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목사설교

  • 홈 >
  • 예배 · 설교 >
  • 이정현목사설교
이정현목사설교
2023 12 17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정현 2023-12-26
  • 추천 0
  • 댓글 0
  • 조회 284

http://isomang.net/bbs/bbsView/13/6335910

[성경본문] 야고보서1:1-4절 개역개정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1217일 약 1: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요즘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지만 가장 부족한 것 중에 하나가 참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까딱하면 폭발하고, 까딱하면 좌절하고 까딱하면 자살 합니다. 그래서 현 우리나라에서는 묻지마 사건도 많이 일어나고 젊은이들의 자살도 세계 수준입니다.

 

유명한 국내 유수한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건도 몇 번 있었습니다. 물론 공부에 처지는 학생들이 학점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겠지만 어른들이 보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애인에게 실연당했다고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군대에서 상사에게 기합을 받고 폭행을 당했다고 자살하고, 연예인이 비난하는 악플을 참지 못하고 쉽게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시대를 가리켜 인내결핍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성경도 이 시대를 가리켜 조급하며 감사하지 않으며 무정하며 인내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으심을 본받아 환란과 고난 중에도 욥처럼 오래 참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길이 참는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을 살펴봄으로 은혜받고자 합니다. 말씀을 사모함으로 경청하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사람들에게 깨달음과 도전과 은혜를 주십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야고보서의 저자가 누구이며 누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본서의 저자가 야고보임을 밝혀 주지만 성경에 야고보라는 이름이 적어도 4명 이상 나타나는데 그러면 과연 본서의 저자는 누구이겠습니까? 가장 유력한 사람은 두 사람인데 그 중 한 사람은 예수의 12제자 중의 하나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12:2)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형제 야고보(13:55, 1:13, 고전 15:7)입니다. 먼저 언급한 12제자 중의 하나인 야고보는 사도행전 12:2에서 A.D. 44년경 유대 분봉 왕 아그립바 1(Herod Agrippa I, A.D. 39-44)에 의해서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서가 AD 46년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을 보기 때문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가 본서의 저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교리를 잘못 이해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믿음에 따른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이 서신은 주의 형제 야고보가 기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 격으로 교회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활동하였고(15) 또한 사도행전 21:17-25, 2:12에 나타난 그의 실천적 신앙이 야고보서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자기에 대하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동격으로 취급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표현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 육신의 형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고 따르고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던 야고보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이 주의 형제라는 말로 불리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불리기를 더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바로 흩어져 있는 12지파에게문안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인이 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을 다른 성경에서는 할례받은 기독교인들인데 이들이 유대 땅을 떠나 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동일한 대상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흩어진 유대인들을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도 바로 이들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 그 핍박을 피해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라고 보여집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 신앙생활 하는 그 성도들에게 야고보는 이런 권면을 합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우선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유대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믿는 신앙 때문에 여러 가지 시련과 환란과 핍박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2절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시험3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시련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다양한 시험은 이방인들의 경멸, 동족의 약탈, 강도의 위험, 돌에 맞는 것, 옥에 갇히는 것, 거짓 형제들의 위험, 그 외의 각종 시련을 의미할 것입니다(고후 11:23-28). 베드로 사도도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벧전 1:6)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다’(10:34)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같은 각종 시련들이 초대교회 신앙인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것입니다. 그런 시련이 사방을 에워싸고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도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너희들은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시련이라 할지라도 이는 다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아래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온전히라는 단어는 최고의’, ‘모든이라는 뜻이 있기에, 여러 가지 시련이 갑자기 다가올 때라도 너희는 그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라’, 아니면 그 모든 것을 기쁘게 여기라’, 또는 영적인 기쁨으로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채찍이 당시에는 즐거워 아니보여도 나중에는 내게 유익이라고 하신 것처럼, 시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련도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아도 나중에는 반드시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현재의 시련과 시험을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세상의 모든 고난을 영적인 견지에서 파악한 후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 히브리서 11:26에서 히브리서 기자도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제물로 여겼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고난은 큰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혹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겨울에도 봄날처럼 즐겁게 노래 부를 수 있는 새와 같다.” 성도들은 아무리 춥고 고난이 와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10:34)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모한 핍박자들에 의해 강탈을 당하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였지만 그들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 환란 가운데서도 기쁨이 흘러 넘쳤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란과 시련이라는 단어를 슬픔과 연결시켜 놓지만 기독교인들은 반대로 기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시련과 환란과 핍박이 와도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신앙을 포기하지 말고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고 하셨습니다. 신자가 고난 중에도 기뻐해야 할 이유가 1)그것이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죄를 지은 결과로 온 시련과 고난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2)그것의 결과로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한 것처럼 많은 시련은 인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니다. 결국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니다.

 

바울은 로마서 5:3에서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그런 반면 야고보는 본문에서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환란이나 야고보가 말하는 시련은 비슷한 의미이며 이것들은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실 고난과 시련은 오히려 불평 불만의 이유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인데,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련과 고난과 환란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악인에게 있어서 모든 상황은 올무가 될 수 있다. 좀 잘 되면 타락할 수 있고 좀 안되면 낙담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잘 될 때는 감사가 되고 안 될 때는 인내를 배우게 된다.’ 나무나 재산을 태워 버리는 불이 금이나 은을 재련하는 데도 이용이 되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고난과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여 입증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내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6)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의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는 말은 누구든지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많은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마지막 4절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의 온전히는 인내가 충분히 발휘될 때까지, 더 이상 인내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라는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장기간 여러 가지 고난을 끝까지 참으면 그것을 온전한 인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온전은 시간과 정도의 의미가 다 포함된 낱말입니다. 고난의 시간과 고난의 정도도 아무리 강하게 닥쳐와도 결연히 참아내는 것을 인내를 온전히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에게서 이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욥은 처음 고난을 닥쳐왔습니다. 욥의 자녀들과 재산을 다 잃고 맙니다. 나중에는 더 심한 고난이 닥쳐 왔습니다. 그의 몸을 쳐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의 몸을 긁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욥은 온유하고 잠잠한 심정으로 그 모든 고난을 참아 냈습니다. 그 이후로도 아내의 배신과 친구들의 책망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도의 시련과 고난이 다가왔을 때 그 때 그 때마다 인내가 충분히 발휘 될 때까지 참았던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일반 은사 위에 인내의 은사를 더하여 좀 더 온전하고 구비하여 합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큰 배들이 깊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면 분명 항해사가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잔잔할 때도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 하지만 폭풍우 속에서도 어떻게 안전하게 배를 항해해야 하는지 그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먼 바다를 지날때면 그 날의 기후에 따라 다르고 바다의 상황에 따라서 또 다르기 때문에 그때 그때마다의 폭풍우 대처 방법을 경험적으로 알아야 훌륭한 항해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저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인내함으로 잘 견디어 내야 부족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시련을 잘 견딘 사람이 또 다른 고난에도 넘어지지 않고 잘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욥도 욥기 13:15에서 만일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를 의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극단적인 고난이 닥쳐와도 좌절하거나 불평하지 않겠다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시련도 참아야 온전한 인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내자가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성경 몇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먼저 베드로전서 1:7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불로 재련된 금보다도 더 귀하여 주님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대표 주자 욥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고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스가랴 선지자도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13:9)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은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연단을 받아 인내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엄숙한 심판의 날에 하나님은 온 세상 앞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그들의 머리에 인내의 면류관을 씌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시련과 환난 가운데 두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유대에서 출발하여 넓은 아시아와 유럽 일대로 흩어져서 신앙 생활하는 자들을 야고보라는 당신의 종을 통하여 말씀으로 위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양한 시련과 환란을 당하고 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위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자기들은 지금 믿는 것 때문에, 신앙을 가졌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주위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다양한 핍박과 환란과 착취와 억압과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고 이런 것 때문에 먹고 살기도 힘들고 정말 비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련과 고난의 연속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에게 여러 가지 시험이 있더라도 인내하라고 하셨고 그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된다는 위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고난과 시련 중에 믿음을 지키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와 힘과 용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따라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더라도 초대교회 신자들이 인내한 것처럼 끝까지 인내함으로 또 다른 시련과 고난이 와도 인내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신자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23 12 24 목자들의 경배 운영자 2023.12.26 0 393
다음글 2023 12 10 예수님의 오래참으심 운영자 2023.12.10 0 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