왕의 기도가 무엇인가? 누가 이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어느 경우에 이 기도가 필요한가? 그가 주장하는 왕의 기도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아본다.

 

3장에 가서는 개혁파 입장에서 볼 때, 이 기도의 단점이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다시 말해 전통, 정통 신학적 입장에서 그의 주장에 어떤 약점들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며, 특히 정통적 기도의 신학을 기저로 손 장로의 주장을 비평하려고 한다.

 

나가는 말로는 이런 내용들을 근거로 건전한 기도의 신학을 한국교회에 제공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성도들이 바르게 기도하도록 자료를 제시할 것이다.

 

1. 손기철 장로의 약력과 이 책을 쓰게 된 배경

 

손기철(孫基哲)은 1957년 11월 14일 한 불교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는 후에 건국대학교 원예학과에 입학을 하여 1981년에 졸업을 하고, 1983년에는 동 대학원을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본 대학교에서 조교를 했고, 장교로 군복무도 마쳤고, 아내와 결혼도 했다. 도미하여 메릴랜드대학교(University of Maryland)에 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2개월 만에 그만두고 방황 끝에 1986년 2월에 조지아대학교(University of Georgia)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신앙생활은 아내를 따라서 아덴스한인장로교회에서 하게 된다. 그곳에서 로마서의 말씀을 공부하다가 예수를 가리켜, ‘당신은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그 이후 그 교회의 새벽예배를 출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목사님의 안수기도로 방언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1989년에 원예학으로 조지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조지아주 농무성 산하 ‘럿셀 조사 센터’(Russell Research Center)에서 9개월 동안 박사 후 과정을 보낸다. 이듬해인 1990년부터는 모교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고, 온누리교회를 출석하며 한국창조과학회의 선배 동료 과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1999년 교회에서 치유사역 팀장을 맡으면서 크리스 해리슨(Chris Harrison) 목사로부터 안수기도를 통하여 유학시절 경험했던 성령세례를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4년에 온누리교회 담임목사의 허락을 받아 교회 안에서 월요치유집회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큰 반응이 없었으나 차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치유 사역과 교수직으로 힘든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이 정말 치유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2005년에 안식년을 내어 미국에 가서 여러 은사 집회와 치유 집회를 다니던 중, 자기를 알지 못하던 어떤 치유 사역자로부터 부르심을 확인 받고 돌아와 다시 치유집회를 계속하게 된다. 2004년 말에 장로로 안수를 받았지만, 2008년에는 온누리교회를 떠나 독립하여 선한목자교회에서 장소를 빌려 월요치유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2006년에 건국대학교 생명환경대학 학장이 되었고, 지금은 본 대학교 서울캠퍼스 부총장으로 시무하고 있다. 그는 한국원예치료협회 회장이기도 하고 200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하늘 터치 사역’(Heavenly Touch Ministry, 약자 HTM)의 대표를 맡아 국내외에서 활발한 치유사역을 전개해오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2006년 3월에 나온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2012년 3월에 50쇄)을 필두로 몇 권이 책이 있다. 2007년 7월에 발간된 “고맙습니다 성령님”은 그의 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2012년 4월까지 무려 1판 99쇄의 기록에 달하였다. 이 책의 후광을 입고 나오는 책이 바로 “왕의 기도”이다. 2008년 2월에 출간된 이 책도 앞의 책 못지않게 인기가 있다(2011년 10월 78쇄). 같은 해 12월에 출간된 한 책은 손 장로의 첫 번째 책과 비슷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기름 부으심”이다(2011년 7월 현재 36쇄). 2009년도에는 두 권의 책을 집필하는데 7월과 12월에 각각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2010년 1월 현재 17쇄)과 “치유기도”(2010년 12월 현재 18쇄)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들도 서로 그 내용이 연결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책이 2011년 5월 출간된 “기대합니다 성령님”이다. 책 제목이 암시해 주듯이 “고맙습니다 성령님”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시중에 나와서 광고가 되고 있는 그의 책은 이 정도이며, 그 내용도 비슷하거나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로 저자나 출판사는 상당한 이익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모든 책들을 연구하여 손기철 장로의 신앙과 신학에 관하여 논함이 좋겠으나 본고의 주제에 맞게 “왕의 기도”에만 집중하도록 한다. 우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간략히 알아보고 다음 장에서 이 책의 구성과 그 중심 내용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왕의 기도”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고통과 질병과 묶임 속에서 사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본인은, 사탄에 대한 이글거리는 분노의 마음이라고 함)에서 많은 신앙의 선배들과 하나님의 계시로 깨달은 기도의 이 비밀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한다. 손 장로는 ‘이 치유사역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라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할 것이라’고 했으며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이 기도’를 이제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실제적인 지침서’로 제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이 ‘왕의 기도’(king's prayer)에 대한 비밀을 이제 하나님의 ‘계시적 믿음’을 통하여 알게 되었으니, 이것을 성도들에게 상세히 알림으로 이것을 행하여 하나님 나라를 편만하게 하자는 동기에서 이 책을 서술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실제적인 지침서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2. 이 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1)책의 구성

 

이 책은 앞 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외에 전체 3부로 이루어졌고 제1부는 ‘그리스도인이여 왕의 기도를 회복하라’이다. 이 대 주제에 따른 소주제가 다음의 세 가지로 되어 있다. 01. 왕의 기도에는 기도응답의 무한한 신비가 있다. 02.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확인하라. 03.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 자녀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제2부는 ‘천국 백성이여,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이다. 2부도 1부에서처럼 세 가지의 소주제를 말하는데, 먼저,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셔야 한다. 둘째는 하나님나라 백성만이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다. 셋째는 예수님이 하신대로 믿음으로 선포하라 이다.

 

제3부는 ‘하나님의 자녀여, 왕의 기도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나눠라.’이다.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잡고 있는 세 가지 소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으로 하는 왕의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라 이고, 둘째는 믿는 대로 되는 왕의 기도 특권을 누려라 이며, 마지막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최고 권능을 사용하라 이다.

 

그리고 부록이 달려 있는데, 이 부록은 ‘왕의 기도 실천편’으로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에는 ‘왕의 기도 실행 6단계’가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첫째단계, 반드시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기도해야 한다. 둘째단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한다. 셋째단계, 반드시 당신의 입술을 사용하여 소리 내어 선포해야 한다. 넷째단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라. 다섯째단계, 선포하고 구한 것은 얻은 줄로 믿어야 한다. 여섯째단계, 여호와를 송축하며 감사하라.

 

그리고 부록 뒷부분에서는 ‘왕의 기도 대표 예문’을, 네 가지로 그 내용을 나누어서 제시한다.

 

손기철의 “왕의 기도”는, 이처럼,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와 목적에 대해 쓴 에필로그와 탈고를 한 후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의 글인 프롤로그, 그리고 그 중간에 위치한 전체 3부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각부는 각각 세 장으로 되었고 분량도 비슷하게 구성되었으며 책의 뒤편에는 실천편을 두어 독자들로 하여금 실제 지침서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시종일관 아픈 자를 낫게 하는 왕의 기도의 비밀을 논리정연하게, 때로는 자타의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2)책의 주요 내용

 

손 장로는 “왕의 기도” 제1부 제1장에서 기도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며, 기도의 목적을 묻는다. 그의 대답은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위함이다. 그리고 기도는 단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기도응답을 체험하지 못했거나 응답을 기대하지도 않는 것은 불 신앙적 태도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도에 대한 양 극단의 개념을 갖고 있는데, 즉 하나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는 것과 내 믿음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한다. 이 같은 기도에 대한 양 극단의 입장을 문제로 지적한 그는 기도의 응답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생명의 나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손 장로는 여기서 기도의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누면서 첫째는 하나님께 구하고 드리는 기도이고, 둘째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기도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기도라고 말한다. 이 세 번째 기도를 손 장로는 ‘왕의 기도’라고 표현한다. 이 기도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정의가 1장 요약에 나타난다. “왕의 기도는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향해 명령하거나 믿음으로 선포하는 기도로서 예수님이 하셨던 바로 그 기도의 방법을 따라 하는 기도이다.”

 

제2장에서는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말하면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주님으로서 사시는 참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달리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변화의 삶에 들어선 하나님의 자녀만이 이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는 이 기도에 응답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소원하며 그 뜻을 행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왕의 기도는 나의 뜻이 아니라, 왕이신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손 장로는 3장에서 2장 마지막 부분의 내용과 연결하여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심의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마음에 책망이 없어야 하고 잘못된 동기로 구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일념이어야 응답될 수 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관점에서 생각함으로(이것을 그는 kingdom mentality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서 기도할 것을 말하면서 그리할 때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 그의 뜻을 행하실 것이며 우리는 왕의 기도로 하나님과 동역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왕의 기도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나타나는 특징 네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는 태생(생명의 본질)이 달라진 사람이다(롬8:14-16). 둘째, 하나님의 자녀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 셋째,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에 파송된 하나님의 전권대사이다(요17:18; 고후5:20). 넷째,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한다(벧전2:9).

 

제2부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주제 아래 세 개의 다른 소주제로 이루어졌다. 4장에서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왜 삶의 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지를 물으면서 그것은 곧 예수님과의 실체적인 교제 즉 성령세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우리의 육, 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 즉 성령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향기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썩히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의 기름 부으심은 우리가 독점하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흘려보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담대히 왕의 기도를 함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흘려보내야 한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흘려보내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아울러 이런 삶을 살기 위하여 왕의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회개와 용서가 필요한데 그것은 기본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5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already) 왔음과 그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 재림 때임을 밝힌다. 그는 수없이 기도했음에도 응답이 없었음을 고통스러워하며 잊고 빠뜨린 복음이 하나님 나라였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 받는다는 복음은 반쪽자리이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이 더하여져야 온전한 복음이라고 한다. 그는 그 나라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 나라는 주권이 있는 곳이며 성령이 특별히 일하는 때와 장소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과 더불어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다. 그러나 귀신의 세력이 온전히 척결되고 사망과 애통과 곡(哭)과 아픈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도래 시점 이전에 이루어지는 표적을 통한 치유는 완전하지 않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왕의 기도가 큰 능력이 있지만, 모든 병자와 모든 사탄의 세력, 모든 자연재해를 일소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구원사적인 한계 때문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왕의 기도를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때 구원사의 과도기(already...not yet)임을 직시하는 거시적인 믿음의 안목이 요구된다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일으키신 표적의 밑바탕에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막6:34, 8:2). 그러므로 표적이 나타나는 왕의 기도 이전에 ‘왕의 마음’을 갖는 것이 긴요하다. 왕의 기도문이 자동으로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왕의 기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빌2:5). 또한 그는 왕의 기도라할지라도 더 큰 영적 유익과 성화를 위해 때로는 응답이 유보되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손 장로는 성령이 나를 소유할 때 하나님의 법대로 성령의 임재 가운데 기도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본다.

 

손기철 장로는 제6장에서 하나님의 실제 역사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선포할 때 일어난다고 하였다. 단순히 믿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믿는 바대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믿는바 믿음의 실체를 체험하기 원한다면 그 믿음을 입술로 선포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입술의 선포와 믿음의 일치를 강조한다. 이때 믿음으로 선포하는 내용은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기반 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하는 것이 왕의 기도이다.

 

왕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 하는 기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미 주신 축복을 누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축복을 누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첫째,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둘째 새 언약의 말씀을 입술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왕의 기도의 핵심 원리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보여주는 예수님의 기도방식이 선포기도였다고 말한다. 이것을 근거로 왕의 기도는 선포기도라고 한다. 이 선포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구하거나 명령하거나 결박하는 기도이다.

 

손 장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는 말씀을 근거로 왕의 기도가 곧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수단이며 천국열쇠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대화하신 것이 간구와 중보의 기도라면, 동네로 다니면서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바로 왕의 기도이며 이는 곧 선포기도이다. 왕의 기도는 선포기도이다. 왕의 기도란 한마디로 “주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 주님의 백성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이다.

 

제3부에는 7-9장이 들어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왕의 기도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나누라는 권면의 내용이다. 제7장에서는 말씀을 전할 때 주님의 실체가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님의 실체가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는 말씀이 하나님의 본질이고 실체이며 증거라고 본다. 그래서 말씀을 통하여 말씀의 본질이신 하나님과 주님의 실체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듣는 것은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함이다. 말씀이신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없이 단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못한다. 사람이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신 주님과 생명을 나눌 때뿐이다.

 

또한 손 장로는 성령님은 주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 가운데 임하신다고 한다.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라면, 성령님은 그 말씀의 증거자이시며 진리의 영으로 그 예수를 증거 하신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와 관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말씀과 성령님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님이 임재 하신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주님의 영이 능력으로, 치유의 권능으로 임하신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입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능력이 생긴다.

 

이어지는 7장 끝 부분의 내용은 ‘계시적인 말씀’에 관한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왕의 기도의 핵심이 이 계시적인 말씀의 흐름에 있다. 계시적인 말씀이란 성령님께서 어느 순간 주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은 내 머리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계시의 흐름을 통해 나온다. 계시적인 말씀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주어진다. 그러므로 왕의 기도는 이성적 기도가 아니라 이런 계시적인 믿음으로 믿어지는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기도이다.

 

“왕의 기도” 8장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믿음의 필요를 강조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한다. 그리고 기도 응답 여부를 이성적으로 확인하려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응답되었음을 선포하고 그 믿음대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개인이 믿음으로 선포하는 기도를 했지만 현장에서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하신 말씀처럼, 언젠가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가진 믿음만이 아니라 그 믿음대로 선포하고 믿고 기다리며 행동하는 것까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한 손 장로는 믿음을 지적 동의와 신뢰 두 단계로 나누고, 믿음의 종류도 이성적인 믿음과 계시적인 믿음으로 나눈다. 그는 지적 믿음은 세상적이나 신뢰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참 믿음이라고 본다. 그리고 믿음의 종류에서 전자는 오감을 통해 경험되고 이해 될 때 생기나, 후자는 성령님이 주시는 것으로 성령님에 의해 말씀이 믿어지는 믿음이라고 한다. 또한 전자는 자신을 향하는 반면 후자는 하나님을 향한다. 우리가 날마다 싸워야 할 ‘믿음의 선한 싸움’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믿음, 즉 이성적인 믿음보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흐름에 대한 믿음, 즉 계시적인 믿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손 장로가 계속하여 이 부분, 즉 ‘계시적인 믿음’을 강조하는데 이번에는 이것이 활성화되려면 성령 충만하여 말씀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그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왕의 기도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된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선포하는 것이다. 선포한 후에 자신이 구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구한 것을 이미 얻은 줄로 믿고, 그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다.

 

“왕의 기도” 제9장은 이 책의 마지막 장으로 왕의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사용하여 기도하는데, 그 이름을 마치 떼를 쓰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받아내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용하시기 위해 주신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질병을 물리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 아들의 이름을 통해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동역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만나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요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동일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왕의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왕의 기도의 보증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는 본인이 그동안 해 온 기도가 예수님으로 또 다시 십자가를 지게 하는 일인 줄 깨닫고,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최고의 권능을 주셨음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요청하고 꾸짖고 내쫓으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법적 근거와 공권력을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왕의 기도’의 단점들

 

2009년도에 총신대의 김지찬 교수가 “신비주의 은사(방언과 치유) 집회,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연구 발표한 것이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김우현과 손기철 장로의 은사, 즉 방언과 치유사역을 개혁파 신학 입장에서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특히 이들의 문제점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그 이후 황성철 교수도 “손기철 장로의 ‘왕의 기도’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평”이라는 글에서 왕의 기도의 본질적 문제로 왕의 기도라는 용어를 일반화 할 수 없다고 하였고 그 목적은 환원주의(還元主義, reductionism)의 위험에 빠질 오류가 있다고 했다. 이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에서는 현재의 성도를 예수님과 사도들과 동일시하는 인간의 신화(神化)교리를 주장한다고 했으며 그 실행 방법적 특징에서는 신비주의적 계시관에 기초한 존재론적 선포가 그 핵심이라고 비평하였다. 그리고 왕의 기도의 응답과 능력에 관해서는 하나님 나라 구현이 육신의 질병과 축복과 저주에만 관련된 것은 표적지상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고,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영성 측면에서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을 제시하였다.

 

손 장로의 왕의 기도에 대해 정이철 목사도 비판한 것이 있다. 그는 주로 인터넷에 글을 올렸는데, 그의 비판적 글의 주요점은 손기철의 신학사상이나 치유 방법의 근원을 따진 것으로 인도 힌두교의 ‘쿤달리니’와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과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지난 2012년 4월에 기독교학술원에서 ‘기독교 영성과 치유은사’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는데, 여기서 장신대의 현요한 박사가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과 신학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논의된 부분은 김지찬의 논문과 달리 손 장로의 치유사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손 장로의 저서와 여러 집회 자료를 근거로 논리정연하게 여덟 가지의 신학적 문제들을 다룬다.

 

위의 몇몇 교수들의 주장은 개혁파 신학에 근거한 비판적 입장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본다. 본인은 손 장로에 대한 이들의 비판적 주장을 수용하면서 여기에 덧붙여 ‘기도의 신학’ 입장에서 왕의 기도의 단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비판의 방법은 본고 2장의 내용을 근거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1)기도의 대상이 잘못되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성경과 여러 관련서적들은 한 결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대답한다. 성경에서 사용된 ‘기도’, ‘기도하다’에 해당되는 원어는 그 대상이 하나님임을 말해준다. 구약에 사용된 ‘팔랄’(פלל, 시17, 86, 90, 102), ‘카라’( , 렘7:16, 욥21:15), ‘샤알’( , 시122:6), ‘자아크’( , 삿3:9), ‘라난’( , 시17:1, 렘31:12), ‘하난’( , 민6:25) 등의 단어들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무엇인가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의 기도(하다)에 사용되었다.

 

신약에 나타난 기도(하다)에 대한 용어도 많다. ‘데에시스’(δεησις, 약5:16, 엡6:18), ‘프로슈케’(προσευχη, 눅6:12, 살전5:17), ‘프로슈코마이’(προσευχομαι, 고전14:14), ‘아이테오’(αιτεω, 살전3:10, 마7:7),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εω, 마18:26, 요4:24), ‘크라조’(κραζω, 요12:44, 히5:7) 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간청하거나 숭배하거나 부르짖을 때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여기에 사용된 성구를 살펴보면 그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위격이심을 알게 된다.

 

신약성경의 기도의 형태가 성부에게 기도하는 것과(요17) 성자께 기도하는 형태(행7:59, 고후12:8, 계1:5-6)가 나타나지만, 성령께 기도하는 예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께도 기도할 수 있다. 개혁파 입장에서 기도의 대상으로 2위와 3위가 되시는 성자나 성령도 가능하나 바람직한 기도의 형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하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성자의 이름으로 주님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성부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 가장 옳은 기도의 구조가 된다는 것이다.

 

손 장로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왕의 기도’를 강조했는데 주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를 반복하는 내용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위에서 내려다보며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가 왕의 기도라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주기도의 전체적인 구조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명령하거나 선언하는 기도의 형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를 우러러보며 간구하는 구조이다.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대상이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 외 전 내용을 간구하는 대상도 역시 성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모범적인 기도(The Model Prayer)를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마6), 친히 기도하시는 본을 보여주셨다(요17). 그 내용에서도 역시 주님은 본인의 기도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여러 번 찾으신다.

 

그러므로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임을 알게 된다. 가장 신뢰할 만한 근거는 ‘주님이 그렇게 기도하셨다’는 것이며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중요 신앙문서에서도 이 사실, 즉 기도는 성부께만 드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장로교 5개 표준문서 중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79문의 답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만이 신앙과 종교적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예배의 부분인 기도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만 올려야 하고 그 한 분 외에 아무에게도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2헬베틱 고백서(Second Helvetic Confession),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에서도 이 주제에 관한 한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칼빈도 그의 책 “기독교 강요” 제3권 20장에서 ‘인간의 의지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만을 통한 기도를 강조한다.’ 즉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결국 죄 많은 인간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위의 문서에 나타난 내용을 근거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유일한 중보자 성자 예수의 이름으로 한 분 하나님께 기도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손 장로의 ‘왕의 기도’는 기도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는 왕의 기도를 예수님처럼 문제를 향해 꾸짖고 명령하는 기도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을 바라보며 주의 뜻을 이루 고자 하는 목적으로 선포하는 기도라는 말을 자주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그 기도의 샘플에서도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 ....병에서 지금 나음을 입었음을 선포하노라. ...질병이 그의 몸에서 사라질지어다.’ 결국 왕의 기도가 기도라고 말하면서도 거기에는 기도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2)기도의 종류를 잘못 분류했다.

 

손 장로는 기도의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그 중 세 번째의 기도, 즉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기도’를 ‘왕의 기도’라고 명명한다. 굳이 왕의 기도라고 부른 이유를,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논리가 어색하다. 우리가 왕인가 아니면 왕의 자녀인가? 왕이라면 성경 어디에 근거하여 그런 논리를 펴는가? 만약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왕이라고 했다면 그 말씀의 원래의 뜻을 곡해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왕의 자녀라면, ‘왕의 자녀의 기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왕의 자녀인데, 타이틀은 왕의 기도로 붙인 것은 맞지 않는 논리로 보인다.

 

보통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도의 종류로는 ‘기도’, ‘간구(청)’, ‘도고’, ‘회개’, ‘방언’, 등등을 말한다. 그리고 기도의 신학자들은 기도의 종류를 분류할 때 ‘개인기도’와 ‘공중기도’로 2대별하기도 하고, 혹자는 소리의 유무에 따라서 ‘묵상기도’와 ‘음성기도’로 나누기도 한다.

 

그런 반면 손 장로가 기도의 종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교제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으로 나눈 것은 근거가 없는 자기주장이다. 첫째와 둘째는 기도의 종류라기보다 기도의 본질이다.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둘은 기도의 다른 종류가 아니라, 그냥 기도의 본질로 이해를 해야 하고, 나머지 하나는 기도의 범주에 속할 수 없다. 그것을 굳이 하나의 타이틀로 정한다면 소위 말하는 ‘축사’(逐邪)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와 축사를 분리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기도 중에 축사를 행하는 예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축사와 관련된 본문을 분석해 본 결과 예수님이 직접 축사한 것이 총 11회 나타난다(마8:16-17, 8:28-34, 9:32-34, 12:22, 15:21-28, 17:14-18; 막1:21-28, 32-34, 39; 눅6:17-19, 13:10-13). 그리고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이 마태복음 10:1-8, 마가복음 3:15, 6:7, 누가복음 9:1에 나타나고 실제로 제자들이 축사를 행한 것은 복음서에는 마가복음 6:12-13에만 나타난다. 그리고 마가복음 9:38-40에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추방했다는 기사와 70인 제자가 귀신을 내 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눅10:17).

 

그 외 사도행전에 축사의 장면이 3회 기록되어져 있는데, 먼저는 베드로에 의해서(행5), 다음은 빌립에 의해서(행8), 그리고 다음은 바울에 의해 악귀가 쫓겨난다(행16).

 

이 같은 분석에서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든 제자이든 아니면 무명의 기독교인이든 간에 그들이 축사를 행한 것이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축사를 기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기도의 일종으로 본 것도 아니다. 축사는 축사이고 기도는 기도이지 축사가 기도의 한 유형이 아니다.

 

그래서 손 장로의 왕의 기도는 ‘축사’라 말할 수는 있어도 기도의 한 형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간구하거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만이 기도라고 할 수 있지, 하나님 편에서 명령하고 선포한다는 왕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칼빈도 기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로 보았고 이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3)축사 시 명령의 대상을 오해하였다.

 

손 장로의 왕의 기도를 축사로 보더라도 여기에는 문제가 남는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귀신을 쫓아낼 때, 그 대상은 사람의 속에서 그를 괴롭히는 원수였다. 귀신이 그 사람을 장악하여 넘어지게 하거나 꺼꾸러뜨릴 때, 그 속에 있는 귀신(들)을 향하여 명령을 한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고, 사도들도 주님을 본받아 동일하게 시도 하였다. 다른 피조물이나 동물들 그리고 무생물을 상대로 명령한 것이 없다. 물론 주님이 바람과 파도를 보고 꾸짖기는 했지만(마8:26) 이것은 주님의 메시야 성을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해야지 축사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을 향해 명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주님만이 창조주 되심을 드러내는 일이다.

 

손 장로는 왕의 기도를 시작하면서 중국에서 회중들이 말씀 듣는 것을 방해하는 모기떼 추방 명령을 내린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회중들의 몸에서 모기가 싫어하는 물질이 분비되라는 명령을 한다. 그랬더니 그 날 밤에 모기에게 물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이야기 한다. 인격체가 아닌 모기떼와 사람 몸을 향하여 선포명령을 한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 일(죽은 자를 향하여 명령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대가 늘어나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명하기도 하고(...고통스럽게 하는 다리 통증이 사라질지어다.), 어떤 의사가 할머니의 아픈 다리를 향해 선포하는 예도 있고, 지정한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다고 주의 이름으로 선포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많은 이적들을 그의 서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은 내용을 통하여 손 장로는 고통 받는 신체의 일부와 어느 특정한 지역을 향해서도 선포기도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축사의 대상이 악한 원수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임을 기억하고 바로 그를 향하여 축사해야 한다고 본다. 바울의 말을 보더라도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만약 축사가 아닌 치유를 위해 기도를 하더라도 성경적인 예를 따라서 기도함이 좋겠다. 그리고 베드로가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행9:40)고 한 것을 근거로 우리도 왕의 기도로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도성의 연결이라는 잘못된 신학사상과 정경완성 이후 하나님의 비상섭리로서의 이적을 보편화 시키는 것에 근거하여 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베드로는 홀로 하나님께 겸손히 간절히 기도하고 난 후에 다비다를 향해 이런 명령을 내렸음도 기억해야 한다.

 

4)오해할 만한 신학적 문제들이 있다.

 

(1)‘왕의 기도’라는 용어

 

‘왕의 기도’라는 말도 하나님의 자녀가 왕이라고 할 때,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왕이 백성들에게 명령하면 그 백성들은 당연히 들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이런 말을 고안했는지 모르지만, 단순히 ‘축사’라고 하든지 아니면 ‘환자를 위한 기도’, 또는 ‘자녀들의 기도’라고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2)성령 받는 것과 성령 세례 받는 것 사이의 차이

 

“왕의 기도” 34페이지 이하에서는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사이를 구분하고 있는데, 개혁파 입장에서는 구분하지 않고 ‘성령세례’를 구원과 관계된 단회적 사건으로 본다. 그리고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그것을 성령세례와 동일하게 보기도 하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성령 충만과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한다. 다른 책에서 그는 성령의 내주는 예수를 믿고 고백할 때 주어지는 것이나, 그것이 곧 성령세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지할 때 단순한 내주가 아닌 충만히 거하신다고 한다. 이것을 그는 성령세례와 충만으로 본 것 같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위의 단계와 달리 위로부터 임하심(upon us)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그분의 능력이라고 한다. 손 장로는 오순절 계통의 주장처럼 성령을 받는 것을 내주로 본 것 같고, 성령세례를 충만에 가까운 것으로 본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경험을 근거로 성령을 받아 성령이 신자들 안에 내주하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을 구분 한다.

 

(3)하나님과의 동역

 

그는 ‘왕의 기도’를 하나님과 동역하는 방법으로 말하는데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이 병자들을 낫게 하시는데 왕의 기도를 함으로 병자를 낫게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역한다는 말인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하고 내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는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더 성경적이라고 본다. 황성철 교수의 비평처럼 잘못하면 인간의 신화 교리에 빠질 우려가 있다. 심지어 왕의 기도 대표 예문에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암종에 덮노라. 모든 암 조직은 녹아 없어질 것이며, 깨끗하게 될지어다.”라고 말함으로 주님의 보혈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과의 동역을 넘어 하나님처럼 보인다.

 

(4)성경이 말하는 일반적 기도를 폄하

 

손 장로는 학자답게 글을 논리정연하게 쓴다. 시종일관 주제에 맞추어 그의 논리를 펴 가면서, ‘왕의 기도’를 너무 강조하려다가 우리가 ‘주를 우러러 보는 기도’를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주를 우러러 보는 기도를 했으나 지금은 그런 기도의 때가 아니라는 뉘앙스나 지금처럼 기도하는 것을 마치 예수 이름으로 떼를 쓰는 기도, 주시지도 않는데 억지로 받아내려는 도구라고 한 것이나, 지금까지 해 온 전통적인 기도를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라고 하는 말은 왕의 기도를 강조하기 위해 일반기도를 비하하는 말이지 않는가? 지금까지 성도들의 기도가 바르지 못하다거나 응답이 없다거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라는 말을 할 때에는 단순히 자기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분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이것과 맥을 같이해서 새벽기도, 부흥집회, 구역예배, 전도를 무거운 짐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문제이다.

 

(5)인간의 구조를 육과 혼으로 구분

 

그리고 손 장로는 ‘인간의 구조’에 관해 확실히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지는 않지만 여러 군데에서 ‘육과 혼’을 이야기 한다. ‘성령님이 우리의 혼과 육을 통치하셔야 된다, 성령님께 내 혼과 육을 전폭적으로 맡기는 것이 성령 충만이다.’는 말에서 그는 2분설을 주장하는지(육과 혼) 아니면 3분설(육, 혼, 영)을 주장하는지 애매하다. 문장의 뉘앙스로 보아서는 ‘육과 영혼’의 2분설이 아니라, ‘육과 혼’의 2분설을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다른 책에서는 영, 혼, 육의 3분설을 말하기도 한다.

 

(6)반쪽자리 복음

 

손 장로는 그의 책 94페이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만의 신학적 용어를 쓴다. 소위 ‘반쪽자리 복음’이라는 말인데, 이는 하나님 나라를 모르고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당연히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이것은 완전한 복음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그 천국,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냄으로 임하는 그 이미(already)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이것을 분리해서 말할 수 없으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진리를 ‘반쪽 복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오해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을 너무 개인적인 치유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하나님 나라를 단지 질병의 치유에 한정하여 좁게 이해하는 것 같다. 아울러 하나님 나라를 단지 성공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치유은사운동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7)계시적 말씀 주장

 

어쩌면 손 장로의 가장 큰 신학적 오류는, ‘지식의 말씀’, 또는 ‘계시적 말씀’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몇 명이 치유 받을 것인지, 누가, 어떤 병에서 치유 받을 것인지’를 성령께서 지식의 말씀으로 알려 주신다는 것이다. 이 ‘계시적 말씀’을 ‘성령님께서 어느 순간에 주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한 그는 자기의 간증도 적고 있다. 그는 얼굴에 나타난 글씨를 보게 되면서부터 이 은사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손 장로는 하나님께서 지식의 말씀을 주시는 방법으로 대략 7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직접계시를 의미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도 연관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맞먹는 권위의 계시가 지금도 흐르고 있다는 주장이라면 계시의 완전성과 충분성에 위배되는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께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신다면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만, 말씀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정통 진리에서 벗어나는 주장이 된다. 그래서 김지찬 교수가 손 장로는 ‘로고스보다 레마를 중요시하며, 레마가 매우 주관적이며 사적 계시로 성경을 훼손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비판한 것은 옳다고 본다.

 

(8) 믿음의 2중 구분

 

그는 믿음을 이성적인 것과, 계시적인 믿음으로 구분한다. 이 두 믿음의 성경적인 예로 ‘다윗과 골리앗’을 들었다. 골리앗은 오감을 통하여 이해될 때 믿는 믿음, 즉 이성적인 믿음을 가졌지만, 반대로 다윗은 성령이 그 안에서 믿어지는 믿음, 즉 계시적인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너무 자기 주관적으로, 자기주장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을 한 것 같다. 그리고 성경 어디를 보아도 믿음을 이성적인 믿음과 계시적인 믿음으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없다. 단, ‘믿음이 없다, 믿음이 적다, 믿음이 크다.’는 표현은 있다. 성경적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되 억지로 말을 만들어 내서 거기에 성경을 꿰맞출 필요는 없다고 본다.

 

(9)치유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인가?

 

치유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인가? 그는 이사야 53장 5절, 마태복음 8장 16-17절을 주 근거로 치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주님이 실제로 자기에게 찾아온 모든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다(마8:16, 마12:15, 눅6:19)는 말씀을 근거로,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장로는 자신의 집회에서도 많은 사람이 낫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의 육체적 가시를 지적하면 그것은 특별한 경우로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한 것이나(딤전5:23) 드로비모가 병이 들어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는 경우(딤후4:20)도 특수 예로 본다. 그는 분명히 치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면서 또한 모든 환자가 다 낫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달린 신비라고 주장한다. 성경에 나타난 분명한 사건을 특수한 예로 취급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고, 또한 주님이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낫게 하시는 사건에서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는 말씀과도 상충이 되므로, 치유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장은 지나치지 않는가? 사람들의 대부분은 늙고 병들어서 죽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안경을 끼는 것도 육체의 연약함으로 일종이 병이 아닌가? 이런 문제에 관해 성경적이며 종합적인 견해가 필요하지 너무 지엽적이고 치유 일변도의 주장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10)치유 시 일어나는 현상들

 

치유 시 일어나는 현상들은 본서만 보더라도 ‘쓰러지고 우는 현상’,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현상’ 등이 나타나고, 다른 책에서는 성령님이 임재하면 나타나는 현상들을 설명하면서 치유 시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거기에서는 ‘쓰러지거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반응이 나타나거나, 운다거나, 울부짖거나, 눈꺼풀이 떨리거나, 눈동자가 움직이거나, 호흡이 빨라지기도 하고, 온 몸이 심하게 떨리기도 하고, 큰 소리로 웃거나, 악을 쓰듯 큰 소리를 지르거나, 심한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했다. 손 장로는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을 ‘그 동안 인간이 행사해 온 자신에 대한 통치권을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가져가신다는 일종의 사인이며 또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함으로 닫아 놓았던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경험’이라고 해석을 하였으나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이 아닌가? 이것이 성령이 임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나 치유 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11)전이(Impartation)

 

손기철의 주장들이 창조적인 사항도 있으나 성령의 기름부음이나 치유사역에 관한 한 앞 선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미국 유학시절 다니던 교회의 목사로부터 안수기도를 받음으로 방언을 받았던 것과 온누리교회의 크리스 헤리슨(Chris Harrison)의 기도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주장과 2005년 안식년에 미국교회와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런 사람들로부터 기도를 받거나 집회에 참여한 것, 특히 릭 조이너(Rick Joyner)로부터 두 차례 안수를 받은 것, 존 윔버(John Wimber)의 “능력전도”(Power Evangelism)를 수십 번 읽은 것, 윔버로부터 영향을 받은 랜디 클락(Randy Clack), 베니 힌(Tofik Benedictus Benny Hinn)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것, 미국의 행크 해너그라프(Hank Hanegraaff)의 책 “빈야드와 가짜 신사도의 부흥운동”에서 헌터부부(Charles & Frances Hunter) 이야기를 읽고 많은 도전과 힘과 용기를 얻었다는 것, 헌터부부에게 전이를 시킨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Rodney Howard Browne)에게서도 큰 감명을 받은 것 등이 이를 증명한다. 줄여서 말하면 손 장로도 빈야드와 신사도 운동의 지도자들로부터 전이를 받았다는 것이다.

 

전이 혹은 임파테이션(Impartation)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나의 육신을 뚫고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본인도 먼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치유사역을 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전이가 된 것으로 보고 이 임파테이션은 또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본인을 통해서는 김우현 PD와 규장출판사의 여진구 대표에게 전이되었다고 본다. 그러면 과연 ‘전이’가 신학적으로 정당한 용어인지, 과연 성령이 사람을 통해 유출되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의 주체가 인간일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심지어 정이철 목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직접 사람 의도를 따라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은사가 전이되는 현상은 절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런 현상이 힌두교에도 있는데, 쿤달리니(Kundalini) 현상이라고 한다. 쿤달리니 각성을 일찍 경험해 신통력을 가진 힌두교 선생 구루(Guru)들이 다른 수련자들 이마에 손을 대는 등 행위를 할 때 지금 신사도 운동가들이 일으키는 일들이 그대로 나타난다. 신사도 운동가들은 그것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주장하면서 임파테이션이라는 성경에 없는 이론으로 포장했다.”고 평가한다.

 

(12)성경을 잘못 이해, 적용한 부분이 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3:17)라는 말씀을 손 장로는 자기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는 이런 경험, 즉 예수님과 동인투사(同人投射)를 거치면서 예수님이 드린 기도를 닮아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성구는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 메시야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리델보스(Herman N. Ridderbos)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을 ‘예수의 메시야직 때문에 자신과의 독특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의 신적 사역과 소명에 전적으로 헌신하므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한 자라’는 뜻으로 본다. 이 같은 주장은 예레미아스(J. Jeremias)도 거의 동일한 입장이다. 특히 예레미아스는 시편2:7과 이사야42:1을 인용하여 이 구절과 관련시켜 설명하면서, 아들을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들’로, 그리고 기뻐하시되 ‘항구적으로 기뻐하실 자’로 묘사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능력으로 인치심을 받으신 존재가 결국에는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만약 이 성구가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면 결코 인간 개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장로가 이 말씀을 자기 개인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았다면 본인이 메시야라는 말인가? 또는 메시야적 사역을 감당하여 하나님을 기뻐시게 해 드릴 자라는 말인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이 말씀을 자기에게도 동일하게 주셨다고 하는 표현은 위험하다고 본다.

 

또한 왕의 기도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수단, 즉 천국열쇠라고 주장을 하였다. 손 장로가 이해하는 천국열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열 수 있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왕의 기도에 의해 열려진다는 그의 주장은 분명 정통 신학적 견해와 다르다. 천국열쇠에 대한 정통 신학적 입장은 ‘교회의 권징 혹은 훈육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84항에서 하나님 나라는 오직 거룩한 복음으로써만 열려질 수 있다고 선언하고 제85항에서 하나님 나라는 권징 혹은 교회훈련에 의하여 어떻게 열려지고 닫히는가를 묻고 있다. 또한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회개훈련의 차원에서 말씀과 성례전을 보완하는 방편으로서 교회의 목회적 권세로 천국열쇠를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손 장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셨던 천국열쇠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으며 잘못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손 장로는 자기주장에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하지만 이 외에도 몇 구절의 이해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왕의 기도는 다스리는 권세를 누리는 기도’라고 하면서 시편 8:6을 인용 한 것이나,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는 말씀을 단순히 ‘내적 치유라는 재건축’으로 제한하여 본 것은, 근시안적인 태도이다. 또한 사도행전 9:40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했던 일이라면 우리도 명령하는 것이 가하다고 한 것과 예수가 행하신 일을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요14:12을 인용하여 왕의 기도로 인한 ‘치유’에 한정한 것은 본질을 외면한 지엽적인 성경해석의 문제가 있다고 보여 진다.

 

나가는 말

 

본고의 일차적인 목적에 따라 손기철 장로의 “왕의 기도”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책의 주요내용을 살펴보았다. 손 장로가 깨달았다는 왕의 기도를 현대 기독교인은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하늘나라 백성만이 이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이 기도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왕의 기도 실천편으로 왕의 기도 실행 6단계와 왕의 기도 대표예문을 다루고 프롤로그로 글을 마감한다.

 

그리고 두 번째 목적에 해당되는 것이 이 기도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개혁파 기도의 신학 입장에서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즉 기도의 대상이 문제가 되고, 기도의 종류를 잘못 분류한 점과, 축사 시 그 내용을 오해하고 있으며, 그리고 12가지의 신학적 문제들을 지적했다. 12가지 문제들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직접계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계시 믿음을 주장한 것이다.

 

손 장로의 “왕의 기도”에 대한 이 같은 이해와 평가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할 수 있다. 성도들이 기도를 할 때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하므로 기도의 대상을 명확히 함이 필요하다.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늘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의 응답자 되시는 성부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여야 한다. 아울러 기도의 종류를 비롯해서 기도에 관한 여러 사항을 성경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성경적 기도를 이해하고 성경적으로 올바른 기도생활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른 성경관에 입각한 신앙생활과 신학활동이 요청된다.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용어를 만들거나 성경을 초월한 신비적인 사건을 추구하거나 성경에 없는 은사를 강조하는 것이나 성경에 빗나간 치유사역을 보편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기의 경험을 성경에 맞추려하지 말고 아무리 진기한 경험이나 이적이라 할지라도 성경에 비추어서 성경의 증거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본인의 잘못된 사상과 이론을 수정하여야 한다. 그래서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라는 데서 멈추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마지막 한 가지 더 권고하고 싶은 것은 건전한 목회적 돌봄에 충실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영적으로 공허하며 육체적인 나약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봄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위로와 격려를 얻어서 힘과 용기를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시대적 사조에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경건하게 살아가게 해야 하겠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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