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 목회-제1강 | 운영자 | 2017-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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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목회-제1강
제1강 소그룹의 정의, 필요성 및 중요성
소그룹이란 무엇인가? 그 정의를 알아봄으로 소그룹의 개념을 정리 한다. 그리고 이 소그룹 지도나 소그룹 목회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1. 소그룹의 정의
일반적으로 그룹이란 컬트 레윈(Kurt Lewin)의 말처럼 “그룹이 본질에 대해 구성원들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상호의존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1)이라고 정의한다. 즉 서로의 감정과 교류가 없으면 적당한 인원, 훌륭한 환경이 주어진다 해도 진정한 그룹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하트포드(M. Hartford)는 ‘소그룹을 두 사람 이상이 공동의 목적과 관심을 가지고 모여서 서로 인지하고, 감정을 나누며, 규범을 설정하고, 단체 행동을 위한 목표를 수립하고, 응집력을 발전시킴으로써 그들 자신을 다른 집단과 구별하는 한 집단으로 정의한다.’2) 그리고 데이비드 존슨(David W. Johnson)과 프랭크 존슨(Frank P. Johnson)은 소그룹의 정의를 “서로 작용하고, 상호의존하며, 그룹의 소속 물로서 그 자신을 규정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규정받으며, 공통적 흥미에 대한 규범을 나누고 또한 짜 맞추어진 역할 체제에 참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룹 속에서 보상을 발견하고 공통의 목적을 추구하는 둘 또는 그 이상의 개인들”3)이라고 말한다. 그룹을 형성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중요한 사항은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한 장소에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소그룹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인간 존재가 혼자 살 수가 없듯이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트루니어(Paul Trounier)가 “이 땅에서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결혼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의미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소그룹과 대 그룹을 이루며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던 인식하지 않던 그 영향 속에서 살아간다. 조엘 코미스키(J. Comiskey)는 기독교적인 소그룹의 정의를 “영적인 세움과 전도를 위해 정규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그룹, 또는 지역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허신하는 사람들의 모임”4)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소그룹을 정의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소그룹의 필수 요소와 특징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코미스키는 소그룹이 아닌 것 즉, 소그룹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의 예로 11가지를 제시한다. 11가지 실제적 예는 사교모임, 파당, 정체된 모임, 매주 한 번씩, 학습방, 성경공부 위주의 모임, 치유모임, 철새무리, 기도그룹, 업무그룹이나 사역그룹 등이다.5) 또한 훌륭한 소그룹 인도자인 로베르타 헤스테네스(Roberta Hestenes)는 “소그룹은 정해진 시간에 3명에서 12명 정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을 위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성장하려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한자리에 모인 모임이다”6)라고 정의했다.
헤스테네스의 정의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일곱 가지 요소를 뽑아낼 수 있다. “첫째, 소그룹은 '의도적'인 모임이다. 강요된 모임이 아니라 자의로 결정하여 소그룹에 참여하는 모임을 말한다. 둘째, 소그룹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모이는 모임이다. 의사소통에는 언어적인 것과 언어 외적인 것이 있다. 통계적으로 볼 때 모든 의사소통의 90%는 언어 외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때 그리고 한 자리에 모여 앉을 때 더욱 원만한 의사소통을 이룰 수 있다. 셋째, 소그룹은 ‘소수의 모임’이다. 모임의 인원이 12명을 넘게 되면 언어 외적인 의사소통이 어렵게 되고 모임은 역동성을 잃게 된다. 8명이 되면 4명씩으로 나누어 그룹을 구성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또한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고 제시간 안에 모임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다. 칼 조지(Carl George)는 소그룹의 적정인원을 10명, 존 맬리슨(John Mallison)은 12명, 데일 겔로웨이(Dale Gallowy)는 8-12명이라고 하나 코미스키는 5-15명이라고 주장한다.7) 넷째, 소그룹은 ‘정해진 시간’에 모이는 모임이다. 나중에 그룹이 견고하게 된 다음에는 융통성 있게 모일 수 있지만 모임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 몇 주 동안에는 반드시 매주 모임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소그룹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모이는 모임이다. 정확하게 명시된 목적이 없이 소그룹을 시작하게 되면 그 모임은 흔들리게 된다. 여섯째, 소그룹은 ‘발견’을 위한 모임이다. 소그룹에 참여하는 자들이 소그룹 모임을 통하여 그 무엇인가를 얻도록 해야 한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구도자들이나 초 신자들이 소그룹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 일곱째, 소그룹은 ‘성장’을 위한 모임이다. 소그룹 모임은 ‘연약한 그리스도인’을 성숙한 신앙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는 자리이다.”8)
위의 정의를 약간 변형시켜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자도 있다. “신자 상호간의 덕성함양과 교재를 우한 목적을 가지고 3명에서 12명의 사람들이 정규적으로 만나는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모임이다.”9) 혹자는 ‘모든 사람이 나의 이름을 알고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의 공동체’라고도 표현 한다. 건강한 소그룹은 사무적인 일을 수행하는 곳이 아니고 교육적인 일만 수행하는 곳만도 아니라, 한 영혼을 끝까지 돌보아 주는 곳이어야 한다. 소그룹은 루터의 말처럼, 교회 안의 교회(church in church) 즉, 작은 교회(small church)임으로 교회의 기능, 특히 연약한 자를 돌보아 세워주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
2. 소그룹의 필요성
소그룹이 왜 필요한가? 한마디로 현대사회와 교회의 변화에서 건강한 교회 형성을 위하여 소그룹이 필요하다고 본다.
1)현대인의 종교성 변화 현대인들은 시대적 변화와 종교에 대한 가치관도 변하고 있다. 이는 대략 6가지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교회적 차원에서의 대안이 소그룹 사역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현대인의 종교성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는 원하지 않으나 하나님은 원한다. 이것은 교회가 불신자들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교회 자체의 생존에 관심을 집중하는 현상에 대한 결과이다. 대표적인 표현이 “교회는 반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환영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종교적 영성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교회의 생존에는 정작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10)
둘째, 도덕적 방황 속에서 용서와 확신을 원한다. 과거에는 획일적인 도덕과 윤리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도덕적 상대주의 속에 살고 있다. 이 다양성의 사회 속에서는 절대 가치를 찾을 수 없고, 도덕적 기준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용서와 확신을 종교를 통해 얻기를 희망한다.
셋째, 율법보다는 합리성을 추구한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명령과 지시 받기를 싫어한다. 이미 교회 안에도 이러한 모습은 일반화 되어 있다. 그래서 현대인을 위한 사역은 명령과 지시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율법이 주는 영적, 감성적, 육신적, 사회적 유익성을 바르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넷째, 기독교와 자기 신앙에 대한 지식과 확신이 없다. 21세기는 즉흥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시기이므로 과거에 비해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신앙에 대한 체계적인 습득을 꺼려한다.
다섯째, 개인적인 영성 생활에 질문이 많다. 21세기는 개인 생각이 폭 넓게 반영되고 보호받는 세대이기 때문에, 획일주의적인 대답보다는 다양한 질문과 다양한 대답을 원한다. 따라서 교회는 현대인들의 영적 질문에 대해서 진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대답해 줄 수 있는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종교의 진리성 뿐 아니라 현실에서의 유익성을 강조한다. 과거는 종교에 대한 진리를 찾아 가는 것이 영성 생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선택한 종교가 얼마나 유익을 주는가?’ 대한 대답이 우선이다. 그래서 21세기를 향한 교회에서는 “기독교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구원의 문제, 아픔, 갈등, 상처 속에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신다.”고 분명히 제시해주어야 한다.
위에 살펴본바와 같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은 종교성에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종교에 대한 개인주의적 성향이 더욱 강화되면서 교회 일원으로서의 만족보다는 자신의 구원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상처과 갈등을 치료하며, 개인 신앙생활에 관심이 더욱 높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교회의 대안으로 소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화된 현대인들에게 거부감이 없으며, 교회적으로도 효과적이고 능동적인 접근이 가능한 소그룹을 통한 사역이 필요하다.
2)교회의 변화에서 오는 요구 변화하는 시대와 현대인의 종교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교회도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이 변화는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함이고, 현대 교회가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함이다. 이에 본문에서는 교회의 변화에 따르는 소그룹의 필요성을 6가지로 살펴본다.
첫째, 일방하향식 결정에서 팀 구성원의 참여를 통한 결정이다. 개인성이 보장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의 일방하향식 사역 결정은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참여의 결여를 가져다준다. 전통과 모던의 세계였던 과거에서는 장기적인 전략 수립과 계획이 가능했다. 그것은 사회가 안정적이며 변화는 예측 가능하고 진화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는 포스트모던 문화로서 성장하기보다는 불연속적이고, 변화는 예고도 없이 급격하게 진행된다. 교회는 유연성과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도전을 받게 되고 이에 일방하향식 결정은 능동적인 반응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에서는 모던, 그리고 포스트 모던한 문화적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시스템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것을 비전에 따라 사람들을 모아주는 팀 구축 능력, 그리고 그 비전을 파편화된 포스트 모던적 사회의 많은 하위 단위에 보여주는 재능과 자질을 요구한다. 그리고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강한 믿음 안에서 자원을 공유하고 재분배하여 교회를 향한 다양한 시도에 전략적 계획과 전략적 행동을 보여야 한다.11)
둘째, 전문목사에서 전도목사로 변화되어야 한다. 21세기 목회자의 사역은 설교, 예배인도, 교리공부인도, 심방, 교회의 여러 가지 의식 집전의 사역에서 전도와 선교의 사역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복음전도 사역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교회는 결국 쇠퇴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교회의 쇠퇴는 결국 과거 20세기 목회자의 전문 사역으로 나타난 결과라고 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역은 교회의 초점을 교회 안에 두고 교회 밖에는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밖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할 때 건강해지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윌리엄 이섬은 이를 ‘끝없이 퍼지는 원과 같다.’12)고 표현하였다. 교회가 물결과 같이 끊임없이 퍼지는 과정을 통하여 교회의 사명이 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는 교회 안으로의 ‘전문화된 사역’이 아니라 교회 밖을 위한 ‘전도와 선교 사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무분별하고 다양한 소그룹에서 신사도적 소그룹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교회 출석률의 저하와 치솟는 재정적 부담, 늘어나는 목회자의 사역 부담으로 인한 리더십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교회들 중 일부는 대형 교회의 흡수력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잃고 있다. 이에 피터 와그너는 새로운 21세기 교회를 ‘신사도적 네트워크’로 정의하였다. 와그너는 ‘신사도적 교회’는 교회가 새로운 권력구조를 가지게 되며, 이것이 전통적 구조와 사도적 교회의 가장 주요한 차이점이라고 설명하였다.13) 사도적 네트워크에서 권위는 자신들의 지도자의 영적인 기름부음과 리더십의 카리스마를 인식한 추종자들에 의해 부여되며, 지위나 직책이 아닌 관계성에 기반을 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강한 유대를 이루고 네트워크를 확대해 가는 개인이야말로 서로 간의 관계를 잘 설정하고 네트워크 내에서 믿지 못할 만큼의 영향력을 향사하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된다는 것이다. 즉, 관계의 역동성을 기반으로 한 가벼워진 소그룹 안에 목회자의 리더십뿐만 아니라 평신도의 리더십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 프로그램 중심에서 선교 중심적 예배로의 전환이다. 21세기 교회 패러다임에 20세기의 도전은 프로그램 중심의 교회 가르침이다. 20세기의 많은 교회들은 모든 사역의 중심이 프로그램이었고, 이를 통해 교리와 기독교 교육과 도덕적 삶에 대한 교훈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성을 추구하는 신자들과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스며들면서 프로그램 중심의 교회는 쇠퇴하는 결과를 낳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21세기를 향한 교회들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긴밀함을 유지하며, 모든 그리스도들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영적 행위를 예배에서 찾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중심이 아닌 ‘진리 안에 있는 예배’는 교회의 사명을 자연스럽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선교로 이어지게 하고, 예배에 대한 기대를 하게 만든다. 우리는 끊임없이 오고 가는 사회의 특징에 더 이상 농락당하지 않기 위해 공동체에 뿌리를 깊게 내릴 필요가 있다.14)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이 땅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 선교 중심적 예배의 회복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섯째, 폐쇄적인 제도에서 구도자에 민감한 교회로 전환하라. 교회 성장의 형태는 크게 출생성장, 전입성장, 회심성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출생성장은 교회를 다니는 신자의 2세들에 의한 자연적 성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출생성장은 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교회를 떠나가는 탈 교인현상이 자주 일어나고 교회에 남아 있는 교인들이 소비자 교인으로 성장될 가능성이 높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 전입성장은 교인의 수평이동을 통해 어느 한 곳에 대형화, 집중화되는 성장을 말한다. 최근에 나타나는 성장의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건강한 중소교회를 사라지게 하고, 대형 교회로 인하여 소비자 교인들이 늘어나는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경제적 향상과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일반화는 사람들에게 삶의 장소에 변화를 가져 왔고, 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그래서 과거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는 신앙생활에서 육체의 안락함과 경제적 부를 표현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찾아 삶의 장소를 이동하고 이에 따라 교회도 옮기는 현상이 바로 전입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 교회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적 가치는 ‘악세사리’와 같이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되어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회심성장이다. 이 성장은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성장이며, 21세기형 성장이기도 하다. 그저 교회를 채우는 것 보다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려는 관심에 의한 역동적인 움직임이 바로 회심성장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15) 하나님은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당신의 계시를 교회에 드러내셨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은 현실화 되어 영적 갈급함에 시달리고 있는 21세기 현대인의 종교성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오늘날 복음에 낯선 사람들은 여러 방법을 통해 종교성의 만족을 시도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아닌 다른 것에 진리의 가치를 두고 맹목적인 열광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복음에 낱선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제시 해주어야 하며, 사회적 변화에 대해 영적 민감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략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여섯째, 기다리는 전도에서 찾아가는 전도가 되어야 한다. 과거 사회에서 교회는 ‘우리에게 오라.’는 전도 패러다임으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교회는 교회 자체가 주변화 되고 만화경의 유리 조각들처럼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가는 복잡한 사회에서 기껏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사람들이 오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뚫고 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전도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건강한 성장을 하며 21세기로 향한 교회들은 그 시초부터 인상적인 전도 전략 모델을 수립하고 신선한 접근법을 제시해 주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윌로우크릭 교회와 새들백 교회이다.
윌로우크릭 교회는 불신자를 향한 전도 전략을 소그룹을 통한 ‘섬김의 구조’로 세웠다. 이 전략은 칼 조지의 소그룹을 위한 세포적인 개념의 교회 모델을 따르는 것으로 성경적 원리에 최대의 가치를 두고 평신도 지도자의 열정과 헌신으로 훈련되어진 소그룹을 통해 불신자들을 섬김으로 찾아가는 것이다.16)
새들백교회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삶의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목적을 부여하는 전도 전략을 시도하였다. 새들백 교회의 담임 목회자인 릭 워렌(Rick Warren)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초점을 맞추고 시작한다면 삶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 삶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우리가 누구이며,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이를 통한 사람의 소중함, 더 나아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목적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길은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것이다.”17)
오늘날 사람들은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들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보려는 시도들을 한다. 이에 교회는 기다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목적을 가지고 그들의 현장에 찾아가 그리스도 사랑을 나누는 진정한 교제를 하고, 그리스도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즉, 그들의 삶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도록 찾아가야 한다.
이처럼 21세기의 건강한 성장을 꿈꾸는 교회들은 변화를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희생과 헌신 그리고 섬김으로 세상을 향해 나가기 위한 도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들의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소그룹이 필요하다. 또한 이성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소그룹의 필요성을 주장한다.18)
1)소그룹을 통한 공동체 의식 형성 그렇다면 왜 유독 소그룹의 방법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면서 교회의 성장을 돕는데 필요한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대중 집회만으로 끝나버린 교회의 대그룹 모임과 소그룹을 비교함으로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대그룹에서는 개인들이 필요로 하는 수용과 사랑의 정신이 결핍될 수 있는데 소그룹은 이를 보완할 수 있다. 소그룹은 대그룹에 비해, 개인이 공동체 안에 깊숙이 받아들여지고 구성원들의 사랑을 느끼기가 쉽다. 대그룹인 소그룹에 비해 이러한 성도의 교제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또한 대그룹 속에서 개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받아 가지고 돌아갈 뿐 주어진 책임은 회피하기가 쉬워진다. 큰 교회일수록 많은 교인들이 방관자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성도들이 모두 동참하여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채 구경만하고 돌아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오히려 작은 교회에서는 전 교인이 참여자가 되어,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이 역시 소그룹과 대그룹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소그룹은 구성원이 모두 관심과 사랑으로 참여자가 되는 일이 대그룹보다 훨씬 쉽게 이루어진다.
소그룹의 원리를 주장하는 텔렌(H. A. Thelen)은 소그룹 형태를 취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19) 첫째, 심리적으로 아늑하며 의사표현뿐만 아니라 감정의 표현도 자유롭다. 둘째, 구성원의 표현 기회가 많으면 사회적 평가를 받는 일도 많게 되어 학습의 동기도 고조된다. 셋째, 개인이 중시되어 개인의 책임감이 증대 한다. 넷째, 자발적 자기 결정적 지도 행위가 양성된다.
소그룹 방법이 중요한 이유는 소그룹을 통해 개인의 의견을 발표하고 평가를 받으며 쉽게 대화하면서, 인간관, 윤리관, 가치관을 재정립하고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고무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학습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특징을 소그룹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참여와 교제를 통하여 일어난다. 이 교제를 통한 배움은 믿음을 서로 나누는 것이고 삶의 방법을 서로 교환하는 방법이어서 서로서로를 고무하고 격려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가시켜 주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불러 일으켜서 배움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형 집회나 대그룹만으로는 성도와 성도간의 교제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기가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네스트 사우스콧(Ernest W. Southcott)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소그룹 운동에 대한 신학적 재발견이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조직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 반하여 교회의 세포모임인 소그룹은 교회의 생명의 필연성으로 재발견 되어야 할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요한 웨슬레가 모든 감리교인은 반드시 속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론과 같은 것이다. 이 소그룹은 교회 안에서 그 기능을 어느 것으로도 대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잘 설명한 내용은 요한복음의 포도나무 비유이다(요15). 수많은 뿌리들이 포도나무의 줄기에서 영양을 공급해 주듯이 소그룹 운동은 전 회중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공급해 줄 것이다.20)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의 기술문명사회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소그룹과 같은 신앙생활 공동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각 소그룹들의 바람직한 운영과 함께 한 교회 공동체 속에서 그 소그룹들의 유기적인 짜임새가 잘 갖추어지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지체된 각 성도들의 삶과 믿음이 잘 다져질 뿐 아니라, 나아가 교회 전체의 내실 있는 성숙과 양적 성장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소그룹은 전략적인 중요성을 가진다.21)
2)소그룹의 교육 효과 소그룹이 가지는 기능은 사람들의 태도와 가치관과 성격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볼 때, 소그룹은 개인을 사회화 시키는 데나 개인화 시키는 두 가지 측면에서 효과적인 점을 발견한다. 개인을 훈련시키므로 학습과정에 참여하게 하고 그룹 안에서 함께 움직이게 하고 과제를 분석하기도 하며 개인의 역할을 발견하면서 자기 역량을 평가해 볼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룹 속에서 일어나는 장애물들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제거하는 작업도 하고 또 같은 회원들이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도록 그룹을 돕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기도 한다. 또한 “그룹을 통하여 얻는 경험은 여러 면에서 현대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독립심과 참여의식을 균형 있게 길러 주기도 한다.”22)
소그룹을 통한 교육 방법은 강의식 교육보다 오래 기억할 수 있고 창의성을 개발하는 교육 효과를 이룰 수 있어서 어느 방법보다도 교육의 효과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모으므로 참여의식을 높여주고 그룹 구성원 상호간에 서로를 신앙적으로 고무하게 된다. 즉 인격 상호간의 학습(Interpersonal Learning)이 일어나게 된다. 정신 치료분야에서는 소그룹의 이러한 기능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교회에 소그룹을 도입했을 때 얻어지는 놀라운 결과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들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산물이다. 그룹 안에서 구성원이 자기를 개방하게 되면 그 모임은 각자가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고 재형성하는 작은 사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된다.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를 더 정확하게 배운다. 또한 자기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평가할 수 있다. 자기에게 무엇이 부족한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배울 수도 있다. 동시에 자기의 장점도 쉽게 발견된다. 영적으로 그가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인가를 서로의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다.
또한 소그룹 리더의 재생산적인 측면에서 볼 때, 소그룹 리더를 소그룹에서 교육하고 양육하여 배출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어느 교회든지 소그룹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에는 지도자의 빈곤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지도자를 가까이 볼 수 있는 소그룹에서는 모방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도자를 닮는 학습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간집단 형성은 소그룹을 통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3)소그룹의 치료 효과 소그룹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자연스러운 채널이 될 수 있다. 대그룹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 소그룹에서 일어나는 것은 소그룹의 기능이 지닌 치료 요소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소그룹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다른 형식에 비해 소그룹이 성령이 우리를 일깨워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일하실 수 있는 조건을 비교적 많이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얄롬(Irvin D. Yalom)은 소그룹이 지닌 치료 효과를 연구했는데 그는 연구를 통해 소그룹이 가진 치료 효과로서 “일반화”(Universality)의 효과를 언급했다.23) 이는 소그룹이 진행되면서 얻어지는 공감대의 일종으로 구성원들이 그룹 속에서 동질감을 얻고 안정감을 찾는 것을 말한다. 소그룹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만이 아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털어 놓을 수 없는 비밀이다. 자연히 구성원들은 자기만이 그런 문제를 안고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그룹이 진행되면서 구성원들이 안정감을 찾게 되면 서로를 신뢰하기 시작하는데 바로 여기서 소그룹의 역동성이 드러나게 된다. 즉 구성원들은 계속되는 만남을 통해 조금씩 자신을 개방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자기 안에 있던 문제가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알고 보니 나만이 안고 있는 고민이 아니구나.”하는 공감대가 소그룹의 분위기를 바꾸어 높고 소그룹 내의 상호 인간관계를 깊은 동정과 사랑으로 묶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말하지만 자기가 느끼는 것을 좀처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감정의 교환은 거기에 어울리는 환경이 주어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소그룹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지가 느끼는 바를 어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 비교적 적은 사람이 모여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면 각자가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평소에 숨겨 두었던 고민을 털어 놓는 일이 일어난다. 말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에 담고 속 시원하게 하소연할 대상을 찾지 못해 답답해하던 사람들이 소그룹에서 그 배출구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그룹은 서로의 감정을 받아주는 스펀지의 구실을 한다. 이렇듯 소그룹의 이점은, 단지 인도자가 구성원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한 가지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소그룹은 인격적인 상호 관계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처럼 소그룹은 교회에서 대그룹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도를 가르치며 그들로 하여금 온전하게(엡4:12) 하는 가장 알맞은 환경이다.
물론 소그룹 환경이 교회 교육의 만능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소그룹은 이와 같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필요한 몇 가지 조건 즉 구성원의 열의, 그룹의 분위기,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 그리고 성령의 역사 등이 고르게 갖추어 진다면 신앙교육과 성장 면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렌스 리챠드(Lawrence O. Richards)의 말을 빌리자면, “오늘날 교회는 신약시대의 교회처럼 ‘가정교회’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소그룹을 필요로 하고 있다.”24) 다시 말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는 기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대 교회의 체질, 즉 소그룹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한 체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비대한 조직체로 굳어져가는 교회의 현실을 앞에 놓고 성경 속에 풍성하게 녹아있는 소그룹의 정신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소그룹의 중요성
건강한 교회는 예배와 소그룹이라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다. 즉 주일에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praise God), 주중에는 소그룹을 통하여 성도들을 양육하고 훈련한다(raise people). 건강한 교회는 성도들을 예배자(worshipper)와 사역자(worker)로 훈련시킨다. 소그룹의 근본적인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예배가 살아야 소그룹이 살고 소그룹이 살아야 예배가 산다고 할 수 있다. 예배와 소그룹은 교회의 두 날개와 같다. 그러면 소그룹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명성훈은 ‘소그룹의 중요성’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 한다.25)
소그룹이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소그룹은 사람들이 임의로 만들어낸 현대적 발상이 아니다. 소그룹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기원한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 소그룹, 노아의 소그룹, 모세의 소그룹 형태의 리더십,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한 구속, 예수님의 제자 소그룹, 초대 교회의 소그룹, 바울 사도의 팀 전도 사역에 이르기까지 소그룹은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난다. 그러므로 소그룹 사역은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정당한 개념이다.
소그룹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성장을 위한 소그룹의 활용을 위해서는 소그룹의 목적이 복음전도를 통한 성장에 두어야 한다. 소그룹의 성장은 단지 선택(choice)이 아니다. 그것은 그룹의 정체성(identity)이 되어야 한다. 전도 지향적 소그룹이 되도록 노력할 때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
소그룹이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소그룹이 교회의 리더십을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모든 것을 혼자 하려고 하거나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려고 하는 노동자형의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노동자형 목회를 탈피하고 지도자형의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소그룹을 통해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생명력 있는 소그룹은 새로운 평신도 지도자를 잉태하고 출산하다. 소그룹에서는 미래의 예비 지도자가 항상 훈련되고 있어야 한다.
소그룹이 중요한 네 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인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 본질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찾는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따라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교회가 코이노니아 공동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의 사랑이 경험되어지는 공동체요, 성도 간에 책임을 지고 섬기는 복음적인 교제가 이뤄지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소그룹이 중요한 마지막 다섯 번째 이유는, 소그룹이 성도 개개인의 영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매주일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에 머리로만 믿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s)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가지기 쉽다.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가지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공동체를 통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개인주의적 영성은 소그룹에서 극복될 수 있다. 소그룹에서는 상호 영향, 상호 섬김, 상호 치유를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한다. 결론적으로 역동적인 소그룹은 명목상의 기독교인들(nominal Christians)을 헌신된 제자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소그룹은 개인의 성장과 아울러 교회 전체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지금까지 소그룹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리해 보면, 소그룹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고, 교회성장의 원동력이며, 교회의 리더십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교회의 본질인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성도 개개인의 영적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본다.
혹자는 좀 더 학술적인 입장에서 소그룹의 중요성을 아래와 같이 말하기도 한다.
1)성령이 사역할 수 있는 장을 제공 2)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3)교육적 능력: 상호관계학습 4)사회적으로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장 5)자아의식 제공 6)심리적 건강 및 치료 효과: 일반화, 모방, 그룹 애착심, 카타르시스 7)개인적 관계를 맺는 기술 개발 8)교회를 위한 유익 (1)은사 발견 (2)평신도 지도자 개발 (3)효과적 교인 관리 및 돌봄 (4)감사와 찬양 (5)전도 (6)영적 및 수적 성장
1) 전요섭, 그룹활동과 인간관계훈련(서울: 은혜출판사, 1994), p. 67. 재인용.
2) 남세진, 집단 지도 방법론(서울: 서울대학출판사, 1987), p. 41. 재인용.
3) 전요섭, op. cit., p. 30. 재인용.
4) J. Comiskey, How to Lead a Great Cell Group Meeting, NCD편집부 역,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그룹 인도법 (서울: NCD, 2004), p. 13.
5) Ibid., p. 14.
6) 이상화․채이석, 건강한 소그룹 사역 어떻게 할 것인가?(서울: 소그룹 하우스, 2005), p. 24. 재인용.
7) J. Comiskey, op. cit., p. 16.
8) 이상화․채이석, op. cit., pp. 24-25.
9) Neal F. McBride, 소그룹 인도법(서울: 네비게이토출판사, 1997), p. 14.
10) William M. Easum, The Church Growth Handbook, 안승철 역, 교회성장 핸드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p. 15.
11) 에디 깁스, Next Church, 임신희 역(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00), pp. 38-39.
12) William M. Easum, op. cit., p. 21.
13) 에디 깁스, op. cit., pp. 92-93.
14) Ibid., p. 194.
15) Ibid., p. 178.
16) 빌 도냐휴, 송영선 역, 윌로우크릭교회 소그룹 이야기(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1997), p. 9.
17) 릭 워렌, The Purpose Driven Life, 고성삼 역, 목적이 이끄는 삶(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2003), p. 22.
18) 이성훈, “소그룹 교육이 새신자 양육에 미치는 여향 연구”(미간행 석사학위 논문,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2005), pp. 9-11.
19) 이윤철, “교회성장을 위한 평신도 훈련방법에 관한 연구”(미간행 목회학석사학위 논문, 장로회신학대학대학원, 1984), p. 44. 재인용.
20) Ernest W. Southcott, The Parish Come Alive(New York: Morehouse-horham. co,. 1956), p. 44.
21) Ron Nicholas, Good Things Come in Small Groups, 신재규 역, 소그룹 운동과 교회성장(서울: 한국기독학생회 출판부, 1992) pp. 246-248.
22) Robert A. Raines, New Life in the Church(New York: Harper & Brothers, 1961), p. 106.
23) Irvin D. Yalom, The Theory and Practice of Group Psychotherapy(New York: Basic Book Inc. Publishers, 1975), pp. 70-140.
24) Lawrec O. Richards, A New Face for the Church(Grand Rapid: Zondervan Pub. House, 1970), p. 157.
25) 명성훈, 명성훈과 떠나는 소그룹 여행(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06), pp. 2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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