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9 행함으로 네 믿음을 보이라 | 이정현 목사 | 2023-10-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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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야고보서2:14-26절 개역개정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3년 10월 29일 약 2:14-26, 행함으로 네 믿음을 보이라. 올해의 교회 표어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라’입니다. 이 표어에 따라 매월마다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1월에는 ‘사랑’, 2월에는 ‘겸손’, 3월에는 ‘절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4월에는 ‘온유와 순종’, 5월에는 ‘진실과 신실함’, 6월에는 ‘결단성과 책임’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7월에는 ‘경청’, 8월에는 ‘용서’, 9월에는 ‘자원 선용과 배려’, 이번 달에는 ‘분별과 후함’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주제가 ‘감사’와 ‘인내’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의 성품인데, 우리도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닮아서 살아감으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자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 것으로 끝내지 말고 이제 듣고 은혜 받은대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듣고 잊어버리거나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고 결코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로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닮은 삶을 살자는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신앙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듣는 것으로 끝나고 주님의 성품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도 결코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믿음과 행함, 행함과 믿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말씀과 앞으로 남은 두 주제를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에 주의 하시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후함이라는 주제로 설교할 계획이 잡혀 있지만 주제를 바꾸어 설교하는 것은 지금이 행함과 실천을 강조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경청하시므로 깨닫고 은혜받아서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실천하고 행함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듭났지만 변화되지 않은 믿음은 피상적인 것이며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으로 결국 행함 없는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사용한 ‘행함이 있는 믿음’은 바울이 주장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켜서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복음 안에서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드러내고 동시에 복음 안에서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뒷부분에 가서 좀 더 비교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여기서 간단히 기억하실 것은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켜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게 아니고 오로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이고 거기에 비해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비교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예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런 논리적인 진술을 하면서 야고보는 단호하게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실된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나야 하고 행함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야고보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요, 헛된 믿음이라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은 죽은 나무와 같이 아무런 힘이나 능력이 없어서 외부적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꽃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 시키지 못합니다. 야고보는 이제 좀 더 적극적이며 저돌적으로 ‘너와 나를’ 대조시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18). 당시 흩어져 살아가는 기독교인들 중에 믿음과 행위, 행위와 믿음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논리로 믿음과 행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이 가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믿음이 있느냐?’ ‘나는 행함이 있다’라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여 설명하는 자에게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는 호된 질책입니다.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일터이니 너는 네 믿음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행함과 믿음의 분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온 열매이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하여 나타날 수 없으며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함이라는 결과가 입증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입술로써 고백만 한다고 해서 그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을 통하여 행함의 열매를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반대자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담대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입술로써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를 증거하겠다는 것으로서 행함이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임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다시 한번 더 19절을 통하여 믿음이 있다고 말로만 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
그러면서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20)고 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며 그런 사람은 헛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헛것은 속이 텅빈 사람과 같다는 뜻이고 또는 곡식이 전혀 없는 땅을 말하고 또한 노예가 일하지 않아서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수고하지 않아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제 21절부터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두 사람의 예를 설명합니다. 우선 21-24절까지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었고,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요 8:53, 행 7:2, 롬 4:1).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 실제적인 행함으로 그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롭다함은 행함으로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비로소 객관적으로 선포가 된 것입니다(창 22:1-14). 결국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22). 이 구절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이 불가분리의 근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오직 행함만이 아니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며, 반대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올바른 행함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역사하며 믿음의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가 행함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도 행함으로 온전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행함이 나타날 때 믿음은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창세기 15:6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의롭게 된 그는 창세기 22장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이 행위는 곧 믿음을 전제로 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의 주장과 바울의 주장은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서로 다른 측면 즉, 행함과 믿음의 측면을 각각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세기 22:1-14절은 창세기 15:6을 응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행함으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믿음과 행함을 통해서 ‘의’로 여김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깊이 교제를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친밀한 교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숨기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창 18:17). 마치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비밀을 안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셨던 것과 일맥 상통한 말씀입니다(요 15:15).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함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드디어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전체적인 결론을 맺기를 진정한 믿음이란 정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반응인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즉,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순종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만 아니니라’ 또한 아브라함처럼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서 2:8-9에서 주장한 것과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주장은 진실된 믿음으로 인하여 행함이 산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22절), 바울 또한 우리의 구원이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이 있는 자는 행함을 무시하지 않는 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코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만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 율법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말하였고(롬 3:20,28)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행함과 믿음은 별개라고 주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동일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바울과 야고보를 오해할 수 있는 성경 두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의 로마서 4.2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그리고 야고보 2.21의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두 구절의 말씀만 놓고 보면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상반된 구원의 교리를 전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서로 갈등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차일 뿐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행위의 시점이 구원받기 이전의 행위를 말하지만’ 야고보는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행위의 시점이 구원받은 이후의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구원의 근원으로서의 행위가 아님을 강조하는’ 반면 야고보는 ‘진실한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할 행위를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구원을 위해 행위가 하는 역할은 없다’는 것에 방점이 있지만 야고보는 ‘진실한 믿음에 근거한 행위’에 방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본문의 야고보는 참된 믿음은 그의 믿음이 행위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배제하고 행위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으로 바울과 갈등이 있거나 서로 상반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지금까지 몇 구절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과 행함을 분리할 수 없다,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어서 25절을 통해서는 기생 라합을 근거로 또한 이 사실을 주장합니다.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은 기생이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야고보가 라합을 예로 든 것은 아마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한정된 사회 계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믿음에 근거한(수 2:8-13; 히 11:31) 행함이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자들을 도피시킨 것은 신실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제로 그녀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자신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친척과 더불어 구원을 받았으며(수 6:23),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으며(마 1:1, 5-6) 그래서 후대에 신앙의 모범적인 인물로 기록되었습니다(히 11:31). 야고보의 이러한 주장은 그녀의 과거 생활이나 거짓말했던 것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녀의 믿음에 의한 행위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결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적인 믿음에 불과하고 말로만 주장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믿음입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한문으로 ‘이행득의’입니다. 믿는다고 한다면 반드시 행함이 따라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됩니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으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 10개월 동안 들었던 매월의 주제를 기억하며 이제 하나님을 이런 성품의 소유자로 믿는다면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할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그 믿음으로 증명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의 그 성품을 닮아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 인격이 주님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망의 식구들은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처럼 행함이 있는 온전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의 자리에 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 기도 제목/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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