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 목회-제2강 | 운영자 | 2017-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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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목회 제2강
제2강 소그룹의 성경적 및 교회사적 배경
앞으로 교회 사역의 방향은 성장 위주가 아닌 건강한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건강한 교회의 본래적인 원형을 소그룹에서 찾을 수 있다.1)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소그룹의 성경적 의미와 정신을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나타난 소그룹의 근거와 성경역사 이후로 소그룹이 어떻게,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고찰해 본다.
1. 구약에 나타난 소그룹
소그룹은 먼저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하나님과 아담 그리고 하와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공동체 즉 소그룹 안에서 살도록 창조하셨다.2) 이것이 성경에 최초로 나타난 구체적인 소그룹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서 이루어 나가시고자 목적하셨던 소그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 소그룹을 통하여 이 땅에서 자신의 구원을 성취시켜 나갈 계획을 세우셨다. 당시는 폭력과 무질서의 세계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범죄하며 악할 뿐임을 보시고 모든 세계를 물로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신다(창6:5-7). 그러나 그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 소그룹을 통하여 전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이라는 소그룹을 통하여 전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 뜻을 성취해 나가신다. 창세기 12장 1절-3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의 소그룹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3)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모세 시대 때 나타난 소그룹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모세는 홀로 앉아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 있었다. 이것을 본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이렇게 일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며, 모세와 백성들의 기력이 쇠하게 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드로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고 그들에게 일을 분담할 것을 제안했다. 모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리더십을 소그룹 형태로 위임한다.4) 이러한 형태의 리더십은 효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관리하고 가나안 땅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진군하게 하였다. 소그룹은 이렇게 구약성경에서도 그 근거가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2. 신약에 나타난 소그룹
신약 성경에서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소그룹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마가복음 3장 13절-14절을 보면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하며···”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택하시고, 훈련시켜, 지도자로 삼으시고,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하셨다. 열두 제자들의 주변에는 ‘무리’와 ‘군중들’이 따라다녔지만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투자한 시간보다 제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훨씬 더 많았었다.5)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숫자를 열둘로 제한하셨는가에 대해 알 수 있다. 그것은 수십 명 또는 수백 명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배우기 위해서는 열두 명이라는 소수가 이상적이었을 것이다.6) 또한 12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의 중심에는 핵심 그룹이 있었다. 인상적이게 신약성경 세 곳에서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 사람만이 변화 산상에서도(마17:1-9),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막5:37),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마26:37) 함께 있었다.7)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친히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이루어진 밀접한 대화(Face to Face Talking)를 통하여 사랑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다8)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은 소그룹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다음은 초대교회를 통해 나타난 소그룹 형태를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 보면 교회가 두 개의 모임으로 분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성전에서 모인 큰 모임이고 또 하나는 떡을 떼기 위해 모인 가정 단위의 소그룹 모임이었다. 초대 교회가 핍박으로 흩어지자 소그룹 형태의 가정교회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즉 신약교회는 성전교회(temple church)와 가정교회(house church)의 이중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초대교회는 특정인의 가정에서 모인 교회들이었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는 큰 건물의 교회가 아니었으며 20-30여 개의 가정 교회로 구성된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9) 이러한 모습을 두고 빌 백햄(William A. Beckham)은 “두 날개로 기능을 발휘했다”라고 말한다.10) 이와 같이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 안에서도 소그룹의 형태가 있음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전교회와 가정교회의 이중 구조가 균형 있게 발전해가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적 섭리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로 인하여 당시 공동체적 삶을 살고 있던 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가지고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6:1-3) 성도들은 흩어진 장소에서 몇몇 가정들이 뭉쳐 작은 공동체들을 형성하여 가정교회의 역할을 해 나갔으며 코이노니아의 삶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빛과 소금의 삶으로 영향력 있는 선교사역을 해나갔었다. 이작은 단위의 공동체들은 후에 바울의 선교거점이 되었다. 이런 가정 중심의 모임은 바울의 선교의 현장에서 계속해서 이어졌다.
실제로 대부분의 초대 교회는 특정인의 가정에서 모인 교회들인데, 고린도교회는 오늘날과 같은 큰 건물 교회가 아닌 20-30개 정도의 가정 교회로 구성된 공동체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와 로마교회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가정집에서 출발하였고(고전16:19, 롬16:3-5), 라오디게아 지방에서는 눔바의 집에서 크리스천 소그룹들이 모임을 가졌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언급할 때 가정이라는 말을 자주 썼던 것이다(갈6:10, 엡2:19).11) 갈라디아에는 여러 믿음의 가정들이 있었고 빌레몬의 집에서는 골로새교회가(몬1:1-2), 마케도냐에서 전도하여 처음 설립한 빌립보교회는 자주 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고 복음에 바울과 함께 힘쓰던 부녀들로 이루어진 소그룹이 있었다.
바울은 로마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언급하고 있고 이외에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는 라오디게아 지방에 있는 가정교회와 골로새 지방에 있는 가정교회 형태의 작은 공동체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이 모인 집의구조와 크기는 마가의 다락방과 같이 1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일만 한 집을 가진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20%미만이며, 1세기 가옥의 평균 크기를 감안할 때 ‘집에 있는 교회’에서 모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12-15명 선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체 교회는 80-90명 정도였다고 한다.12) 즉 이런 개인의 집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모였다. 어떤 독립 되고 구별된 공간이 아닌 평범한 가정집이 진리를 전하며 가르치는 곳이었다. 이렇듯 가정을 중심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 신앙을 키웠다. 가정과 연결되지만 약간 다른 장소가 있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한 인슐라(insula)라는 곳이다.13) 가죽 기술자로서 천막 제조업자였던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운영하는 큰 규모의 인슐라에 일하면서 선교와 전도활동을 했다. 그는 인슐라에서 소그룹을 이루면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훈련과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지금의 대그룹 예배에서 적용하여 경험하기 어려운 명령들이 나온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의 말씀을 보면 당시 교회가 경험하는 은사들이 무엇인지가 나온다. 또 그 은사들이 어떻게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 권고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요즘 대그룹의 회중으로 모이는 예배에서 이런 일들을 경험하기는 어렵다. 이 일들은 소수의 그룹들이 모였을 때 가능한 것이다.14) 바울의 서신서는 그러한 작은 공동체들이 로마 제국 전역에 두루 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소그룹은 현대적 발상(contemporary conception)이라기보다는, 이미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창조와 구원,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과 초대 교회 사역에 기초하고 있는 개념임을 보았다. 따라서 소그룹 사역은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정당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3. 교회사에 나타난 소그룹
1)초대교회 이후, 콘스탄틴 이전의 소그룹 성경시대에도 그랬으나 그 이후로 기독교인들은 계속하여 신앙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아왔다. 2-3세기의 신자들이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피해, 산속이나 바닷가나 또는 가정이나 지하로 숨어 들어가면서 나타난 것이 소그룹 모임이다.
신약성경에 있었던 성전이나 회당 중심의 거대 그룹의 모임은 점점 사라지고 가정교회나 지하교회가 더 확산되어 간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한거번에 모이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신앙을 유지 발전시키는데 용이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작은 모임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신약의 가정교회가 더 발전하게 된다는 점이고, 또한 카타콤이나 소수가 산속 은둔 모임을 갖거나 지하 동굴에서 소그룹 모임을 가지며 예배하고 교재하며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쿰란 동굴의 모체가 되었던 나사렛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자기들만의 소수 모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초기 세례요한의 제자들로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로서 사해 근방 쿰란 지역에 모여서 철저한 자시성찰과 금욕적 생활을 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했던 무리들이다.
또한 로마의 핍박을 피해서 카타콤을 만들어 생활했던 자들도 소수의 그룹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신앙을 지키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다. 터키 갑바도기아 지방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이들은 단순히 핍박을 피해 신앙을 지키고자 했으며 늘 재림의 주를 소망하며 살았던 신앙적 특징을 가진 자들이다.
2)중세시대의 소그룹 콘스탄티누스가 로마황제가 되어 기독교가 공인되고 교회가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자 중요한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는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강력한 것이 되어갔으나, 신앙 면에서 점차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교회 내의 소그룹 모임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성도의 교제와 신앙의 역동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점점 세속화 되어갔다.15)
바로 이런 분위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등장했다. 수도사들이었다. 이들은 위협이나 핍박 대신 편안과 안일한 삶이 이어지자 이에 위기를 느끼고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은둔의 자리로 숨어 들어가 고독한 수도사의 길을 택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수도생활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주후 320년경에 등장한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파코미우스에 의해 세워진 수도원으로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일정한 규칙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최초의 수도원 공동체였다. 파코미우스는 나일 강변 타벤니시에 금욕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사회를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엄격한 규율 밑에서 힘든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파코미우스의 조직 내에서는 군대식으로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였다.16) 이 수도원은 발전을 거듭하여 그가 죽을 즈음에는 수도사의 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수도원은 일종의 운영 규칙들이 발전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22명에서 40명이 한 집에서 공동으로 생활하며 집집마다 모임을 위한 공동실이 있었다.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일을 했으며, 가능하면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끼리 생활하며, 일정한 제복이 주어지고, 규칙적인 예배와 기도회를 가졌고, 일주일에 두 번 정기적인 성찬식을 거행했다고 한다.17) 이런 공동체의 생활은 정상적인 교회 생활과 격리되었고 오히려 교회 생활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18) 또 22-40명의 인원이 소그룹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되어 가고, 대형화 되어가는 교회에 대한 반향으로 일어난 소그룹 형태의 운동이었다. 서로 성장을 목적으로 삶을 공유하며, 진리의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 서로 기도하며 예배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공인 이후 찾아볼 수 있는 소그룹의 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던 수도원운동이 주후 4세기부터 일어났다. 이들은 형식화되어 가고 제도화되어 가는 교회에 저항하면서, 공동체생활을 지향하는 초대 가정교회의 형태를 지녔다.
중세 초기 서구의 수도원 운동은 성 마틴(316-397)으로부터 시작한다. 성 마틴은 이태리 북부에서 무소유의 상태로 유랑전도를 행하였지만, 이것도 사실은 수도원 운동 내지는 기독교적 금욕주의 운동의 일환이었다. 성 마틴은 메디올라눔에 수도원을 세우고, 다른 수도사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경험도 쌓았다.19) 성 마틴은 주후 371년경에는 갈리아 지방 투로네스의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감독이 되고서도 그의 주된 관심은 갈리아 지방에서 수도원 운동을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성 마틴이 갈리아 지방에서 일으킨 특색은 자발적 빈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은둔생활을 하는 것처럼 생활하는 것이었다. 또한 손대접을 즐겨 행하였다.20)
주후 529년경 이태리 중부의 몬테카씨노에 수도원을 세운 누르시아의 베네딕트는 “서구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 또는 “구라파 전체의 수호성인”이라 불릴 만큼 서구의 수도원 운동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21)
베네딕트는 젊은 시절부터 수도사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그는 20대 전반에 벌써 수블라쿠스 부근의 수도원 원장으로 부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자기 휘하의 수도사들에게 엄격한 수도규칙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수도사들의 반발을 사, 그곳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수블라쿠스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제자를 모아, 수도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자기 제자들을 12명 단위로 조직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12명 단위의 소그룹이 12개로 늘어났다. 베네딕트는 이 12개의 소그룹에 리더 한 명씩을 배치하였고 자기 자신은 신참자를 모아 13번째 소그룹을 직접 담당하였다.22) 베네딕트가 일으킨 수도원 운동은 구라파 수도원 운동의 여가에서 가장 중요한 모델이었다. 그래서 이태리뿐 아니라 구라파 여러 나라의 수도원들은 최소한 12세기까지는 대다수가 베네딕트 수도회에 가입하였고 프란체스코 수도회나 도미니크 수도회 같은 탁발수도회가 생긴 다음에도, 베네딕트수도회는 그 중요성을 잃지 않았다.
또한 12세기부터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수도회를 중심으로 예배와 교제를 중요시하는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다. 수 세기를 거치면서 ‘교회 속의 작은 교회’가 교회에 새로운 활력과 회복을 불어넣었으며, 이 때 생긴 공동생활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는 루터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23)
중세교회는 ‘페쇄된 장소’인 ‘성전 중심’의 예배를 떠나 ‘개방된 공동체’인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가정 중심’의 예배로 전환한 초대교회의 업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 구약 성전 중심의 종교로 희귀 하는 경향을 보였다. 수도원 역시 타락의 길을 가고 있었다. 초기 등장했던 파코미우스 수도원, 바실의 수도원 운동들은 작은 그룹의 모임들을 기본으로 하여 공동체의 정신을 함양하며,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순교는 못할지라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부금의 증가로 재산이 축재되는 상황에서 수도원은 수도원의 본질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결국 이런 교회와 수도원의 문제들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었다. 중세에 나타난 수도원 개혁 운동은 교회의 공동체성의 회복보다는 교회의 많아지는 재물에 대한 저항과 금욕적인 삶의 강조가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초기의 수도원들은 계속해서 누적된 기부금과 헌금으로 인해 재산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부패하게 되었다. 이런 부패한 수도원의 개혁을 부르짖고 일어난 운동이 베르노를 중심으로 일어난 클로니 수도원운동이었다. 이 클로니 수도원 운동은 분명한 개혁의 열매들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클로니 수도원 역시 늘어나는 수입으로 인해 노동과 경건을 함께 추구하던 수도원의 규율을 깨지고, 수도승들은 노동 대신 경건의 훈련만 해도 되는 풍족한 삶을 누렸다. 또 탐욕에 눈이 먼 수도원장들은 이런 수도원의 막대한 재산의 소유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출세의 도구로 삼았다.24) 그 결과 클로니 수도원 역시 그 빛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더 높은 강도의 내핍을 강조하는 ‘시토 수도원’ 운동이 바톤을 이어갔다.25) 연이어서 일어나는 ‘가난한 카톨릭 수도회’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마루바닥에서 잠을 자며 모든 종류의 선물을 거부함을 모토로 진행되었으나 단명했다. 이 후 일어난 도미니크 수도회나 프란체스코 수도회 역시 “가난”을 기본 골격으로 하되, 도미니크는 학문 연구를 주로 하는 수도회로 발전했고,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구제와 봉사 쪽으로 기울어졌다.26) 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창시자인 프란체스코는 절대 빈곤을 거듭 천명했는데 그의 이런 주장은 다른 어떤 가치에 선행하는 것이었다.
3)종교개혁시대의 소그룹 중세기 말에 나타난 종교개혁은 소그룹 사역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에는 교황의 권위로만 모임을 할 수 있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만인제사장론(Priesthood of all believers)을 주장하며 교황의 권위에 대항하였고, 종교개혁 이후 성경연구반 같은 신앙을 위한 소그룹 모임이 활발히 일어났으며 이것은 종교개혁을 더욱 가속화하였다.27) 그는 ‘독일 예배 의식’이라는 그의 글에서 세 종류의 예배를 말한다. 첫째는 라틴어로 드리는 미사이며, 둘째는 독일어로 드리는 현대적인 예이고, 세 번째 예배가 소그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마지막 소 예배에 대한 그의 의견을 이렇게 쓰고 있다. “세 번째 종류의 예배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며 말과 행위로 복음을 고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만 자기 이름을 등록하고 어떤 한 집에서 모이는 것이다. ... 이 모임은 간략하면서도 멋진 세례와 성찬을 행할 수 있으며 모든 방향을 하나님의 말씀, 기도, 상호간의 사랑에 맞출 수 있겠나. ...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진실하게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질서와 방법은 금방 생긴다는 것이다.”28)
여기에서 그는 소그룹 모임을 통해 세례와 성찬을 행하며 말씀과 사랑을 나누는 예배를 드리려는 열정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역동적이고 전인적인 삶을 나누는 공동체적 소그룹 모임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서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규정 및 법규는 차후 문제이다. 이렇듯 나는 그러한 회중이나 공동체를 시작하거나 그들을 위한 규칙을 만들 만한 의욕이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러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를 만들자는 요청을 받고 선한 양심으로 비춰볼 때 거절할 수 없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내 역할을 하고 기꺼이 도움을 줄 것이다.”29)
재세례파는 소그룹에 관해서는 불멸의 모델을 제공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 Clowny)는 재세례파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 “중세교회의 예배를 개혁하기보다는 새로운 예배를 시작하려는 재세례파의 노력은 자유롭게 좀 더 참여적인 예배 형태를 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핍박을 당한 재세례파는 소그룹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후터파 같은 모임들은 생활공동체를 형성했다.”30)
클라우니는 예배에 대해 쓰면서 재세례파들의 예배를 언급했는데 이들은 박해를 피하여 자연스럽게 소그룹으로 모이게 되었고 소그룹의 예배의 형식을 통해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또 다른 소그룹 공동체의 모습에 대해 튜더 존즈( )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독특한 공동 사회를 형성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물건을 공유한다는 것은 믿는 자가 세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신약성경의 명령의 하나였다. 후터는 그들에게 확고한 규율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감독들과 말씀의 종들(또는 장로)과 일상적 필요를 위한 종들에게 지도 받았다. 그들은 선교 사업에 놀라우리만큼 헌신적이어서 멀리 사방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자신들과 공동생활을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았다. 이러한 선교사들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였다. 왜냐하면 선교사 열 사람 중 여덟 사람은 투옥되거나 순교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공동체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1564년에는 그런 공동체가 38개나 있었다.”31)
즉 이 재세례파 공동체는 물건을 통용하는 것을 상식으로 여겼으며 아울러 선교 공동체로서 헌신적인 자세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하여 새로운 성도들을 자신들의 공동생활로 참여하게 했다. 이런 면에서 재생산을 중시하는 소그룹 특히 현대의 셀 교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의 예배가 성도들의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고 자유로운 예배를 시도했다고 평가했다. 또 재세례파들의 소그룹 모임에 대해 뱅크스 부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판, 길가, 심지어 동굴 같은 장소에서 모이긴 했지만 원래는 개인 거주지나 헛간에서 또는 방을 세내어 모임을 가졌다. 1608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이런 모임의 전형이 묘사되어 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서 한 명이 전체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그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몇몇 구성원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즉석에서 가르치고, 그 날의 사회자가 마치는 기도와 권면을 하고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을 했다. 또한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도 했다. 이런 작은 모임의 평균 시간은 4시간 정도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소그룹이 연합으로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서로를 책임졌으며, 더 큰 공동체에 있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줄 물건들을 모으기도 했다.32) 즉 이 모임은 장소에 제한 받지 않는 모임 이었으며, 또 기도와 말씀 봉독이 있으며 성령에 이끌리는 한 성도가 설교하는 예배를 드렸다. 또 공동체의 가난한 형제를 돕는 사랑의 헌금을 실시하고 사랑과 위로를 나누는 말 그대로 전형적인 소그룹 연합모임을 가짐으로 분열을 방지하는 지혜를 보이기도 했다.
이들 재세례파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혁명가나 위험한 선동가, 또는 기존 질서나 받아들여진 교리의 파괴자라는 이름과 동의어로 인식되었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보여준 도덕적인 삶의 모습과 이런 성도들이 모여 이룬 소그룹의 모습은 교회의 신선한 도전을 주었고 소그룹의 좋은 모델로 남았다.
7)근세의 소그룹 (1)청교도와 소그룹 청교도 운동에서 소그룹 운동은 이들의 가정예배이다. 이들은 공적예배와 가정예배, 그리고 개인예배라는 3가지 영역의 예배 생활을 강조했다. 공적예배란 공적으로 교회당을 중심으로 대그룹으로 모여 드린 예배를 의미하며 개인예배란 개인이 골방에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34) 그런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은 바로 가정예배이다. 특별히 당시 청교도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이다. 제임스 패커는 이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청교도들이 생각하는 가족은 그들의 생각에는 부모와 자식뿐만 아니라 종들(가장 가난한 가정들 외에 모든 가정에는 적어도 함께 생활하는 종이 있었다),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노령의 친척들(당시에는 양로원이 없었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거주자들도 포함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핵가족이 아니라 확대가족이다”.35)
즉 이들 청교도들은 주위의 다른 거주자들까지 포함한 가족이라는 넓은 의미의 가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가족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렸다는 것이다. 즉 가족이 아닌 소그룹 단위에 긴밀한 관계를 토대로 삶을 나누며 말씀을 나눴던 것이다.
(2)경건주의와 소그룹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정통주의는 순수한 교리와 성경의 영감설을 주장하며 교리적인 논쟁으로 흘러갔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을 경시하며 종교적 생명력을 상실해갔다. 그 결과 영적 갱신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하였다.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정통주의의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이 경건주의이다. 개혁파 경건주의는 타성에 젖어있는 성도들을 경건모임으로 인도하여 영적 지식을 함양하며 각성시켰다는 점이다. 그 내용을 주목해 보면 오늘날 제자훈련이나 소그룹 성경공부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루터파 경건주의는 보다 교회내적인 운동으로 소그룹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독일 경건주의를 이끌었던 필립 스페너는 경건주의의 이상을 목회 현장에 실현하는데 성공했다.
필립 스패너(Philip Jakob Sperner)는 1670년부터 ‘상호 격려와 감독’ (mutual encouragement and oversight)을 위해 “경건한 모임(Collegia pietatispious gatherings)”이라는 소그룹 우동을 시작했다. 이 경건한 모임은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났고 남녀가 함께 모였으며, 처음에는 주로 이전 주일의 설교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경건 서적들을 함께 읽곤 했으나, 나중에는 성경(해석)의 토론이 주된 주제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스페너의 “경건회”를 닮은 “경건협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최초의 경건협회는 1678년 경 런던에 생긴 것으로서 기성교회의 체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기성교회의 예배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소집단으로 공동기도와 성경연구에 힘쓰고 성찬식을 자주 가지며 가난한 사람이나 환자, 군인, 선원, 죄수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러한 소집단 운동은 점차 확산되어 1700년경에는 런던에만 이런 경건협회가 거의 100개에 달하게 되었고 영국 도처와 아일랜드에도 이런 모임이 생기게 되었다.
(3)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모라비안 형제단의 진젠도르프 백작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북서유럽의 ‘경건주의자’ 운동은 루터의 개혁주의자들이 많이 빠져 들어간 ‘냉랭한 교리적인 잠’에서 깨어나도록 도전하는 신교도들 가운데서 일어난 운동이다. 이들은 경건한 모임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개인의 집에서 10명가량의 작은 그룹으로 모였다.
이 운동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경험을 갱신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그 근거를 이루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재고였다. 이들은 ‘영성단’이라 불리는 성경공부, 기도, 상호 격려를 위한 영적 모임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은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헤미아 형제단은 글들의 수에 비해서 기독교역사상 많은 영향을 미친 공동체이다. 이들은 단순한 의식이나 정통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산 믿음과 코이노니아를 강조하는 소그룹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이 소그룹을 ‘형제의 연합’이라 불렀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보헤미아에 정착하였는데, 여기서 ‘형제들의 연합’으로 불렸는데 ‘연합’이란 ‘공동체’를 의미한다.
루터는 이 보헤미아 형제단을 사도시대 이후 가장 사도적인 모임에 가까운 교회로 평가하면서 자신보다 훨씬 앞선 개혁자들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보헤미아 형제단의 후손들이 모라비안 형제단이다. 이들은 독일에 정착하면서, 진젠도로프 백작으로 하여금 땅을 얻게 되고 여기서 모라비안들은 공동체를 이루어간다. 이 공동체를 ‘헤론후트’라고 불렀다. 진젠도르프는 이 공동체를 작지만 영적으로 능력 있는 공동체로 결속시키고자 하였는데 이 공동체는 7.000명을 넘은 적이 없는 공동체였지만, 작은 그룹을 이용하여 서로간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모라비안들은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작은 소그룹으로 나누고 이 소그룹을 ‘반덴’이라 불렀는데, 구성원이 8-12명으로 구성된 밴드는 ‘헤론후투’에서는 일상적인 모임이었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이 밴드가 조직되었다.
(4)존 웨슬리와 소그룹 요한 웨슬리의 소그룹은 크게 연합신도회, 속회, 신도반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연합신도회는 첫 감리교회 신도회로서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 의해 1739년 7월 11일 브리스톨에서 시작된 모임을 말한다. 연합신도회는 런던과 브리스톨 지역에 수십개의 신도회를 조직해 나갔고, 1743년 5월 1일 이 신도회들을 모두 합쳐 ‘연합 신도회’(The United Society)라는 명칭으로 구성하게 된다.
연합신도회는 회원들의 총칙을 정하고 이를 지킴으로써 신앙 상태나 생활 점검을 하려고 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웨슬리의 신도회의 회원이 된 사람 중에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다시 죄인 된 생활로 돌아가 아무 변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전에 범하던 죄에 빠지는 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합신도회가 구성된 이후, 이를 구별하여 제거하는 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속회이다. 속회는 연합 신도회를 구성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우연히 브리스톨에서 탄생되었고, 다시 연합 신도회를 재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속회의 구체적인 태동은 1742년 2월 15일 신도반 모임을 위해 구입한 브리스톨의 새 회당의 빚을 갚기 위해서 1페니씩 기부금을 내자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웨슬리는 속회를 기부금을 모으는 것 뿐만 아니라 서로 충고, 견책, 격려하는 소그룹 형태의 조직으로 발전시켰다. 속회는 오늘날 소그룹과 유사하게 매주 한 번 한 시간 정도로 저녁에 모여서 영적 성장에 대한 기도와 도움을 받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속회 모임을 성경적이며, 실용적인 모임으로 보고 속회 공동체를 통한 공동의 상화를 시도하였다. 이런 웨슬리의 소그룹 모임은 활기를 띠고 발전한 모습에 대해 조엘 코미스키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18세기 말까지 웨슬리는 10,000개 이상의 셀그룹(class)을 발전시켰다. 수십만 명이 이 소그룹 조직에 참여했다. 웨슬리는 한사람이 소그룹에 참여하기까지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결신을 했다고 믿지 않았다. 웨슬리는 결신보다는 제자도에 더 관심을 가졌다. 속회(대부분의 결신이 이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복음 전도의 도구와 제자 삼은 전초기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36)
마지막은 신도반이다. 신도반은 웨슬리가 1738년 7월에서 9월에 걸쳐 독일의 헤른훗(Herrnhut)을 방문한 후, 그 곳의 신도반 조직에 감명을 받고 헤른훗의 모형대로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신도반은 속회원 가운데 보다 더 신앙의 진일보를 원하는 자들의 요구로 속회원 사이에 형성된 더 친밀한 교제를 위해 구성되었다. 신도반은 기혼과 미혼, 남과여, 성별로 구분하여 조직하고 남자는 매주 수요일에 여자는 매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 것으로 하였다. 또한 3개월에 한 번씩 신도반에 속한 모든 사람을 위한 애찬식을 갖기도 하였다. 신도반은 후에 좀 더 세부적인 조직으로 발전되어 내적인 성결과 외적인 성결을 위한 선발 신도회와 속회나 신도반을 통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위해 참회자반을 운영하였다.
이처럼 웨슬리의 소그룹 형성과정을 통해 본 소그룹의 역사는 우리에게 소그룹이 어느 한 시기에만 나타난 한정적이고 특징적인 현상이 아닌 시대적 흐름 속에 언제나 내재되어 있으면서 외형적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따라 공통적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1) 이상화 ․ 채이석, op. cit., pp. 29-30.
2) IVP 자료개발부, 소그룹 리더 핸드북(서울: IVP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6), p. 28.
3) Ibid., p. 29.
4) 명성훈, op. cit., p. 53.
5) 최상태, 21세기 新교회론, 이것이 가정교회이다(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2), p. 73.
6) 명성훈, op. cit., p. 57.
7) J. Mallison, The Small-Group Leader, 신재구 역, 생동감 있는 소그룹 매뉴얼(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5), pp. 26-27.
8) 조동진, 교회행정학(서울: 크리스찬 해럴드사, 1980), pp. 34-35.
9) 명성훈, op. cit., pp. 59-60.
10) William A, Beckham, The Second Reformation, 터치코리아사역팀 역, 제2의 종교개혁(서울: NCD, 2000), p. 153.
11) 명성훈, 소그룹 성장 마인드(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02), p. 49.
12) 로버트 뱅크스, 줄리아 뱅크스, The Church Comes Home, 장동수 역, 교회, 또 하나의 가족(서울: IVP, 1999), p. 49.
13) 김세윤, 데살로니가전서 강해(서울: 두란노, 2002), pp. 21-22. 인슐라는 당시 헬라 도시에 있었던 작업장을 일컫는 말로 지금의 주상 복합 건물과 비슷한 건물로, 1층 앞쪽은 상품을 진열하는 공간이고 뒤쪽은 물건을 만드는 공간이고, 2-3층은 주인과 노동자들이 함께 사는 건물이다.
14) 랄프 네이버, The Shepherd's Guidebook, 박영철 역, 셀 리더 가이드(서울: NCD, 2001), pp. 232-233.
15) 강근환 외, 세계기독교교회사(서울: 기독교문서회, 1988), p. 114.
16) 헨리 채드윅, The Early Church, 서영일 역, 초대교회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p. 194.
17) 박용규, 초대교회사(서울: 총신대출판사, 1994), pp. 106-107.
18) Ibid., p. 479.
19) 김광채, 중세교회사(서울: 도서출판 신성, 2002), p. 73.
20) Ibid., p. 74.
21) Ibid., p. 78.
22) Ibid., pp. 80-81.
23) 최상태, 21세기 신 교회론, 이것이 가정교회이다(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2), p. 77.
24) 유스토 L. 곤잘레스,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p. 92.
25) Ibid., pp. 92-97.
26) 위리엄 R. 캐논,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서울: CLC, 1986), pp. 289-295.
27) 명성훈, 소그룹 성장 마인드(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02), p. 60.
28) M. Luther, 독일예배의식...........
29) 빌 백햄, The Second Reformation, 터치코리아사역팀 역, 제2의 종교개혁(서울: 도서출판 NCD, 2000), pp. 168-169.
30) 에드문드 클라우니, 역, 교회(서울: IVP, 1998), p. 150.
31)
32) 로버트 뱅크스, 줄리아 뱅크스, 장동수 역, 교회 또 하나의 가족(서울: IVP, 1999), p. 81.
33) 장 카디에, 이로갑 역,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p. 64.
34) 제임스 패커, 박영호 역, 청교도 사상(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pp. 357-358.
35)
36) 조엘 코미스키, 셀그룹 폭발(서울: NCD, 2000), p.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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