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두 예식서 비교연구 | 운영자 | 2017-02-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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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두 예식서 비교 연구 (A Comparative Study on Calvin's Two Rites)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이정현 부교수
목차
Ⅰ. 서론
Ⅱ. 칼빈의 예배신학 형성의 배경
Ⅲ. 칼빈의 두 예식서 비교 1. 두 예식서의 비교 1) 스트라스부르그 예식서 2) 제네바 예식서 2. 칼빈의 예배신학과 두 예식서에 나타난 특징 1) 예배가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2) 예배는 이해 가능해야 한다. 3) 예배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4)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 5) 예배 중 기도와 설교를 강조한다. 6) 예배에서 성찬을 강조한다.
Ⅳ.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현대 예배는 다양화 되었다. 세계가 처한 여러 가지 다른 문화와 사람들 각각의 기호에 따라 여러 유형의 예배가 출현한 것이다. 새로운 예배의 출현은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80년대에 미국의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와 ‘구도자에 민감한 예배’(seeker's senstive service)의 영향을 입어 ‘열린 예배’(opening worship)가 탄생했으며, 이어서 아이티 강국답게 ‘사이버예배’(cyber worship)도 나타났다. 이제는 미국으로부터 ‘이머징 워십’(emerging worship)1)도 직수입되고 있다. 외부적으로 이 같은 다양한 예배뿐만 아니라, 각 교단과 교회의 내부에는 또 다른 예배의 형태들이 존재한다. 각 교단마다 예식서에 나타난 예배의 형태가 다르고, 또한 지 교회마다 예배의 순서가 다르다. 같은 교단의 교회 예배도 통일성이 없으며, 목사의 취향(?)에 따라 그 예배 형식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주간에 드려지는 여러 번의 예배도 그 형식과 중심 내용이 같지 않다. 이런 작금의 현상 속에서 깨닫게 죄는 것은, 상당수의 현대예배가 사람의 기호에 맞춰져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배의 개혁이나 갱신을 외치지만 그 근거와 내용과 방향이 인본주의적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거론된 몇몇 예배의 형식들도 예배갱신의 산물들이지만, 그것은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이 가 있지 않고 사람의 기호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칼빈이 그렇게 경계했던 또 다른 ‘자의적 숭배’(self-imposed worship, 골2:23)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성경이라는 계시를 통해 요구하신 ‘성경의 예배’나 ‘성경적 예배’가 아닌 ‘자의적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큰 죄다. 지금 한국교회의 예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성경에 나타난 예배를 구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선호하는 감정에 따라, 인간이 고안한 형식을 거룩한 예배라는 이름 아래 실행하고 있는가? 예배의 개혁은 외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어 있지는 않는가? 이 같은 질문들에 해답을 얻으려면 예배의 역사적 배경과 성경적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배는 충분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흔히 교회사를 초대, 중세, 종교개혁시기, 근대 그리고 현대로 나누듯이, 예배도 이런 시대에 발맞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초대교회 전기 즉, A. D. 1세기의 시대는 특히 성경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이미 계시가 완성된 시기이므로 이후의 예배는 이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예배는 후 시대 모든 예배의 근거 및 배경과 원리가 되며, 이런 측면에서 신약교회의 예배를 역사 가운데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칼빈의 예식서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무엇보다 예배의 개혁을 중요시 했다. 왜냐하면 중세교회의 심각한 예배의 타락과 부패 때문이다. 성경적 예배에서 상당히 어긋나 있는 예배의 현실을 보면서 그것부터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으며, 이런 마음에서 시작된 그의 예배개혁은 몇 차례에 걸쳐 시도되었고 그러한 내용은 그의 예식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칼빈의 예배관이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와 두 예식서 즉,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와 제네바(Geneva) 예식서를 비교함으로써 칼빈의 예배가 어떻게 변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칼빈의 예배신학과 두 예식서 안에 나타난 칼빈 예배의 특성을 요약함으로 현대예배 개혁의 원리로 삼고자 한다.
Ⅱ. 칼빈의 예배신학 형성의 배경
칼빈은『기독교강요』초판에서 이미 예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2) 그리고 초판부터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로 기도와 찬양, 설교, 성찬, 헌금을 들고 있다. 특히 초판에서 말씀의 예배와 성찬 예배의 통일성을 강조한 이후 계속하여 설교와 성찬의 유기적 통합을 주장하였으며 성찬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핵심이라는 견해를 유지하였다. 초판에 나타난 이러한 예배의 예전적 모델을 칼빈이 어디서부터 얻었는가? 언제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아 예배자 칼빈의 예배관-예배신학-이 형성되었는가? 여기에 관하여 탐슨(B. Thompson)은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3) 칼빈의 예배는 오이코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형식과 형태”(Form und Gestalt, 1525)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형식과 형태”는 쯔빙글리(U. Zwingli)의 원칙들에 근거한 간단한 독일식 예배모범이다. 이 소책의 특징은 쯔빙글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성구를 사용한 점과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을 구별된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보았다는 점이다. 칼빈은 특히 후자의 영향을 받았다. 이어서 칼빈은 1524년 파렐(Guillaume Farel)이 쓴 “의식서”(La Maniere et fasson)의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프랑스어 사용권 최초의 예배 지침서로 설교를 높이고 성만찬은 설교와 분리시키는 쯔빙글리의 견해와 같지 않았다. 이 의식서에서 칼빈은 예배에서의 설교의 중요성과 성찬만의 2중적 코이노니아4)와 6개 사항의 개혁주의적 권면5)을 배웠다. 이뿐만 아니라, 후에도 칼빈은 파렐로부터 더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다음은 그가 1534년 5월 가톨릭 성직을 반납하고 추방되어 포이티어(Poitiers)에 머물러 있던 기간에 가까운 친구들과 동굴에서 드린 예배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6) 피터는 이곳에서의 칼빈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칼빈은 설교를 하고 주의 이름으로 모인 작은 무리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시도록 성령께 기도하였다. 이러한 예배모임은 성찬식과 함께 끝났다. 이들이 드렸던 예배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선택된 사람들이 성찬과 관련된 4복음서의 본문들을 읽었다. 그는 미사를 마귀의 발견물이라고 비판한 후, 주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여 주님의 빵을 먹자고 권면하고 의자에 앉아서 성찬을 거행하였다. 빵을 떼어 각자에게 한 조각씩을 주어 모든 사람이 조용하게, 가능한 한 예절을 지켜 먹었으며 그들은 포도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하였다. 그 후에 선택된 사람이 교황제도의 부패상을 알게 하신 점에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그 후에 그와 다른 사람들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라틴어로 말하고 흩어졌다.”7) 기독교 강요 초판에 나타난 칼빈의 예배경험이 포이티어에서의 경험과 유사하여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목회를 하면서 부쳐와 함께 그 교구에서 즐겨 불렀던 ‘시편찬송’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칼빈은 부쳐(M. Bucer)의 예배를 본 받아서 그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그리고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된 시편찬송을 근거로 새로운 시편을 써서(Aulcuns psaulmens et cantiques, 1539) 교구 신도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8) 탐슨(B. Thompson)과 피터(R. Peter)의 주장에 의하면, 결국 칼빈은 오이코람파디우스, 파렐, 포이티어스의 경험 그리고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목회에서 그의 예배신학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 가운데 결정적인 영향은 스트라스부르그 시절(1538-1541)에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망명 온 칼빈은9) 이 도시에서 프랑스인들을 위해 목회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자국어로 된 예배모범이 필요했다. 물론 그 당시 1533년 파렐에 의해 만들어진 불어판 개혁파 예배모범이 있었지만 칼빈은 이것을 채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트라스부르그의 예전을 따랐다. 칼빈은 아마도 이 예전에 따라 1538년 9월 8일 주일부터 예배를 드렸으며10) 예배 중 설교와 찬송, 기도가 시행되었고, 한 달에 한 번씩 성찬도 있었다.
Ⅲ. 칼빈의 두 예식서 비교
칼빈의 프랑스어 예식서 발간은 1539년 말(혹은 1540년 초)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 첫 예식서에는 회중 찬송을 위한 프랑스어 운율과 멜로디로 된 몇 개의 시편송도 담고 있었다. 이 예식서의 제 1판은 잃어버렸으며, 제 2판의 복사본이 제네바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발간된 제 2판(1542년)은 같은 해에 제네바에서 발간된 것과 다르지 않다. 제3판은 1545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발간되었는데, 이것은 칼빈을 이어 그곳에서 프랑스 망명인들을 위해 목회를 했던 풀레인(Valerand Pullain)에 의하여 활용되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돌아와서 “교회법”(Ordonnances ecclesiastiques, 1541)을 펴냈다. 이 “교회법”에는 설교의 장소와 횟수가 명시되어 있었다. “주일에는 새벽에 생 피에르(Saint-Pierre)와 생 제르배(Saint-Gervais) 교회에서, 아침 정해진 시간에는 생 피에르, 마들렌(Madeleine), 생 제르배 교회에서 설교를 행한다.....오후 3시에는 모든 교구에서 두 번째 설교가 있다.....평일에는 (현재) 행해지고 있는 두 번의 설교 외에 생 피에르에서 일주일에 세 번-즉, 월, 수, 금에 한번씩-설교한다.....특별기도의 시간에도 주일 예배 순서를 따를 것이다. 목회 사역을 지탱하기 위해 5명의 목회자와 세 명의 협조자가 필요하다.”11) 이 같은 진술에서 당시의 예배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제네바 교회는 주일 예배(새벽, 오전, 오후)와 주간 예배로 구분된다. 예배 때마다 설교가 있었으나 주일 새벽의 설교는 정상적 설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주일 오후 예배를 ‘두 번째 설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특별기도회는 평일 중 하루를 정해서 기도를 했다. 처음에는 화요일, 다음에는 목요일로 모였다가 최종적으로 수요일로 정착을 했다. 이것이 개신교회의 수요일 예배의 기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협력자들을 포함한 8명의 목회자들이 2-3개 교구에서 주일 설교와 평일 설교를 행하였다. “교회법”을 만들어 낸 이후, 칼빈은 1542년에 “교회의 기도와 찬송 양식”(1542/1545)(원제는, The Form of Church Prayers and Hymns with the Manner of Administering: The Sacraments and Consecrating Marriage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Ancient Church-고대교회의 행습을 따른 예배 의식서: 성례시행 방식과 결혼 의식 방식이다)을 펴낸다. 이 책은 칼빈이 파렐의 “의식서”(La Maniere et fasson)를 근거로 예배의식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가 파렐과 함께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 1537년에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대한 항목들”(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을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매 주일 성찬을 시행 할 것을 제의하고, 교회의 훈련을 매우 강조했음이 나타난다. 이 문서가 곧 “교회의 기도와 찬송 양식”(1542)의 근간이 되었다. 칼빈은 이 책의 서문에서 설교를 비롯한 기도와 성례가 예배의 세 가지 표지라고 말한다. 이것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사용한 것과 내용이 거의 유사하며 약간 단순화시켰다. 그 후 칼빈은 1545년과 1547에 다시 예식서를 발간하였다.12) 칼빈은 부쳐와 파렐을 비롯한 여러 명의 개혁자들과 그의 예배적 경험으로부터 예배신학을 정립했으며, 그 이후 그는 거의 일관된 예식서를 만들게 된다. 2-3년 동안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있을 때 만든 프랑스어 ‘예식서’를 비롯하여 ‘교회법’과 ‘교회의 기도와 찬송양식’ 그리고 그 후로도 두 권의 예식서를 더 발간한다. 그는 이러한 예식서를 만들면서 항상 사도와 교부들의 초대 교회와 일치된 예식서를 만들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예식서 가운데 비교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스트라스부르그 판과 제네바 판이다. 망명시절의 예배와 본국에서의 예배를 비교해 봄으로 칼빈이 본래 추구하고자 했던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1. 두 예식서의 비교
1540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작성된 예식서와 1542년 제네바에서의 예식서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맥스웰은 그의 책에서 세 가지 즉, 1537년판, 1540년판 그리고 1542년판의 예식서를 기술하고 있으나 탐슨은 1542년 제네바판과 1545년의 스트라스부르그판에 나타난 교회 기도의 형태와 내용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13) 여기서는 맥스웰의 세 가지 예식서 중 두 가지의 순서만 고찰한다.
〈말씀의 예전〉
(스트라스부르그 예식서-1540) (제네바 예식서-1542)
성구: 시편 124편 8절 성구: 시편 124편 8절 죄의 고백 죄의 고백 사죄의 선언 십계명 시편(곡을 붙여 노래함) 매 계명 후, Kyrie eleison을 부름 조명을 위한 기도 조명을 위한 기도 설교 본문(Lection) 설교 본문(Lection) 설교 설교
〈다락방 예전〉
구제헌금(Collection of alms) 구제헌금 중보기도(Intercessions) 중보기도 길게 푼 주기도 길게 푼 주기도 사도신경을 노래하는 동안 성물준비 사도신경을 노래하는 동안 성물준비 성별기도 주기도 성찬제정의 말씀 성찬제정의 말씀 권면의 말씀(Exhortation) 권면의 말씀 성별기도 떡을 뗌 떡을 뗌 시편을 노래하는 동안 배찬 시편을 노래 또는 성경을 봉독하는 동안 배찬 성찬 후 기도(Post-communion collect) 성찬 후 기도 부록에 있는 눈크 디미티스(시므온의 찬미) 아론의 축도(Aaronic Blessing) 아론의 축도
1)스트라스부르그 예식서
칼빈이 만든 예식서는 예배의 부름 , 용서를 위한 기도, 설교, 중보의 기도 등을 보완하고 대신 자비의 연도(Kyrie eleison)나 영광송 등을 생략한 것을 제외하고는 부처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14) 그래서 칼빈 예배의 전체적인 구성에 있어서는 부쳐의 것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죄의 고백으로 예배를 시작하는 이유는 ‘죄를 마음에 품으면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근거로 이 부분을 앞 순서에 넣었다. 사죄의 선언을15) 스트라스부르그에서는 행하나 제네바에서는 실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가톨릭의 고해성사와 같은 맥락에서 사죄의 서언을 이해했기 때문에 제네바 시의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운율을 붙인 십계명(Decalogue)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자는 의도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붙여졌다. 이 십계명이 물론 칼빈의 예식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기는 하나, 부쳐의 기록(Grund und Ursach-근본원인)을 보면 이미 그것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어두운 인간들의 마음에 말씀의 원 저자가 되시는 성령께서 밝히 비추어 주셔서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중요시 했다. 그래서 성경을 봉독하기 전에 성령의 조명을 위한 짧은 기도를 했다. 칼빈은 다락방 예전의 첫 순서로 구제헌금을 넣었다. 이는 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제헌금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된 마땅한 사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순서는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 순서와 주기도를 길게 풀어서 설명해 준 것이다. 칼빈은 주기도를 신학의 정수와 전 복음의 요약으로 보아 그것을 중요시 여김으로 스트라스부르그에는 두 번이나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형식에 빠질 염려가 있다는 생각에 제네바에서는 한 번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성찬제정의 말씀과 권면의 말씀은 성찬의 효력을 입증하는 것으로 중요시하여 제네바 의식에도 공히 나타난다. 배찬 후 기도는 성찬 시 개혁교회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대 감사기도’(great thanksgiving prayer)이다.16) 이 기도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 위에 보내 주심을 감사하는 것이다.17) 칼빈이 시므온의 찬미(Nunc Dimittis, 눅2:29-32)를 성만찬 후에 넣고 있으나 이것 역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쳐가 이미 루터와 쯔빙글리의 예배의식을 종합해 놓은 것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은 신약의 사도적 축도(apostolic blessing, 고후13:13)를 사용하지 않고 민수기 6장 24-26절을 본문으로 하고 있는 아론의 축도로 예배를 종료한다.
2)제네바 예식서
제네바 예배 의식을 살펴보면 그 구조가 더욱 단순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가능하면 예배 의식을 간단히(simple)해야 한다고 주장한 제네바 행정 관료들의 극단적인 입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의 제네바 예식서는 스트라스부르그 판에 있었던 사죄의 선언과 십계명 낭독을 제외한다. 전자는 앞에서 밝힌 대로 가톨릭적인 성향 때문이고, 후자는 시편 찬송으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주기도가 두 번 들어간다는 이유에서 암송으로 했던 것이 빠지게 된다. 또한 성별기도의 위치가 바뀌어지고 눈크디미티스도 생략된다. 이처럼 제네바 예배서가 스트라스부르그 예식서보다 훨씬 단순화 되는 것은 칼빈의 의도라기보다 제네바 시 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칼빈의 입장이 잘 반영된 예배 의식은 제네바 보다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만들어진 예배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쪽의 예배식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배의 2부 구조(two parts structure of worship)인 말씀과 성례의 균형이라는 점이다. 예식서에는 칼빈이 ‘은혜의 방편’(means of grace)으로써 강조한 두 가지-말씀(the Word)과 성례전(the Sacraments)이 분명히 나타난다. 성만찬의 중요성을 철저히 인식하여 매주일 거행할 것을 주장한 점은 그의 성경신학에 근거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칼빈의 입장이 실제 현장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행정 권한을 가졌던 제네바 관료들이 이를 가로 막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규 일요예배에서 성만찬이 분리된 쯔빙글리의 예배방식을 제네바 시가 따르도록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망명을 마치면서 그는 제네바로 되돌아오도록 초청받았다. 그래서 그는 각 시의 교회들이 성만찬 일자를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도록 완화시키고, 성만찬에 더 자주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웃 교회의 성만찬에 참석토록 하려 했다. 그러나 행정관들이 이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결국은 성만찬 예전이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에만 행해지도록 했다.18) 칼빈은 시(市)의 간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가 원치 않는 성만찬 관례를 따랐지만, 이것이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칼빈의 예배신학과 두 예식서에 나타난 특성
칼빈의 예배에 관한 기록들을 토대로 볼 때 비록 칼빈은 부쳐의 스트라스부르그 예배의식을 많이 차용했지만 그는 예배 영역에서 행한 모든 활동에서 자신의 독특한 흔적을 남겼다. 그가 추구했던 예배신학과 상술한 두 예식서에 나타난 예배의 특성을 몇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예배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충실해야 한다.19)
칼빈은 예배에 있어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견실성을 주장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교회 생활에 관하여 성경적 비판을 가할 때 그는 과격하였다. 그는 모든 실행은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마태복음 15장 9절과 이사야 29장 13절의 말씀을 근거로 인위적인 예배를 질타하였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예배의 유일한 입법자이기를 원하신다.’20)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인 성경에 제시된 대로의 예배를 원하시지, 교회의 제도를 통한 인간적인 창안물로서의 예배를 원치 않으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예배의식을 공인하는 교회제도는 폭군적이고 무의미하며 또한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21)라고 하였으며 “예배에 있어서의 관습과 인간적인 창안물은 성경과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비난 받았다.”22)고 말한다. 심지어 ‘자기 말씀과 관계없는 자들이 허구의 예배를 끌어들여서 자신에 대한 예배를 침해한 일에 대해 보복을 그치지 않는다.’23)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예배가 성경과 신학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적 비판으로부터 예배시간이나 심지어 예배하는 날 같은 많은 사소한 문제들을 제외시켰다. 성찬 예식을 행할 때 포도주의 색깔, 기도 할 때 무릎을 끊는 자세와 같은 여러 문제들을 칼빈은 교화(敎化)의 목적을 가지고 행하여지는 한 어느 것을 택하여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필요이상으로 예배의 모든 행위나 부대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는 않았다.24) 칼빈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의 말씀 속에서 지정해 주신 방법에 따라서 예배드려야 하고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된 것을 준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칼빈은 예배를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순종의 문제로 본 것이다.25) 즉 모든 예배행위는 성경과 신학에 부합하고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26) 따라서 그는 중세교회를 답습하고자 하지 않고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예배모습을 회복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예배는 이해 가능해야 한다.27)
칼빈은 예배가 신학적으로 틀림이 없을 뿐 아니라 이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도 예배에 감정적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예배는 전 인격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예배에 있어서 이해를 매우 강조하였으며 명료성에 이르는 첫 단계로서 개신교 예배가 보통사람들의 언어로 드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설교자의 학식으로 회중에게 감동을 주려하지 말고, 사상을 전달하는데 언어를 사용해야 하며, 성례전적인 행위는 언제라도 교육과 설교를 행함으로써 그 행위나 상징이 분명히 이해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황과 실패, 하나님의 용서를 동시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고 보았다. 즉 예배의 의식이 불분명해서는 안 되며, 예배는 그 속에서 우리가 마음과 정성으로 참여 할 수 있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이 주장한 예배의 명료성은 고도로 훈련된 회중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교육하는 교회를 원하였으며, 따라서 성찬식에 처음으로 참여하는 것보다 교리문답 교육을 먼저 받아야만 했다.28) 결국 칼빈은 예배의 의미가 이해 가능하도록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3)예배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칼빈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칼빈은 자기가 교회에 제시한 예배형식은 전적으로 교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교회에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예배가 실용적으로 갖는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 충성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 가운데서 찾아진다. 칼빈에 따르면 예배는 신앙과 사랑 안에서의 갱신을 목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설교는 지적인 훈련이 아니며 예식은 심미적인 성취물이 아니라고 보았다. 예배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이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스며 들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 하며 그리고 감사하는 삶을 살려는 의지가 예배의 전체사건을 지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4)예배는 단순해야 한다.29)
칼빈은 예배의식 속에 있는 모든 과장된 허식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그것은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그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식을 행함에 있어서도 칼빈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감각을 속이는 이외의 다른 아무 목적도 없는 극적인 요소와 생명이 없는 과장된 요소들을 반대하였다. 칼빈의 예배에 있어서 허식이나 무가치한 인간적 영광과 같은 모든 불필요한 행위나 말은 배제된다. 따라서 예배에 쓰이는 말과 행동, 도구 등은 모두 그것들이 전하거나 표현하는 실체(實體)에 적합해야 한다.
5)예배 중 기도와 설교를 강조한다.
상술한 두 예식서에는 참회기도를 비롯하여 조명을 위한 기도, 중보기도, 주기도, 성별기도, 성찬 후 기도 그리고 축도에 이르는 다양한 기도의 형태가 나타난다. 이 같은 여러 기도의 형태에 맞는 각각의 내용에 관해서는 탐슨이 잘 설명하고 있다. 탐슨은 각 기도의 샘플을 한 두 개씩 밝힘으로 그 당시 칼빈이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30) 그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항은 칼빈이 기도 중심의 예배를 구사하였으며, 기도의 고유한 명칭을 썼고 그 명칭에 따른 내용으로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단순히 기도의 한 순서를 마련해 놓고 잡다한 여러 가지 내용으로 기도하지 않았으며 독특한 명칭에 합당한 기도를 드림으로 다른 순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칼빈은 예배 중 설교를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은 칼빈이 사도행전 2장 42절을 근거로 “교회의 어떤 집회도 말씀의 설교와 기도, 성만찬의 집행, 헌금의 봉헌(구제) 없이는 행해질 수 없다.”31)고 한 말 가운데서 말씀의 설교를 당연 앞세우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32)고 말함으로 설교를 강조했다. 칼빈이 한 차례의 예배를 정확하게 몇 시간 드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보편적으로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예배는 긴 편이었다. 그리고 칼빈의 설교 원고를 볼 때, 결코 짧은 시간에 설교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33) 그렇다면 칼빈의 예배 시간 중 말씀의 설교가 상당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심지어 칼빈은 설교 없는 성찬은 무의미하다고 할 정도로 설교를 강조하였으며, 결국 칼빈은 예배의 핵심을 말씀의 선포에 있다고 본 것이다.
6)예배에서 성찬을 강조한다.
성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다른 개혁자들과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는 가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루터의 공재설(Consubstantiation), 쯔빙글리의 기념설(Memorialism)과도 다른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주장한다. 칼빈은 성찬제정의 목적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고자 함이며 또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의 고백을 간증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34) 그는 성찬을 은혜의 수단이며, 동시에 말씀의 표(sigilla verbi)요, 계약의 표적으로 인정하였다.35) 설교를 듣는 말씀으로 이해 한 반면 성찬을 눈으로 보고 먹는 말씀으로 이해한 것이다.36) 이 성찬이 말씀과 함께 동일하게 은혜 받는 수단이며 성찬이 믿음을 유발시키지는 못하나 증진시킨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예배 중 설교와 거의 동일하게 성찬을 중요시 한 것이다. 그는 예배를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과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 Room)으로 나누었으며,37) 전자보다 후자가 더 복잡한 순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성찬의 요소를 중심으로 몇 가지 순서가 앞뒤로 놓인다. 다소 복잡하게보이나 칼빈은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이 순서에 따라 성찬 시행을 원했다. 하지만 지역과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는 월 1회 정도, 제네바에서는 년 3-4회 밖에 할 수가 없었다.38) 이는 목회적 상황 때문에 성찬의 횟수를 줄인 것뿐이지, 그것을 가볍게 본 것은 아니다. 상술한 칼빈 예배의 특성 6가지는 현대예배의 수정, 보완의 중요한 원리가 된다. 인간의 감정이나 요구, 시대적인 정황에 따라 예배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고, 이 같은 예배 신학적 근거와 성경적인 토대 하에 정당하게 개혁해 가야하는 것이다. 예배의 중요한 요소 네 가지를 잘 안배하고 그것이 성경대로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예배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배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목적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Ⅳ. 결론
20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다양한 예배가 구사 되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예배는 문화적인 배경과 개인의 기호에 맞추어 구성, 실행된다. 예배의 갱신이나 개혁이 성경과 정통교회사에 근거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문화나 인간의 감성에 근거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문화적 요구와 인간적 감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아울러 그것들은 타락한 성질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예배를 기획, 실행해야 한다. 더 범위를 좁힌다면 신약성경의 예배와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가고자 했던 예배자가 칼빈이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의 개혁자들,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 예배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기획하고 실천했던 예배식이 스트라스부르그 예식서와 제네바 예식서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예배순서는 칼빈의 예배신학과 초대교회의 예배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이 두 예식서를 통하여 바른 예배의 원리나 예배개혁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예배의 2부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말씀과 성만찬을 예배의 2대 기둥으로 두고, 이것을 성경에 입각하여 실행해야 한다. 칼빈의 원래 의도대로 매 주일 말씀이 설교되듯이 성찬이 시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찬도 말씀과 동일하게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 중심의 예배를 구사하되, 고유한 명칭을 사용하고, 그 명칭에 걸 맞는 내용을 기도함으로 다른 순서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매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잊지말아야하며 아울러 예배자의 인격적 변화를 추구하는 예배여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요소를 시행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과, 이해 가능한 언어를 통하여 의사소통을 하고 단순해야 한다. 칼빈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이런 원리 하에 예배를 드리고 개혁해 나간다면,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완)
참고문헌
(국내서) 김영재.『교회와 예배』. 수원: 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김영한. “칼빈의 예배신학.” 『숭실대학교논문집』 27집(1997년), pp. 423-434(425) 박건택. “칼뱅의 예배 이해.” 『신학지남』(2000년 봄호), pp. 29-46(39, 41) 이은선. “칼빈의 예배개혁과 교회의 21세기 예배의 갱신.” 『성경과 신학』 24(1998년), pp. 189-232(192) 이정현.『성경적 기도생활』. 시흥: 도서출판 지민, 2006. .『개혁주의 예배학』. 시흥: 도서출판 지민, 2008. . “이머징 워십의 이해와 비판.”『성경신학저널』(2009년), pp. 313-351. 정성구. “칼빈주의적 예배의 원리.” 『신학지남』 211(1987년 봄호), pp. 30-47(46)
(번역서) Calvin, J. Institutes, 김문제 역, 『기독교강요』 4권. 서울: 혜문사, 1984. Fisher, L. Reformed Witness in the Ecumenical Movement. 『개혁교회의 증거』. 이 형기 역. 서울: 장로교 출판사. 1996. Leith, John H. An Introduction to the Reformed Tradition : A Way of Being the Christian Community. 황승룡․이용원 공역.『개혁교회와 신학』.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6. Maxwell, William D. An Outline of Christian Worship. 정장복 역.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서울: 쿰란출판사, 1996. Nagel, D. W. Geschichte des christlichen Gottesdienstes. 박근원 역. 『그리스도교 예 배의 역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국외서) Maxwell, William D. An Outline of Christian Worship.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6. Peter, R. "Calvin and Liturgy, According to the Institutes," in John Calvin's Institutes: His Opus Magnum(Thesis for Ph. D. at the Potchefstroom University, 1986). Thompson, B.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New York: The Word Publishing Company, 1961.
1) 이머징 워십에 대한 내용은 본인의 “이머징 워십의 이해와 비판”,『성경신학저널』(2009년), pp. 313-351. 를 참고하라.
2) 이은선, “칼빈의 예배개혁과 교회의 21세기 예배의 갱신,” 『성경과 신학』 24 (1998년), p. 189-232(192).
3)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New York: The Word Publishing Company, 1961), pp. 185-190.
4) 여기서 말하는 성만찬의 2중적 코이노니아는 성만찬이 수직적인 교제와 수평적 교제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cf.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 187.
5) 성만찬 예배가 공유하는 6가지 요소는 성만찬의 의미를 고양시키는 하나님의 복음을 암송, 믿는 자들을 성찬상으로 초대하는 것, 자기를 살피고, 합당치 않은 자들을 출교, 성찬제정의 말씀, 너희 마음을 들어 올리는 것이다(Sursum Corda). cf. Bard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 187.
6) R. Peter, "Calvin and Liturgy, According to the Institutes," in John Calvin's Institutes: His Opus Magnum(Thesis for Ph. D. at the Potchefstroom University, 1986), p. 225.
7) R. Peter, "Calvin and Liturgy, According to the Institutes," pp. 244-245.
8) B.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 189.
9) 칼빈은 강력한 가톨릭 국가를 표방하는 조국 프랑스에서는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어서 스트라스부르그로 망명을 했을 것으로 본다.
10) 박건택, “칼뱅의 예배 이해,” 『신학지남』(2000년 봄호), p. 29-46(39).
11) 박건택, “칼뱅의 예배 이해”, p. 29-46(41). 재인용.
12) William D. Maxwell, An Outline of Christian Worship, 정장복 역,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서울: 쿰란출판사. 1996), p. 155. 1545년 판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발행한 것이며, 1547년은 제네바에서 나온 것이다.
13) 두 예식서에 나타난 자세한 설명은 B.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p. 197-210. 및 William D. Maxwell, An Outline of Christian Worship(영판), pp. 114-115.를 참고하라.
14) 칼빈의 것과 비교해 보기 위해 부쳐의 예배순서를 적어둔다. '죄의고백, 사죄의 말씀, 사죄의 선언, 시편찬송, 조명을 위한 기도, 시편낭송, 성경봉독, 설교, 구제헌금, 떡과 잔의 준비, 중보기도와 성별기도, 주기도, 권면, 성찬제정의 말씀, 분할, 배찬, 성찬을 받는 동안 시편이나 찬송을 부른다, 성찬 후 기도, 아론의 축도, 폐회.' 참고, 이정현,『개혁주의 예배학』(시흥: 도서출판 지민, 2008), pp. 94-95.
15) 탐슨이 말하는 한 예를 볼 수 있다. “이같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달려 구원을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사죄(The absolution of sins)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cf. B.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 198.
16) 성찬 시 가톨릭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도는 에피클레시스(epiclesis)이고 여기에 비해 개신교의 성찬 시 네 가지 기도(성별, 분병, 분잔, 대 감사기도) 중 제일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뜻이다.
17) 대 감사기도의 셈플은 본인의 책 『성경적 기도생활』(시흥: 도서출판 지민, 2006), p. 52. 및 B.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 208.를 참고하라.
18) 스위스 개혁교회에서는 이 세 가지 교회력만 인정되었다. cf. D. Willam Nagel, Geschichte des christlichen Gottesdienstes, 박근원 역,『그리스도교 예배의 역사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2006), p. 263.
19) 김영재,『교회와 예배』(수원: 합동신학교출판부, 1995), p. 100.
20) J. Calvin, Institues, 김문제 역, 『기독교강요』4:10:5:23.
21) J. Calvin, Institues, 4:10:3.
22) J. Calvin, Institues, 4:10:5:23.
23) J. Calvin, Institues, 4:10:5:23.
24) John H. Leith, An Introduction to the Reformed Tradition: A Way of Being the Christian Community, 황승룡․이용원 역, 『개혁교회와 신학』(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pp. 209-210.
25) L. Fisher, Reformed Witness in the Ecumenical Movemen, 이형기 역, 『개혁교회의 증거』(서울: 장로교 출판사. 1996), p. 115.
26) 김영한, “칼빈의 예배신학”. 『숭실대학교논문집』 27집(1997년), p. 423-434(425).
27) 김영재,『교회와 예배』, p. 101.
28) L. Fisher, Reformed Witness in the Ecumenical Movement. p. 115.
29) 김영재,『교회와 예배』, p. 102.
30) cf. B. Thompson, Liturgies of the Western Church, pp. 197-208.
31) J. Calvin, Institutes, 김문제 역, 『기독교강요』 4:17:8:44. R. Peter는 “Calvin and Liturgy, According to the Institutes”에서 이것을 칼빈의 예배의식의 4대요소라고 지적했다.
32) J. Calvin, Institutes, 4:2:1:4.
33) 종교개혁 당시의 설교 시간은 보통 회중들의 요구에 따라서 달랐다고 한다.
34) J. Calvin, Institutes, 4:14:2:13.
35) J. Calvin, Institutes, 4:14:2:6.
36) 어거스틴이 성찬을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이해 한 것을 칼빈도 받아들인다.
37) 예배의 2부 구조로 나누는 것 자체가 말씀과 성찬을 동등하게 보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38) 정성구, “칼빈주의적 예배의 원리,” 『신학지남』 211(1987년 봄호), p. 30-4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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