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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2 10 예수님의 오래참으심 이정현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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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12:1-3절 개역개정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1210일 히12:1-3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

 

지난 주일에는 원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성경 여러 군데에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곳의 시편에서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인하여 나를 멸망치 말게 하여 달라’(15:15)는 기도도 있고 또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15:5), ‘광야에서 약 40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신 하나님’(13:8)이라는 표현도 있고 심지어 그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2:4)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분’(3:22)이라고 진술하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지 2천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죄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선택자들이 다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들에 근거하여 볼 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인내하심은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 중의 하나임을 알게 됩니다.

 

인내또는 오래 참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휘포모네로 고난에 직면하여 낙심치 않고 굳건하게 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욥의 인내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낱말입니다(5:11). 욥은 여러 가지 환난을 만났으나 끝까지 그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어려운 고난 중에도 잘 견디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의 낱말(마크로두미아)은 갈라디아서에 나온 성령의 네 번째 열매인 인내가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고, 야고보서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오랜 시간을 견딘다는 뜻으로 농부가 추수 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조급해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으면서 정해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인내라는 말은 환란과 핍박 중에서 잘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할 때도 사용이 되고 무엇인가의 열매를 기다리며 조급해 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에도 인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신약 성경의 몇 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의 인내하심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3:6-9에 있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입니다.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본문에 포도원을 만든 주인이 나오고 그곳에 심어 놓은 무화과 나무가 있고 또 이 포도원을 관리하는 포도원지기가 등장합니다. 여기서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음으로 주인이 3년이나 열매를 얻지 못하였으니 땅만 버리지 말고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랬을 때 포도원지기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십시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래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 찍어 버리십시오.’ 이것은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위한 주님의 중보기도인 것입니다. 좀 더 참아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조치를 하고 좀 더 기다려 볼 터이니 주인님도 좀 더 기다려 달라는 간청인 것입니다. 과원지기 예수님의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나무를 찍어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참고 더 기다리시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인 우리가 열매가 없음에도 살고있는 것은 주님의 인내하심의 중보기도 덕분인 것입니다. 열매 없는 쪽쪽 주님이 우리를 자르셨다면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의 덕분에 그래도 이 자리에서 죄송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약한 믿음으로도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금년에도 참아 달라는 주님의 간청 덕분인 것입니다.

 

다음은 누가복음 22:47 이하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친 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시기까지 엎드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눈물과 통곡으로 자기의 소원을 아버지께 아뢴 것입니다. 기도를 다 마쳤을 때, 가룟 유다가 앞장서고 군병들이 검과 몽치를 들고 들이닥쳤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베드로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이것이 실수가 아니었다면 베드로의 칼 솜씨는 대단했다고 봅니다. 정확하게 오른쪽 귀를 짤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이때 주님께 그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셨습니다’(22:51).

 

주님이 제자들에게 한 것으로 볼 때,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이 잡히는 것을 허락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칼로 맞서지 말고 내가 저들에게 잡히는 것을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원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데 이것을 가로 막지 말고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오늘의 본문입니다. 히브리서 12:1-3입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운동 경기장을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엄청나게 많은 경기 관람자들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의 증인은 단순히 수동적인 관람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진리를 증거하고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결국 수없이 많은 관람자들이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된 신앙의 선배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믿음으로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충성을 다한 자들이었습니다. 저자가 이러한 증인들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수신자들에게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인내하며 최선을 다하여 경주할 것을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지금도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의 예배 때에 같이 참여하여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박수를 보내며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도 그렇고 힘들고 지쳐 쓰러져 있을 때도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격려하고 박수를 보내고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당시 흩어진 성도들에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경주자는 두 가지릍 벗어버려야 합니다. 경기에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은 경기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체중과 기타 모든 장애물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한다면 신앙의 경주를 하매 있어서 방해가 되는 부를 사랑하는 것, 세상적인 관심사나 자만에 빠져 있는 것 혹은 세상에 애착하는 것 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무거운 것들을 과감하게 벗어던져야 경기를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무거운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어떻게 경주를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장애물들은 벗어 던져야 신앙의 경주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죄를 말하기보다는 죄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연약함과 각종 죄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온갖 죄악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죄악들은 달리기 하는 우리에게 달라붙어서 우리를 얽어매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우리를 짓눌러 죄악의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라 할지라도 가볍게 취급하지 말고 철저하게 회개하여 깨끗이 씻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경주를 하되 고난과 환란과 핍박을 인내하며 경주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앞선 허다한 증인들이 결승점에 도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바라는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경주해야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2-3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주의 목표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예수님을 믿음의 주와 또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주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앞 절에서 언급된 허다한 증인들보다 더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으며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1:5, Bruce). 이런 의미에서 그를 믿음의 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케 하시는 이는 예수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 그 믿음을 온전히 실행한 자임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온전히 행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 두 가지 언급에서, 그리스도는 믿음을 우선적으로 행한자이며 동시에 믿음을 완전히 성취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가 바로 그런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목표로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표와 방향은 속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와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 예수만을 바라보며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힘써 달려가야 합니다. 중간에 쉬어서도 안되고 방향을 바꾸어서도 안됩니다.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멈추어서도 안됩니다. 인내하며 힘써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를 해야합니다.

다음의 말씀이 오늘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기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주님의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덮쳐서 잡아갔습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그의 머리에 씌었습니다. 그리고 군병들이 희롱하며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쳤습니다. 홍포를 벗기고 다시 그의 옷을 입혀서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며 몇 번이나 쓰러지셨습니다. 드디어 양손 양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십자가 높이 달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많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강도들 조차도 욕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지나가던 자들도 그를 모욕하였습니다. 높은 유대 종교인들도 희롱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너를 믿겠다고 얘기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장 6시간 동안 인간들에 의해서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욕을 당하시고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그처럼 기도하셨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잠자던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40일 동안 당신의 부활체를 보이시며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셨고 그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만국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는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모든 고난과 수모와 멸시를 다 감내하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앞으로 다가올 즐거움 즉,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구원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그 영광스러움과 즐거움을 위해 당시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하신 인내하심입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그분의 인내하심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인내하심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마침내 그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제 저자는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제시함으로 고난 당하는 수신자 공동체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는 단적으로 십자가를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므로 너희들도 고난을 당하나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대항하며 직접 십자가에 못 박았던 대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시지 아니하시고 참으셨던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살라는 권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참고 인내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주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내하심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의 증언도 들어보겠습니다. 이 베드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으로부터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을 들었던 자입니다. 베드로후서 3:9입니다.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성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앞 절의 시간 개념보다 진보된 설명입니다. 여기의 어떤이는 주의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롱자들(3) 뿐만 아니라 기롱자들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악한 영향을 받고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주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더디 성취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디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참으시는 것입니다. ‘참으심은 피조물을 향해 세워놓은 계획에 대해서 실행하시는 신실한 속성과 더불어 죄인들을 향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대표적인 속성입니다. 주의 재림의 지연은 믿음 없는 자들이 보는 것과 같은 주님의 태만이나 능력의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대상은 전 인류를 향한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분명히 본문에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기롱하고 재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미혹되어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해답입니다. 그것은 회개하여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기를 원하는 대상에 대하여 혹자는 이미 선택받은 자들 중에서 아직 회개치 않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 타락한 모든 인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인류의 보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향해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연이 인류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주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은 모두가 회개하여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궁한 긍휼과 자비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들 중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몇일이라도 좀 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범 우주적 종말이 오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을 다 모으시기 위함입니다.

˃

이어서 사도바울도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6입니다.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긍휼을 입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주님이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의 긍휼은 그의 오래 참으심에서 나옵니다.

 

여기의 먼저는 순서상 첫번째를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 자신은 미래의 신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의 첫번째 대상으로서 본보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의 모든 것에 오래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바울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의 긍휼하심을 입은 것은 후대에 믿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라는 말은 실례, 본보기라는 뜻입니다. 이는 바울이 예수께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바로 그 죄인들의 견본이라는 말입니다(벧후 2:6).

 

정리하면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주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긍휼을 입은 이유는 그리스도의 오래참으심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인내가 목적하는 바는 바울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본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바로 그 죄인들의 견본이었던 것입니다.

 

결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귀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1)예수님은 십자가로 인한 수치, 혹은 불명예를 무시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겪는 부끄러움과 야유와 조롱과 멸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무시해 버렸던 것입니다. 다른 범죄자들에게는 십자가가 분명 치욕과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지만 주님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이 모든 치욕과 멸시와 조롱을 무시해 버리신 것입니다.

 

2)그리스도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는 극한 고통의 현장이었고 불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앞에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그는 일시적인 수치나 모욕 따위는 무시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쁨은 자신이 누리게 될 하나님 우편에 앉는 것이며 또한 죄 아래 있는 인생들이 구원 얻는 것을 보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의 승귀라는 궁극적인 즐거움을 실현하고자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신 것입니다.

 

3)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참으사 결국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치욕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승귀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앉으신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하여 앉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영원토록 그 자리에서 세상을 통치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중보하실 것입니다. 종말이 되면 모든 성도들은 그 이름 앞에 모여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모든 성도들의 신앙 경주의 결승점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사실을 분명히 안다면 어떠한 시련과 시험 속에서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인내하며 이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 145

기도 제목/ 주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인내하며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잘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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