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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9 24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이게 한 배려 이정현 목사 202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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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5:31-41절 개역개정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924일 마 25:31-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배려

 

하나님은 배려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배려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가운데 가장 큰 역사는 창조와 구속의 역사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중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구속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 다 그 대상은 우리이며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은 곧 인간을 그처럼 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배려하셔서 이 천지를 만드셨으며 그것을 맡기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공기와 비와 햇빛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곧 죄악된 인간을 배려하여 그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주신 사건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없이는 우리가 이땅에 살 수도 없고 또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때문입니다.

 

오늘도 배려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배려의 주님이실 뿐만아니라 배려를 가르쳐 주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실제로 배려하신 분이시고 배려를 가르쳐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배려를 하려면 먼저 상대편에게 마음을 쓰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보살피고 도와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려는 마음을 써서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본문이 들어있는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1)열처녀 비유, 2)달란트 비유, 3)양과 염소를 가르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세 가지 다 천국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를 통해서는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니까 늘 깨어서 준비하라는 말씀을 줍니다. 달란트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 때, 항상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세 번째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오실는지 분명한 때는 알지 못하나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주님의 재림은 분명 영광의 재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데, 그 천사들은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넣게 될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오늘의 본문을 네 문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재림과 민족들의 분리에 대한 말씀입니다(31-33).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셔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서 세세토록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서는 일찍 죽임을 당한 자 같은 어린 양에게 존귀와 권세와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리는 부분을 엿볼 수 있습니다(5:12).

 

주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을 그 앞에 다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이사야 66:18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라고 말씀하셨고 요엘 3:2에도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에서 그들을 심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날에 만국을, 모든 민족을 다 모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그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는 한 사람도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둘로 가르는 것입니다. 각각을 분명히 구분하실 것입니다. 마치 알곡과 가라지를 가르듯이, 또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구분하듯이 주님이 그 작업을 하실 것입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데 정확하게, 한 번 구분은 영원한 구분이 되도록 확실히 가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이 작업에 한 치의 실수도 없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왼쪽에 갈 놈이 오른쪽으로 가거나 그 반대로 오른쪽에 갈 양이 염소 편에 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2. 오른쪽에 있는 양들이 받을 상급에 관한 말씀입니다(34-40).

 

이제 주어가 목자에게서 임금()으로 바뀌었습니다. 임금이 양들에게(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선언을 하십니다.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라고 하면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곧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복 받을 자입니까? 곧 내 아버지로부터 복 받을 자들입니다. 또 누가 창세 전부터 그 나라를 준비하셨습니까? 곧 내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아버지 하나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복을 준비하셨으며 그들에게 그 나라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신 배경이나 이유가 무엇입니까?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6가지의 때를 말씀하시는데,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입니다. 여섯 가지 모든 경우 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비참할 때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고통을 전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경우에 처하였을 때 오른쪽에 있는 너희들이 나를 도와주었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였을 때,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위로해 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고 필요를 공급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고난과 고통 중에 있는 주님을 배려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통하여 너희, 곧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 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의인들이 이렇게 되묻습니다. 임금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37절에서 39절까지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주여 언제 우리가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입니다. 언제 우리가 음식을 대접했으며 언제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찾아가서 뵈었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을 배려해 드렸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뵈었나이까? 자기들은 주님께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언제 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선행을 다 잊어버린 듯 말을 한 것입니다. 주님 언제 우리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배려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임금이 “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과 본인을 동일시 하시므로,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들 중 하나에게 한 것이 곧 그분께 한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0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 42절에서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를 영접하여 대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한 것이고 나를 영접한 것은 곧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을 주어도 결코 그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는 일을 하다가 그날에도 그런 일을 하기 위하여 다메섹 도상으로 올라가다가 밝은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성도들과 주님은 자신과 동일시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의미로 본문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푼 것은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를 배려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왼쪽에 있는 염소들이 받을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41-45)

 

이제 주님이 대상을 바꾸어 다른 편을 향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오른쪽에 있는 양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왼편에 있는 자들을 향해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의 이 선언과 명령은 소름끼칠 정도로 섬듯한 내용입니다.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임금의 왼편에 있는 자들은 복 받은 자들이 아니라 저주를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을 떠나야 할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는 무시무시한데, 마귀와 귀신들을 위해 마련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한 번 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영원한 지옥이요 불 못이며 무저갱입니다. 이 불은 타서 죽지도 않는 것이며 영원히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곳입니다. 임금의 왼편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다 이곳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역시 임금의 왼편에 있는 자들이 이런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주리고 어렵고 힘들고 아프고 괴로울 때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42-43). 그들은 물질적인 필요에 대한 자비의 행위도 행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궁핍한 자들에 대해서도 어떠한 자선 행위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자비와 사랑과 선행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돌아보아 섬기지 않았고 조금의 배려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마음과는 정 반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임금의 이야기를 들었던 왼편에 있는 자들이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44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들은 한 번도 주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알지도 못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뵌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에게 선행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이들의 말은 행한 것이 없으면서도 선행을 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나온 임금의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주님을 위해 선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았다고 겸손해 하였지만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정반대로 주님을 위해 선행을 전혀 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행한 양 교만한 태도로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은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곧 심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그들에게 마지막 결론을 내려주셨습니다.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여기서도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것은 나에게 한 것이지만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은 나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자에게 작게 배려한 것도 주님이 기억하셔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지만,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배려하지 못한 자에게는 무시무시한 심판을 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4. 심판과 상급에 대한 말씀입니다(46).

 

이 비유의 결론이자 본 장 전체 비유의 결론이기도 한 46절 말씀입니다.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임금의 왼편에 있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자비와 사랑과 배려를 하지 않은 자는 영벌에 처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세심하게 배려한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라”(12:2)고 하신 것처럼 양은 영생에 염소는 영벌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에 대한 바울의 배려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19-22). 바울은 모든 사람 즉, 유대인, 헬라인, 이방인, 약한 자들에게 여러 모습으로 배려하였는데 그 배려의 목적은 모쪼록 그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0장에 가서 같은 유의 말씀을 이어갑니다.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모든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배려하는 삶을 살아서 모쪼록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에게 하듯 이웃에게 하고 이웃에게 하듯 주님에게 해야 합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곧 주님을 배려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씀을 근거로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배려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식사를 할 때, 화장실을 사용할 때, 자동차를 탈 때에도 서로 배려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층간 소음도 조금만 배려하면 다툼의 소지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영국 신사가 아니라 부인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예의 없는 아들로 키웠다는 얘기...

저는 개인적으로 부인의 변기 청소를 배려해서 항상 앉아서 소변을 봅니다.

 

가정에서 뿐만아니라 교회에서도 서로 배려함이 필요합니다. 주차를 하거나 엘리베이트를 타거나 여름에 시원한 자리에 앉거나 교회에서 무슨 선물을 줄 때에 서로 좀 배려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 드릴 때도 옆사람이 은혜 받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언행을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사회에서도 이웃들에게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트를 탈 때나 주차를 할 때도 남을 배려했으면 좋겠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다른 운전자에게 배려해 보시고, 지나가는 행인들도 먼저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흥시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일에 대한 영상...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나그네들 헐벗고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 마음을 쓰고 그들을 보살피고 도와줄 수 있는 것 즉, 배려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 선행이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행은 구원을 낳지 않으며, 선행은 오직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렇게 삶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임금님의 오른편에 서는 자들이 되므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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