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 과연 성경적인가? | 운영자 | 2017-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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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과연 성경적인가?
오 창 윤 교수
최근 한국 교계에 '관상기도'라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며, 일부 교단에서는 이를 경계하여 조사연구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했다. 지금도 신문이나 신학 잡지에서 관상기도를 보급하는 세미나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누구나 알만한 초대형 교회의 목회자가 인도하는 관상기도 세미나에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참석하기도 한다.
그러면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 주장자들이 중요시 하는 어번 홈즈의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란 책을 보면, 기도의 현상을 크게 4가지로 나누고 있다. 사색적(spepculative) 기도, 감정적(affective) 기도, 상상적(imaginative, kataphatic) 기도, 비우는(emptying, apophatic) 기도다. 사색적 기도는 성경을 묵상·공부·독서를 통해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다. 감정적 기도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적 기도는 예수회의 영성 수련방법이나, 동방 교회의 성화를 보며 기도하는 방법 등이 이에 속한다. 곧, 십자가 위의 달려서 피를 흘리시는 주님을 상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심을 키우고 기도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비우는 기도는 주님의 현존에 머무르며 가슴으로 기도하며 직관으로 주님의 뜻을 찾고 기도하는 방식이다. 바로 자기를 비워서 그 빈 공간을 주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관상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관상기도는 성경적인가?
먼저 지적할 것은, 관상기도는 성경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대표적인 관상기도 주장자인 권명수 교수(한신대)는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로 몇 몇 구절들을 꼽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구절로서는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사30:15)를 꼽으면서 '잠잠히' 기도하는 것 즉 관상기도를 이끌어 낸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사람이 노력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또 하나의 구절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이다. 여기 나오는 ‘가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 침묵 가운데 있으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즉 관상기도(침묵)를 하는 중에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 구절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구원과 관계된 것이지 관상기도와 연결된 흔적이 없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하는 말은 과거 이스라엘 가운데서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너희가 조용히 보고 믿으라’는 뜻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또 다른 하나의 성경구절로서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산의 동굴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왕19:1~18)고 한 것을 관상기도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조용히 관상기도를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데,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요란하게 외부적인 물리현상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영적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즉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영적인 묘사일 뿐이지 엘리야가 조용히 침묵하는 관상기도를 했다는 묘사가 아니다. 이상의 성경구절에 대한 그들의 해석만 보더라도 관상기도가 얼마나 성경적 지지기반이 취약하지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관상기도는 비기독교적 행위이다. 관상기도 주장자들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가 그동안 부르짖어온 기도는 ‘무엇을 구하기 위한 기도로서 아주 낮은 단계의 저급한 수준’으로 취급하고, 반면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머무르는 기도’ 즉 드디어 높은 경지에 오른 깊은 기도처럼 소개하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관상(觀想 contemplation)이란 말은 ‘마음의 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곧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히며 있노라면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영상·정서들이 흘러들어오는 것들을 글자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 대상과 일치가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관상기도란 영성수련을 통해 관상 상태를 지향하면서 자기를 비우는 기도라고 말한다. 외관상으로는 동양의 명상 전통과 비슷하다. 어떤 이들은 관상기도를 '묵상기도', '침묵기도', '명상기도'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는 입으로 소리 내어 간구하거나 마음속으로도 주님께 간구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고,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주님께 가슴의 마음 문을 여는 행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관상기도 주장자들은 관상기도가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 대화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아도취적 기도요, 자기 확신과 자기 최면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 대화가 아니다. 이는 자아를 향한 깊은 자아 최면 상태에서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확신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또 다른 신비주의이며 인본주의적 기도다. 내 속에 계신 하나님과 나라고 하는 자아는 분명히 다르고 구분해야 한다. 그들은 관상기도를 자아가 의식하는 사고 즉 자기 마음과의 대화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하며 그 사고 자체를 하나님 안에서 얻는 안식이며 높은 경지에 이른 기도라고 하는데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최면 상태에서 자기 마음과의 대화라고 하는 비성경적인 기도관이다.
더 나아가, 관상기도는 이교적 기도법과 너무나 흡사하다. 관상기도법 가운데 "예수 기도"가 있는데, 이 기도법은 호흡을 맞춰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 이 기도는 숨을 들여 마시면서 "그리스도시여"라고 생각을 하고, 숨을 내쉬면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끊임없이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시점에 가서 길거리에 있는 걸인들이 주님으로 보이고, 그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 긍휼한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이런 명상법은 불교의 수직 명상법(아나파나사티 명상법)과 일치하는 것이다. 불교의 수직 명상법을 원어로 '아나파나사티'라고 하는데, 여기서 '아나'는 들숨을, '아파나'는 날숨을, 그리고 '사티'는 집중을 의미하는 말한다. 즉 명상자는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분심(산만한 마음)'을 제어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관찰하여 거짓과 집착에서 벗어나 생사고뇌가 없는 영원한 '본래의 참 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불교의 명상법과 너무나 흡사하다.
관상기도는 그 수련 방식에 있어서도 불교의 참선과 너무나 흡시하다. 예를 들어 토마스 키딩이라는 관상기도의 권위자의 표현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관상 기도는 어떤 바램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생각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벗어나서 텅 빈 채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그 너머에 있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것은 불교의 명상법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불교의 명상법은 자신을 비우는 것에 집중하는데 그들의 교리를 보면 "분별, 망상, 사유 작용이 그치면 이 작용을 방해하던 것들이 곧 없어져, 마음은 고요로 가득차고, 무(없을 무)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관상기도에 대한 어떤 강의 동영상(www.koabby.com 고려수도원)을 보면, 이십 여 명의 수도자들이 어떤 교회당 같은 곳에 앉아 있고 그 앞에는 관상기도의 인도자가 앉아 있는데 얼른 보면 불교 승려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더 놀라는 것은 그 모임을 인도하고 또 중지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불교 수행에서 사용하는 죽비와 너무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그런 기도법은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 최면술에 해당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최면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호흡법인데, 이 호흡법을 통해서 자기 최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관상기도를 통해서 걸인들이 예수님으로 보였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역사라기 보다는 자기 최면술에 의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맺는 말
관상기도에 관해서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이것은 이교적 명상과 뉴에이지적 유행을 따르는 비기독교적 종교행위임을 알고 겅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 내에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 일변도의 일방통행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자칫 침묵하는 기도와 깊이 묵상하는 기도까지 관상기도로 오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진정한 묵상이 더 절실한 시점이다.
(이 글의 성격상 참고문헌이나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신문 지면이나 인터넷 상의 많은 글들을 종합해서 쓴 것임을 밝혀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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