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주기도 이해 | 운영자 | 2017-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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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주기도 이해(J. Calvin's Understanding on the Lord's Prayer) 실천신학 이정현 교수
목차 Ⅰ. 서론
Ⅱ. 주기도에 대한 칼빈의 배경 설명 A. 주기도의 필요성 B. 주기도의 구조
Ⅲ. 칼빈의 주기도 해설 A. 호칭(마6:9중)
B. 간구(마6:9하-13상) 1.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간구(마6:9하-10) a. 하나님의 이름 b. 하나님의 나라 c. 하나님의 뜻
2. 우리의 유익과 관계된 간구(마6:11-13상) a. 일용할 양식 b. 죄 용서 c. 시험
C. 송영(마6:13하) 1. 나라, 권세, 영광 2. 아멘
Ⅳ. 결론 참고문헌
칼빈의 주기도 이해
Ⅰ. 서론
성경은 기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 기도의 내용, 태도, 대상, 능력, 응답, 주의사항, 자세, 종류 그리고 모범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기도를 배우려면 성경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과 바람직한 내용을 배우기 원하면 역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소위 ‘주기도’에 유의해야 한다. 성도들이 주의 깊게 주기도를 살핀다면 그것을 통하여 일차적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던 내용을 알게 됨으로써,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기도는 성도들의 영적생활에 큰 유익을 주는 중요한 기도의 원리가 담긴 기도임에 틀림이 없다.
칼빈은 주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경에 주기도와 같은 기도도 찾아볼 수 없고 주기도를 초월하는 기도도 없다....주기도의 집약된 내용 외에 그 어떤 것도 간청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말 즉, 주기도는 ‘유일한 합법적 기도’(the lawful prayer)라는 멋진 말을 인용하여 다른 모든 기도는 무법(無法)한 것, 금지해야 할 것으로 봄으로써, 주기도를 가장 모범적이고 가치 있는 기도문으로 취급했다.
칼빈이 주기도를 중요하게 취급했다는 사실은 그가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와 제네바(Geneva)에서 드렸던 예배의 순서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양쪽에서 드렸던 예배 중 전자는 한 예배 안에서 두 번이나 주기도를 사용했고, 후자에서는 1회로 사용되었다. 스트라스부르그 예배서(1540)에 나타난 2회 중 처음은 ‘길게 푼 주기도’(The Lord's Prayer in long paraphrase)로 기도 했고 다음은 암송으로 시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기도가 그렇게 중요하고 가치 있기 때문에 한 예배 안에 2회를 반복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네바로 돌아와서는 그것이 중복 사용됨으로 식상하고 형식적이 된다는 시의회의 지적에 따라, 암송하는 주기도는 삭제하고 ‘길게 푼 주기도’ 순서만 가지게 되었다.
개인의 경건생활이든 공 예배에서든 주기도가 이렇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면, 현대교회가 한 번 더 이 기도에 주목하여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칼빈이 이 주기도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기도생활에 유익을 얻고자 한다. 또한 이 기도의 의미를 잘 알아서 예배의 한 순서로 바르게 사용해야 하겠다.
그동안 칼빈의 주기도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다만 그의 기도론의 일부로 주기도를 이해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연구 자료가 부족하여 이 주제로 연구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연구되어야 할 충분한 가치는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주님의 이 기도를 어느 누구보다도 칼빈이 그토록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20장의 기도론 중에 주기도 해설이 나타나고, 그의 공관복음 주석과 또한 그의 “신앙교육서”에도 해설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 바, 이런 자료를 통하여 칼빈이 보는 주기도의 구조와 그 내용을 고찰하고자 한다. 물론 기독교강요는 초판부터 마지막 판까지를 참고할 것이다.
Ⅱ. 주기도에 대한 칼빈의 배경 설명
칼빈은 주기도를 본격적으로 해석하기 전에 이 기도의 필요성과 구조에 관하여 설명한다. 주기도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한 것이다.
A. 주기도의 필요성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하는지 빌 바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 안에 보내주셔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며 또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아울러 주님께서 우둔한 우리를 돕기 위하여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다.
모델기도(The Model Prayer)를 제시하심으로써 우리가 간청할 수 있는 기도의 범위와 내용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입술에 말씀을 주셔서 마음의 혼란을 막아주시기 위함이다.’ 만일 우리에게 주기도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바른 내용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혼란 속에 빠져 기도에 방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님이 이 기도의 한 형식, 즉 한 서판(tabula)에 적은 것처럼 보여주신 그것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사항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기도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한 모델로서 필수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B. 주기도의 구조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을 1536년에 내고, 이어서 1539년과 1543-1550년에 수정, 증보하여 1559년 최종판을 출판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그 내용이 둘째 판에서 많이 증보되었고, 셋째 판에서는 ‘맹세론: 수도원 제도’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과정 중에서도 기도론은 변하지 않고 그 순서를 차지한다. 다만 주기도 해설의 순서가 바뀌고 그 내용 또한 개정, 증보되었을 뿐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최종판)에서 내용의 순서에 따라 주기도를 해설한다. 기독교강요 3권 20장이 그의 기도에 관한 견해인데, 그 가운데 주기도와 관계된 내용은 34절부터 마지막 52절까지이다. 그 중에서도 주기도의 본문해석이 아닌 34-35절과 48-52절을 제하고 나면, 나머지 36-47절까지가 주기도 해설이 된다.
개혁자 칼빈은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본문을 택함에 있어, 누가(눅11:1-4)의 것을 취하지 않고 마태(마6:9-13)의 것을 따른다. 예배에 사용하는 주기도로 마태복음 본문을 취하는 이유를 그는 밝히지 않고 그저 마태의 본문을 따라 해석한다. 그리고 칼빈은 주님이 두 번 기도를 가르치셨는지 아니면 한 번 가르치셨는데 기자들이 달리 기록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말만 한다. 아울러 마태가 생략한 누가의 본문 서두(눅11:1)에 관해서도 주님이 동일하게 말씀하셨으나 빠뜨린 것으로 이해하고 더 이상 논쟁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는 주기도를 해석하기 전에 그 ‘구조와 핵심’ 내용을 말한다. 그는 마태의 주기도를 세 가지 즉, ‘첫머리’, ‘여섯 간구’ 그리고 ‘마지막 부분’으로 나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첫머리 부분이고, ‘이름, 나라, 뜻, 양식, 죄 용서, 시험’ 부분이 몸통에 해당되는 간구 부분이고, 나머지 ‘나라, 권세,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께 있다’는 내용이 마지막 부분이다.
주기도 중간의 간구를 칼빈은 여섯 개로 나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에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연결고리로 헬라어의 반의적(反意的) 접속사 ‘알라’(αλλα)를 삽입한 것을 볼 때 접속사를 전후로 한 이 기도는 하나라는 것이다. 고대교부들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고 본다. 칼빈의 영향으로 현대의 유수한 학자들(브루스, 플루머, 메쯔거, 헨드릭센) 역시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6간구를 십계명의 두 돌판을 근거로 둘로 나누는데, 앞의 세 간구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간구로 보고, 후자는 인간의 유익을 위한 세 간구로 여긴다. 그리고 비록 후자가 개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기는 하나, 이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1계명에서 4계명까지가 하나님 사랑으로 요약되고, 5계명 이하가 이웃사랑으로 요약이 되듯이, 6간구의 전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 있으며 후반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간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후반역시 전반의 간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의 주기도 구조분석은 여섯 간구를 중심으로 앞뒤에 서두와 송영을 덧붙이고 있는 형태이다. 크게는 세 부분(서두, 간구, 송영)으로, 좀 더 세밀하게는 8부분(서두, 6간구, 송영)으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Ⅲ. 칼빈의 주기도 해설
마태복음의 주기도 구조는, 첫머리와 2인칭 단수 간구(Thou-petitions) 세 가지, 1인칭 복수 간구(We-petitions) 세 가지 그리고 송영(Doxology)으로 이루어졌다. 중간의 6가지 청도(請禱) 중 3개의 간구는 접속사 없이 나열되어 있으나 뒤의 3개의 간구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차례로 그 의미를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A. 첫머리(마6:9중)
칼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해당되는 머리말을 무려 4절(기독교강요 3권 20장 36-38절, 40절)에 걸쳐 해석함으로써 이 부분의 중요성을 암시적으로 지적했다. 즉, 4절에 걸쳐 단계적으로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그리고 ‘전체’를 설명하는 형식을 취한다.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기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드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먼저 내어 놓는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자녀로 양자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칼빈은 몇몇 성구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로 들고 있다. 그 사랑의 증거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부를 때 단순히 나 개인의 아버지로 부르지 말고,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기독교강요 3권 20장 37-38절에서 칼빈은 ‘우리 아버지’를 주해하면서, 각각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갖도록 격려함’과 ‘이 호칭의 형식은 우리와 형제들 간의 친교를 확립해 준다.’는 말로 부제를 달았다. 37절의 부제가 말해 주듯이, ‘우리 아버지’는 긍휼이 많으신 위로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도록 자녀들을 격려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스스로 탄식과 눈물로 간구할 때 기도에 응답해주신다.
38절에서는 ‘우리’의 의미를 간략히, 그러면서도 정확히 해석하고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개인의 아버지로 부르지 말고 공동적으로(in commune) ‘우리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는 주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규칙에 따라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모든 사람들을 공통적으로(communes) 받아들이고 포용해야만 한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이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가 드리는 이 기도는 그의 나라와 교회 공동체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다음 한 절을 할애하여 기도와 자선을 비교한다. 그는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한다는 공통점과 아울러, 구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할 수 있으나 기도는 낯설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할 수 있다는 차이점을 지적한다.
이어지는 그의 해설은 ‘하늘에 계신’에 주의한다. 여기서의 하늘은 ‘둥근 원’을 말하지 않는다. 특별한 한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늘보다 더 숭고하고 위엄 있는, 모든 장소를 초월한 곳을 말한다. 둘째, 아울러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패와 변화의 가능성을 초월하여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힘으로 전 우주를 함께 포용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단계로 주기도의 첫머리를 설명하는 칼빈은 히브리서(11:6)의와 바울의 빌립보서(4:6)의 말씀을 근거로,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염려 없이 나아가기를 바란다. 칼빈은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대상으로서 어떤 분임을 분명히 말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나아가기를 원한다.
B. 간구(마6:9하-13상)
간구에는 예레미아스(J. Jeremias)가 지적한 대로 Thou-petitions과 We-petitions가 있는데 각각 세 개의 간구로 구성되었다. 칼빈도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기도와 우리의 유익과 관계된 간구로 나누어 설명한다.
1.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간구(마6:9하-10)
칼빈은 첫 세 가지 간구를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간구’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거나, ‘나라가 임하옵시며’와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철저하게 우리의 욕심과 상급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영광 한 가지만 앞세우는 것이다. 처음 세 청원에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엄은 다른 모든 관심 사항을 뛰어넘는 칭송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a. 하나님의 이름(마6:9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우리의 큰 수치(magno dedecore)와 연관이 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수치와 연관이 있다는 말은, 우리의 배은망덕, 감사치 않는 태도, 악의, 광적인 뻔뻔스러움, 정신 나간 불경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있다는 뜻이다.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에 최상의 경의를 표해야 하겠으나 그의 위엄을 가볍게 여기고 그의 이름을 속되게 사용하며 수준 이하의 경외를 한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방자함과 참람함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홀로 거룩한 분이시며, 인간에 의해 속되거나 거룩해 지는 분은 아니시다.
하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전히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다할지라도 최소한 기도 가운데서는 그 문제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기도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스스로 합당한 존귀를 받으시기를,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거나 생각할 때에 최고의 경의를 품기를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몫인 경외를 이 세상에서 받으소서’라는 기도를 가장 먼저 하라고 요청하셨다. 이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일을 혼란케 하거나 흐리게 하는 모든 비방과 조롱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위엄 가운데서 환히 빛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b. 하나님의 나라(마6:10상)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간구는 앞의 첫 간구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모든 것을 멸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한 다음에, 이와 거의 동일한 간구인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칼빈이 그의 공관복음 주석에서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이 헬라어 동사문제이다. ‘엘데토’(ελθετω, 임하옵시며)는 복합동사가 아닌데, 지금까지의 많은 주석가들이 ‘도래하게 하옵소서’로 읽고 해석하여 약간의 혼란을 주었다. 어떻게 읽어도 의미는 같겠으나 이것은 단순히 ‘임하소서’라는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뜻으로, “인간들이 자신들의 육신을 그분의 멍에 아래 굴종시키고 자신들의 욕심을 제쳐놓아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통째로 묶어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나라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여 발악하는 육체의 온갖 정욕들을 그의 성령의 권능으로 교정하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도록 우리의 모든 생각들을 그렇게 형성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사단의 나라를 제압하고 징벌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두 부분을 근거로 그는 이 기도의 의미를 기술한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사 온 세상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에게 머리 숙이게 하소서.”
칼빈이 비록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나 미래성에 관한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해설을 볼 때 그 의미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이 세상 종말을 향하여 증대되어 감에 따라 우리는 날마다 이 나라의 등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불의가 이 세상을 휘어잡고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의는 하나님 나라 뒤에 오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서 미래적 하나님 나라에로의 진취적 발전을 표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신앙교육서”에서 현재적 ‘사탄의 지배가 사라지도록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마지막 심판 때에 완성될 것을 말한다.’고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미래적 표현을 다 한 것이다.
기독교강요 초판의 경우 이 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은 적지만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관해서는 더 분명히 서술한다. 여기서 그는 ‘날마다 믿는 자들이 더하여져서 그들이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하며 동시에 사탄의 나라가 사라지고 아울러 그 나라가 완성되기를 소원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혹자는 주기도 앞부분의 ‘나라’와 뒤의 ‘나라’가 각각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말한다고 하나, 칼빈은 이 부분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앞, 뒤의 나라가 모두 현재성과 미래성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c. 하나님의 뜻(마6:10하) 초판에서는 왜 하나님 나라에 이어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기도가 나오는지 설명되지 않았지만, 최종판에서는 그 이유가 밝혀진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나라에 의존하고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별도로 덧붙인 것은 우리가 무지하여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설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 나라에 포함될 수 있지만 이것을 굳이 덧붙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 그것을 확장 설명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이유는 칼빈이 누가의 본문(누가의 본문에는 이 간구가 없다)을 선택하지 않고 마태의 본문을 선택한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의 ‘뜻’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고 그 각각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시는 그의 은밀한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 따르는 뜻을 말한다.’ 그리고 ‘하늘’은 땅과 대조를 이루는 말로 하나님의 뜻이 대기자 천사들에 의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간구의 의미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100% 이루어지듯이 이 땅에서도 그의 통치에 굴복하여 모든 악의와 불의와 교만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간구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하늘의 천사들처럼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분에게 대항하지 않고 말없이 스스로 굴복하도록 하소서 라는 기도이다. 또 ‘하나님의 뜻과 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헛된 것으로 여기고 마음에 두지 않게 되기를 전심으로 바라는 기도이다.’
요한 칼빈은 그의 공관복음 주석에는 없으나 다른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세 간구를 설명한 후,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바라보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더 높이고자 하는 소원과 열심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나라가 임하도록’,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2. 우리의 유익과 관계된 간구들(마6:11-13상)
주기도문의 후반부에는 우리를 위한 간구 세 가지가 나온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이 부분의 설명에 들어가면서, “나머지 세 간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일들을 특별하게 하나님께 부탁하고 우리의 필요를 도와주시도록 구하는 기도이다.”라고 했다. 그의 공관복음 주석에서는 율법의 두 돌판을 비유로, 후반부 세 간구는 둘째 돌판인 이웃사랑에 해당되는 간구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단순히 인간의 필요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다. 사실상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작별하지 않는다’고 그는 표현하였다. 그래서 전반부 세 간구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케 하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유익한 것들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비록 앞 세 간구와 뒤 세 간구를 구분하여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떨어질 수 없는 연결된 기도임을 말한다.
a. 일용할 양식(마6:11) 주기도 후반부의 첫 간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이다. 그는 먼저 ‘오늘’, 그리고 ‘일용할’이라는 말을 설명한다. 이 말은 ‘우리가 만족을 모르는 욕망들, 감각적 쾌락과 과시와 사치의 겉치레를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필요한대로 충분한 만큼만 구하고 또 그것을 매일매일 구하라는 것이다.’ 이런 마음과 자세로 구하되 ‘천부께서 오늘 우리를 먹이시듯이 내일 또한 실패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라’는 의미이다. 또한 반대로 ‘비록 우리의 손 안에 들어 있는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매 시간마다 우리에게 주시고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시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것 하나라도, 비록 그것이 우리의 손으로 공급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단순하고 값없는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의 글에 의하면 하나님의 복 주심이 아니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우리의 손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레26:20, 참고, 신8:17-18). 하나님은 우리 일상생활의 공급자이시다.
이때의 ‘양식’은 영적 양식을 말하는가, 아니면 육적 양식을 말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양자를 모두 말하는가? 칼빈은 초판에서 설명하지 않은 이 부분을 최종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철학자는 이것을 초물질적인 떡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가 의도하신 바가 아니다.’ 주님은 영적인 것도 중요하게 취급하시지만 육적인 양식도 배제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칼빈은 여기서의 양식은 우리의 육신이 먹고 만족을 얻을 단순한 빵을 의미한다고 본다. 칼빈은 양식이 육신적인 빵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이론을 터무니없는 소리로 취급하고, 다른 간구에 대한 설명보다 더 많은 면을 할애하여 이 간구를 설명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무절제한 욕망으로 먼 미래의 것을 구해서도 아니 되고 반대로 일용할 양식이 많이 있다고 해서 이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교만한 자로 공급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된다.
b. 죄 용서(마6:12) 다음에 나오는 것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이다. 칼빈은 이 부분의 기도 중 우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의 조건부와 같은 말씀을 해석한다.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근거를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모든 모욕을 제쳐놓고 마치 도장으로 찍듯 우리 편에서의 사면을 확실히 하라는 것”이다. 이는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성부로부터 죄 용서를 받는 근거는 아니라할지라도 필수적인 사항이라는 것이다.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종판에서는 이 부분 즉,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확장했다. “기도하는 자의 마음으로부터의 분노와 미움, 복수심 등을 기꺼이 버리고 또한 불의에 대한 기억을 기꺼이 망각 속으로 내던져버리는 것이다.” 결국 남의 허물을 사해 준다는 말은 우리 마음속에서 분노, 증오 그리고 복수심 등을 다 제거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없이 여전히 복수할 계획을 가지고는 이 기도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언급하는 것은 마태가 사용한 ‘죄’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의 본문에 두 번이나 등장하는데, 누가복음의 본문(눅11:4-하마르티아)과는 달리 ‘오페이레마타’(οφειληματα)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마태가 죄를 ‘빚’(debt)으로 표현한 것은 ‘그 죄책이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에 얽어매 놓고 우리를 채무자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단절시켜 사면(赦免)이 아니면 전혀 화평이나 은혜를 획득할 소망이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사죄도 세상의 면제 행위와 정반대로 보는 것이다. 채권자가 면제 받는다는 말은 돈을 받은 다음에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고 채무자를 놓아준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빚은 처벌 받을 책임을 뜻하며 사죄는 모든 보상 문제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 기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또는 배상)을 통하여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에 근거하여 죄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칼빈은 주님이 이 기도에 관하여 부차적으로 설명하신 말씀(마6:14-15)도 간단히 설명하면서, 이 기도를 확장, 해석한다. 하지만 칼빈은 후 시대 학자들의 주장처럼, 주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마18:23-35)가 이 기도의 가장 바람직한 해석이라는 점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비유를 근거로,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가 더 크고 많은 죄를 탕감 받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으니, 나에게 더 작고 하찮은 잘못을 한 사람을 당연히 용서해야 하며, 그런 자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또 용서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c. 시험(마6:13상)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둘로 나누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받아들여 한 간구로 취급한다. 그러면 이 기도는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우리를 지켜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 기도와 앞의 간구를 연결시켜 설명한다. “앞에서 우리가 죄로 엉켜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능력을 보강해 주시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즉, 앞에서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함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 문장에서 먼저 해결해야 할 사항은 ‘시험’이라는 단어이다. 칼빈은 이 단어가 이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말하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시험이라고 한다. 전자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이 그에게 시험이었다고 말한다. 후자는 우리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마귀의 채찍’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 짓는 일에 박차를 가하도록 자극하는 밑바닥의 모든 충동’을 뜻한다고 했다. 최종판에서는 시험이 ‘우리의 무절제한 욕망(concupiscentia)에서 오든지 아니면 마귀의 선동(satanae excitat)으로 온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일생동안 지속되는 것이므로, 이 같은 두 면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판은 확실히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초판의 것에 더하였다. 그는 시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그들의 신실성을 시험하고 강하게 세우기 위함이나 후자는 파괴하고 정죄하며 혼란케 하고 낙심케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리고 공격도 전자는 시험하면서 동시에 피할 길을 주시지만 후자는 준비도 안 된 자들에게 무차별 공격하여 무너뜨린다고 지적한다.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은 이러한 시험이 우리의 오른편과 왼편에서 온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쓴다. ‘오른편에서 오는 시험은 부귀와 권세, 명예인데 이런 감미로움에 취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이고 왼편에서 오는 시험은 빈곤, 수치, 멸시 그리고 고난 등으로 절망에 빠지게 하고 소망을 버리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들이다.’
다음으로 해결하는 단어는 ‘악’이다. 악에 해당되는 헬라어 ‘투 포네루’(του πονηρου)는 중성과 남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중성으로 본다면 ‘토 포네론’(το πονηρον)으로 ‘악한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남성으로 사용할 때는 ‘호 포네로스’(ό πονηρος)로 ‘악한 자’가 된다. 그래서 많은 영어 역본들이 전자와 후자를 따라 각각 번역되어 있다. 이 단어를 전자로 이해하면 ‘악한 행위에서 건져 달라’는 뜻이 되고, 후자로 이해를 하면 ‘악한 자 마귀로부터 건져 달라’는 의미가 된다. 후자를 주장하는 자는 크리소스톰과 메쯔거, 리델보스, 헨드릭센, 반즈가 있으나 칼빈은 전자를 주장하며 또한 악을 죄에 대한 언급으로 취급한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지 그는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하지 않기를 원하며 짧게 해석을 마친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기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계속되는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도록, 주님의 권능으로 굳게 설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이다.
C. 마지막 부분(마6:13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구 세 가지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간구 세 가지가 끝나고 이제 주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성구이다. 마태복음 본문은 이것을 괄호로 취급하고 있고 누가의 본문에는 아예 없다.
좀 더 권위 있는 사본(א, B, D)에는 이 본문이 없고 믿을 만한 고대교부들도 이 본문을 인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권위가 약하고 훨씬 후대의 사본(L, f13 28, K, W)과 교부들의 글(Chrysostom) 등에는 이 본문이 들어있다. 이를 근거로 주님의 원래 주기도문에는 이 부분이 없으나 예전적 사용(liturgical use)을 위해 후대에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칼빈은 라틴어 번역본에 이 송영 본문이 빠져있음을 이상히 여기며, 본문의 적절성과 삽입의 정당성을 간단히 주장한다. “이것이 여기에 덧붙여진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열정적으로 매진하도록 하며 우리의 모든 간구의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경고하려는 뜻에서일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정해놓은 기도의 모든 기초는 하나님 뿐이요, 우리 자신의 공로에 비중을 둘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본문을 그대로 수납하여 해설한다.
1. 나라, 권세, 영광
주기도를 연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부분을 제일 어렵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본문이 사본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 아울러 왜 이 문장이 여기에 위치해야만 하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다. 여기서는 칼빈이 마태복음의 본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따르는 것이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칼빈은 이것을 송영(doxology)이라고 부른다. 송영에서 해결해야 할 것은 ‘대개...있사옵나이다’와 ‘나라, 권세, 영광’의 의미이다. 이 두 부분에 대해 칼빈은 구체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 의미만 간단히 기록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 칼빈은 그의 공관복음 주석과 기독교강요 초판과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확장해서 설명한다. 그래서 가장 풍성한 해설이 기독교강요 최종판에 나와 있으므로 그 내용을 살펴본다.
우리가 모든 간구를 담대하게 하며 그것을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이 본문 때문이다. ‘대개......있사옵나이다.’에서 ‘대개’(ότι)는 약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이는’(for)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왜냐하면’(because)보다 약한 이유를 나타낸다. 이것을 뒤의 말과 이어서 보면 ‘이는......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의미이다. ‘이는’을 빼고도 문장을 이을 수 있는데, 그러면 ‘나라와 권세와......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응답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의 말씀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담대히 구할 수 있고 또 구한 것을 받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간구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자 승리의 찬송인 것이다.
여기서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근거가 되며 응답의 확신이 된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결코 우리 아버지에게서 빼앗아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이 취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다.
2. 아멘
이 말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바를 얻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ardor desiderii)이 표현되고 있다.’ 아멘을 통하여 앞으로 우리가 기도한 바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소망이 더욱더 강화된다. 왜냐하면 이런 소망은 결코 속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아멘을 통하여 ‘성도는 하나님이 아니면 간구 한 것을 얻을 수 없고 또한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본성에서(ex sola Dei natura) 비롯되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Ⅳ. 결론
칼빈은 주기도 해석을 끝낸 다음(기독교강요 3권 20장 34-47절) 결론적인 고찰로서 ‘주기도를 다른 말들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과의 적합성’이라는 타이틀로 48-49절을 할애하여 다룬다. 그는 48절에서 ‘주기도은 지켜져야 할 규범’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 형식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기도는 완전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그 어떤 것도 덧붙일 수 없다. “감히 이 기도에서 더 나아가서 그 한계를 넘어 하나님께 어떤 것을 구하는 자들은 첫째는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자기 자신의 지혜를 첨가시키려고 하는데 이런 것은 광적인 신성 모독이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 스스로 매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면서 그들의 억제되지 않은 욕망대로 멀리 떠나가 방황한다. 셋째로 그들은 믿음 없이 기도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주기도 이외의 기도는 규범 밖에 있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49절의 내용은 ‘그 형식이 아닌 내용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 기도문의 단어 하나나 음절 하나라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성령에 의해서 나온 기도가 성경에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기도문의 완전함에 있어서는 주기도에 비교할 수 없다. ‘주기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과 사람 사이의 행복을 위하여 유의해야 할 것이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칼빈은 주기도가 정확하게 짜여져 있다는 말로 그 구조의 신비를 인정하나 구체적으로 그 형식의 중요성을 말하지는 않는다. 주님이 이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이와 같이) 기도하라’고 하신 말이 그 내용을 지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방식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이렇게’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후토스’(ουτωσ)인데 이는 ‘이런 식으로’ ‘이런 방법으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pray like this’이지 ‘pray this’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자는 그 형식이나 방법을 말하나 후자는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 된다.
주님은 일차적으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실 때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그 구조가 갖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 머리말과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세 간구에 이어서 우리의 필요와 유익을 위한 세 가지 간구가 나오고 마지막은 송영과 아멘이다. 우리는 이 같은 세 가지 단계적 구조 즉 서두, 간구 그리고 송영의 형식을 잘 지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일차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형식 못지않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주기도의 내용인데, 지금까지 살펴본 기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정리해 보면, 칼빈의 주기도 해석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첫째로, 칼빈은 이 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강조하나 ‘인간의 유익을 위한 간구’를 제외시키지 않는다. 주기도는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에 해당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광의적인 기도문이다. 터툴리안(Tertullian)이 주기도를 “전 복음의 요약이다.”라고 말했듯이, 이 기도의 내용은 포괄적이다. 우주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성경의 모든 기도의 내용과 사상을 담고 있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기도 속에는 방대한 의미가 담겨 있고 심오하며 종합적이다.”
둘째로, 칼빈은 이 기도를 공동체의 기도로 본다. 나의 기도가 아닌 우리의 기도이며, 나 개인에게 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라는 간구이다. 공동체의 기도라는 말인데, 지금으로 바꾼다면 그것은 교회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이 사적인 장소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가 한 장소에 모여 하는 공적(public) 기도이다. “이 기도에 1인칭 단수가 쓰이지 않고 1인칭 복수 ‘우리’가 사용된 것은 이 기도가 자기 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의 기도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셋째로, 주님이 이 기도를 통하여 규범(형식)을 가르치고자 하셨는가 아니면 그 내용을 가르치고자 하셨는가라고 물을 때, 칼빈의 대답은 전자이다. 칼빈이 그의 “신앙교육서”에서 ‘기도의 형식’이라는 제하로 주기도문을 해설 하는 것이 곧 이를 증명한다. 성부께서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하나의 기도의 형식을 제공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무한한 자비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 형식을 따라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는 그 내용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일차적인 목적은 기도의 형식과 방법을 가르치고자 하신 데 있다는 것이다.
넷째, 칼빈은 주기도 해설을 통하여 그의 건전한 사고와 신학을 거의 다 드러낸다. 아버지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언급되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고 그분의 영광이 선포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성도들의 삶을 부요케 하려고 은혜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의 중심 신학사상인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그대로 배여 있다.
이 같은 특징들을 염두에 두고 그 기도의 깊은 내용으로 매일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을 수 있다.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이 기도의 모범을 따라 내가 아닌 우리에게 달라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간구한다면 그분의 약속대로 기도는 응답받는다.
디다케(Didache) 8장 2, 3절은 주기도를 문자대로 인용하고 있는데(송영의 ‘나라’가 빠짐), 인용 전에 쓰인 ‘당신들은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말고 주께서 복음서에 명하신대로 기도하십시오.’라는 가벼운 경고문대로, 우리는 위선자처럼 기도하지 말고 마음의 진실과 경건으로 이 기도를 소중하게 취급해야 한다. 칼빈이 이 기도를 해설한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진실 되게 기도해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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