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5 19 주일설교 <고넬료의 경건생활> | 이정현 목사 | 2024-05-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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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10:1-8절 개역개정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24년 5월 19일 사도행전 10:1-8, 고넬료의 경건생활 사도행전 9장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은 베드로가 행한 이적 두 가지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교회들을 순방하다가 룻다에 들르게 됩니다. 거기서 8년 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욥바의 사람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룻다에서 욥바로 내려가 죽은 다비다를 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난 결과는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9장 35절에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애니아)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고 하셨고 42절에는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게 된 교훈은 이적은 이적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하는 이적이 아니면 이적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 애니아가 일어나고 죽은 다비다가 살아나도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다면 그 이적들은 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 다시 병들어 죽게 될 것이고 믿지 않고 죽었다면 지옥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의 이같은 이적 두 가지가 있은 후에 사도행전 10장으로 넘어 오는데 여기서는 고넬료의 경건한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 전체를 놓고 볼 때에는 고넬료의 이 경건 생활도 베드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 5절에 고넬료와 연결하여 베드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에 보면 고넬료의 사회적 지위가 나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가이사랴에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달리야 부대는 로마의 부대라는 의미이고 이 부대가 가이사랴에 주둔해 있었으며 그 부대의 백부장은 백 명 정도의 군사를 거느린 장교라는 뜻입니다. 로마부대의 지휘관이었으므로 그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임과 로마의 장교로서 유대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하여 로마 황제로부터 파송 받아 온 권세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백부장이 4명 나타납니다. 복음서에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믿음 좋은 가버나움의 백부장’이고(눅 7:5), 다른 한 사람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수행하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백부장(눅 23:47)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또 다른 두 사람이 나타나는데 본문의 고넬료와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책임을 맡았다가 바울을 구원하는 백부장입니다(행 27:43). 네 명 모두 로마 장교이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마도 본문의 백부장 고넬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주장할 만한 사실이 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여기에 중요한 단어 ‘경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경건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또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경건입니다. 이 경건이 있을 때 고넬료처럼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고넬료의 경건은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추측하기는 로마에 있을 때부터 유대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팔레스틴에 와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사실은 두 가지 경우 다 백부장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인은 하나님을 신으로 섬길 수 없으며 더군다나 군인이, 지배를 받는 국가의 신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자기만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경건하여 온 식구들과 더불어 유대인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고넬료가 귀한 사실은,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혼자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 아들, 딸과 더불어 온 식구들이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겁니다. 가족 중 혼자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고 자녀들 중에 한 사람이 잘 믿을 수도 있지만 고넬료는 그러지 않았고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 19장에 보면 롯의 가정이 나옵니다. 롯의 가족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죄로 물들어가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천사들이 롯에게 와서 이 성이 멸망할 것이니까 성 밖으로 나가라고 알려줍니다. 롯이 깜짝 놀라서 가족들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롯의 가족은 선뜻 떠나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롯이 자기 사위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말했지만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체되자 사위들을 포기하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대신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선언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오직 나와 내 가족은 하나님만 예배하겠노라”고 고백하시고 그 신앙따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이들에게(고아와 과부에게) 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는 경건한 사람도 동시에 그들에게 마음이 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구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경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예배 순서에 보면 2부 성찬 예배의 첫 순서로 ‘구제헌금’이 들어가 있습니다. 칼빈이 시무했던 스위스 제네바 교회는 국가교회였기 때문에 헌금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라에서 목사님의 월급이나 예배당 보수, 유지 비용이나, 모든 금액이 다 지급됩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은 나라에 종교세만 잘 내면 되는데 그 종교세금이 보통 월급의 11조 정도 됩니다. 그 정도의 금액만 정부에 내면 주일에 교회 와서 내야 할 헌금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성찬 예배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 ‘구제헌금’ 순서를 두어서 헌금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에는 나라뿐만아니라 교회에서도 해야한다는 의도에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는 구제헌금을 따로 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구제는 성경이 강조하는 주제이고 오늘 본문의 이방 장교 고넬료는 어려운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열심히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구제에 힘을 썼습니다. 성경에는 ‘많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말은 ‘크게, 자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고넬료는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자주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양과 질로 풍성하게 했다는 말이지요. 얼마나 많이 구제하였는지, 22절에 유대인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이 기억하신 바가’(4)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실 정도로 바르게 구제하고 많이 구제했습니다. ˃ 그리고 고넬료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의 군대 장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특이하지만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특이합니다. 한마디로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을 알거나 경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한 항상 기도로 경건 생활에 열중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의 기도 생활도 경건 생활의 일종입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가끔 기도할 수 있지만 항상 하기는 힘든데 고넬료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범사에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항 역시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 9시 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다가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도 시간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만 로마 사람들은 잠자거나 쉬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고넬료도 로마 군인이기 때문에 쉬어도 되고 잠을 잘 수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 장교이기 때문에 바쁜 업무를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시간에 그를 만나 주시고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달리야 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해서 온 가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잘 경외했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루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3). 제 구시는 유대인의 시간으로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는데 아침 9시, 정오에, 그리고 오후 3시, 이렇게 정기적으로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의 기도 시간을 따라 함께 기도한 것은 좋은 신앙 습관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환상을 봤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환상이라는 것은 ‘특별하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광경’입니다. 평범하게 하나님을 계시하거나 자신의 뜻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어떤 상(그림이나 영화)을 통하여 보여주거나 알려 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고넬료는 특별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알려진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5절과 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고넬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다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앞으로 확실히 밝혀질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서론에 불과합니다. 5절과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하나님의 사자가 기도하던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죽은 다비다를 일으켜 주고 한 동안 그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서 그를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고 있고 그 집은 해변에 있다’고까지 일러 주셨습니다. 여기서 무두장이(tanner)는 ‘짐승의 가죽을 다루어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회적으로 천민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자가 베드로 사도를 모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장은 분명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직업이었으므로 마을에서 떨어져(23m) 주로 바닷가에 있어야 했습니다. 무두장이의 집은 해변에 있었는데 이곳이 곧 욥바 항구 근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모셔오라고 정확하고 구체적인 지시를 고넬료에게 하였습니다. 천사로부터 환상 중에 이 이야기를 들었던 고넬료는 어떻게 합니까? 고넬료는 곧장 천사의 지시에 순종을 합니다. “7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7-8). 고넬료는 자기가 직접 가지 않고 자기의 종들을 보냈습니다. 하인 둘과 경건한 신하 1명, 도합 3명을 뽑아서 그들에게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다 해 주고 베드로에게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신임과 친밀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경건한 주인 밑에 경건한 신하가 생기듯이 고넬료 밑에는 경건한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고넬료의 경건 생활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사실 본문은 위대한 한 사건의 서론에 불과합니다. 그 사건의 서론으로 고넬료의 경건을 지적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군대의 장교로서 유대 땅에 왔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섭리 중에 하나님을 알고 경건 생활에 힘쓰게 됩니다.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요 어려운 유대인들을 구제하며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사람을 보내어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한 가지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의 경건 생활을 우리 자신들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는 경건했습니다.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늘 기도에 힘썼고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는 어떻습니까?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한 가장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한 목사와 장로가 되어야 합니다. 나부터 먼저, 우리부터 먼저 경건한 사람 즉, 하나님과 좋은 관계,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항상 기도에 힘쓰며 구제를 많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것들(경외와 기도와 구제)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으로, 하나님 경외하기를 힘쓰는 것과 항상 기도하는 일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더 돈독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 가지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소망의 식구들은, 고넬료처럼 경건한 성도들이 되어서, 온 식구들로 더불어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항상 기도에 힘쓰고, 어려운 이웃들을 잘 도와주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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