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목사설교

  • 홈 >
  • 예배 · 설교 >
  • 이정현목사설교
이정현목사설교
2023 9 10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정현 목사 2023-09-10
  • 추천 0
  • 댓글 0
  • 조회 342

http://isomang.net/bbs/bbsView/13/6294635

[성경본문] 누가복음10:25-37절 개역개정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910일 눅 10:25-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들을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손수 창조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한 쌍의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들 부부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의 잘 관리하고 사용하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방법대로 자연 만물의 자원을 선용하라고 맡겨 주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몸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우리의 몸과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자연 만물을 우리의 것이라 주장할 수 없고 단지 하나님의 것을 일시적으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만물도 사명감을 가지고 잘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고 더더욱 우리의 몸도 잘 관리하여 건강을 유지하여 몸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지 말고 의의 병기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우리와 관계하여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동안만 잘 사용하고 관리하고 유지 발전시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지구를 잘 관리하지 못하여 기후 위기가 왔습니다. 세계가 2050년까지 탄소 중립시대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벌써부터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로 강력한 태풍이 오고, 자동차도 바람에 날아가는 초강력 허리케인이 불고, 호우, 폭설, 폭염도 예전같지 않고요, 지진, 지구 온난화 문제도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연만물을 우리가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결과들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름 모를 각종 질병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위협하는 전염병은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아무도 예측 못하고 있습니다. 대유행하는 전염병이 5-6년 주기로 한 번 찾아온다고 하니까 늦어도 2025년이나 26년에 또 한번 찾아올 것 같습니다, 부도덕한 성 생활로 오는 질병들도 부쩍 많아졌습니다. 동성애의 폐단으로 AIDS와 원숭이 두창 같은 질병이 생기고, 수간으로 인하여 생기는 질병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전보다 더 잘 먹고 더 잘살고 환경과 여건이 더 좋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질병은 더 많아졌고 그것으로 인하여 불안과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몸과 시간과 물질을 잘 못 사용하는 데서 오는 고통과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경우들을 볼 때 하나님은 자원 선용을 말씀하시고 인간들에게 자원 선용을 명령하시는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지구와 인간의 주인은?-

신약의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자원 선용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심으로 땅에 쌓아둔 재물에는 좀과 동록이 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52어 이후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6:12-13).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작은 도시락이라는 자원을 귀하게 사용하셔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을 뿐만아니라 남은 것을 거두어서 자원이 낭비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것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자비를 베푸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 더하여 주님은 분명 자원을 선용하시는 분이시고 또한 자원 선용을 지시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0장의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흔히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사이는 좀 더 정확하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선한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없고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제목을 붙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해석을 하고 마지막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과 본 주제(자원 선용)와 연결시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합니다. 율법사를 마가복음에서는 서기관이라고 했는데(12:28) 이 직분은 같은 직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직분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는 율법의 전문가로서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유대인들보다 율법에 대하여 잘 아는 율법 선생이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예수님이 남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율법에 대하여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지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종교 지도자가 질문을 통하여 테스트 해 보는 것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 이 질문에 예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질문자가 율법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율법의 내용으로 답하시기 위하여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지를 되물으신 것입니다. 당시 율법사들은 모세 오경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경문을 손목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녔는데, 아마 예수님은 이 경문을 가리키며 여기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 율법사는 서슴없이 대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 이렇게 대답한 것은 율법에서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유대인들과 율법사들은 어릴 때부터 외우고 있는 쉐마 구절입니다.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이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네가 암송하고 있는 그 말씀대로 행하여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암송한다고 사는 게 아니라 말씀을 지켜야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이때 갑자기 율법사가 말꼬리를 잡고 다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 중에 하나님은 알겠는데,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게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질문에 근거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께서는 율법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의 개념 속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질문에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의 거리는 약 36km 정도 되는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는 암석들이 많아서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고 합니다. 제롬(Jerome)이라는 학자도 A.D. 4세기 말까지도 그 길에는 강도 떼들이 횡행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잘 알려진 이 길을 언급하면서 이 길에서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고 하신 것입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물건만 빼앗은 게 아니라 옷까지 홀딱 벗겼고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을 작정을 한 것입니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때 한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길을 지나가는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날에도 그는 성전에서 제사장의 의무를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이 분명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지만 의도적으로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도피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제사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Marshall)이거나 2)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21:1-3)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사 여부를 획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것으로 미루어 제사장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18:1-32) 용납될 수 없는 처사였습니다.

 

다음에는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된 지파였습니다(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 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세 번째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에 그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세 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순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족이라고 생각하여 증오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천민 취급, 개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갔습니다. 이것이 이웃을 위한 자원 선용의 첫 번째 단계이지요.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고 그를 피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대개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식히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른 후 싸매어 주었습니다. 이 여행자가 비상시를 대비해 붕대를 가지고 다녔다면 다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의 옷이라도 찢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응급조치를 취한 후에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탈진한 환자를 자신의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간 사마리아인은 계속해서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책임있게 돌보았다는 말입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었습니다. 여기의 이튿날은 시리아어 시내역본(Syraic Sinaitic)에는 그 날 새벽에’(at dawn of the day)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 다음날에 새벽 일찍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일찍 떠났다는 것은 그 여행객이 결코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할 일이 없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이 아니라 사실 그는 새벽에 일찍 떠나야 할 만큼 바쁜 사람이었다는 거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데나리온 둘은 노동자 2일분의 노동댓가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떤 번역본에서는 은 두냥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이 돈으로 그 사람이 몇 주일을 숙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돈을 이 사람을 위하여 주막 주인에게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다 갚겠다고 말합니다. ‘갚겠다는 이 말 속에서 그는 곤경에 처한 이 사람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그의 마음과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일시적이거나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완전하게 책임 의식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성도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기의 사마리아 사람도 그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 지나갔던 두 명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이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피하여 지나가지도 아니했습니다. 한번 보고 불쌍하다고 하고 지나치지도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것으로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걸어가지만 상처 입은 사람을 짐승에 태어 안전한 주막까지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경비를 지불 했고 추가적인 경비까지도 자기가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이 그 율법사를 향하여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감히 유대인 종교 지도자였던 이 사람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은 못하고 그냥 자비를 베푼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이웃 개념 속에는 이방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웃의 범위를 제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비유를 통하여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점을 파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37). 이 말씀을 들은 율법사는 지금 당장 가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만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선용해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처럼 그냥 스쳐 지나가면 안됩니다.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고 하셨음으로 지금 가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호주머니를 열어야 합니다. 자기 호주머니의 자원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기꺼이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같은 중심 사상 뿐만아니라 여기에는 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자원을 선용해야 한다는 점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 내용과 연결되어 자원 선용이라는 주제도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라는 세리장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부자였다고 했고 키가 작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사회적인 장점도 있었고 또한 신체적인 단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더구나 그는 세리장이었기 때문에 자기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항상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이 동네로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뵙고 싶은 생각에 돌감람나무(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그 밑으로 지나가시다가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던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이때 삭개오가 주님에게 유명한 신앙고백적 선언을 합니다. “8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두 가지를 하겠다고 했는데 먼저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삭개오가 어느 정도 부자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재산의 절반은 상당한 금액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금액을 떠나서 이런 결정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주를 만나고 주를 영접하고 주를 믿고 난 후 소유의 절반을 나누어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대단한 자원 선용을 결정한 것입니다.

 

이어서 만일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세리장이니까 남의 것을 사취한 것이나 뇌물이나 과도한 징수와 같은 일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물질을 취하였다면 내가 4배로 배상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배상법에 보면 전체 액수와 그 액수의 1/5을 더하여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5:16, 5:7). 만약 내가 1000원의 손해를 입혔으면 1000+200=1200원을 배상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1000원의 손해를 입혔으니 4000원으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는 데 율법의 요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배상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같은 행동은 외적인 행동으로 내적인 변화를 증명하는 셈입니다. 그의 변화된 행동으로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들어내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육신의 정욕과 세상적 쾌락을 추구하며 물질을 사용했다면 이제는 죄악된 마음으로 벌어들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배상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율법의 요구보다 더 많은 금액으로 배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같은 각오의 말을 들으신 주님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9)고 선언하셨습니다. 사실 삭개오는 그동안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조롱과 멸시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주님이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고 삭개오도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시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이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시 한번 더 밝혀주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 이 말씀 가운데서 삭개오가 같은 세리장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과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도 잃어버린 자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잃어버린 자(삭개오와 같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십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부유한 죄인을 찾아가셔서 그를 회개와 구원으로 부르셨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인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는 것(19:10)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부자 관원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물으며 예수님께 나왔지만 자신의 돈과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지만(18:18-23) 삭개오는 자신의 과거 악한 삶을 청산하고 지금 자기 수중에 있는 물질을 반 이상이나 이웃을 위해 쓰면서 물질의 청지기 정신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물질을 이렇게 쓰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흥청 망청 쓰고, 고급 음식을 사 먹고, 고급 낙타를 타고 다니며, 비싼 옷을 해 입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고급 저택에서 여러명의 하인을 두고 살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도 가지고 지가 쓰는데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삭개오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의 믿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 곧, 교회가 되었습니다. 삭개오의 인생관과 물질관이 바뀌었습니다. 자원을 선용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잘못한 것에 배상할 줄 알았습니다. 물질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써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론

 

예수님이 율법사의 질문을 받아서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면서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렵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상처를 싸메고 돌보고 치료해 주기 위하여 우리의 자원을 선용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여기 강도 만난 사람 주위의 세 그룹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강도입니다. 둘째는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마리아인입니다. 이 세 그룹의 물질관이 다릅니다. 강도는 네 것도 빼앗으면 내 꺼라는 물질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제 그룹은 내 꺼는 내 것이니까 내가 지킨다는 물질관입니다. 세 번째 사마리아인은 내가 가지고 있어도 당신이 필요하다면 당신을 위하여 호주머니를 열겠습니다라는 물질의 청지기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결국 물질의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어진 자원을 선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던 세리장 삭개오가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선용했습니다. 누구의 돈을 갈취한 것이 있으면 율법의 요구보다 더 많이 배상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 사람은 자기의 부함을 가지고 더 많이 구제하고 장학하고 선교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완전히 변화가 되어서 자기의 자원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마음껏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 사람이 아니라 주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소망교회의 한 귀한 멤버가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서 봉사합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 교사, 찬양 대원, 그리고 각부의 일꾼으로 봉사를 합니다. 맡은 일에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드려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시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11조 도둑질 하지 마시고 온전한 11조를 하나님께 드리되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십시오. 십일조를 도둑질 하고서야 어찌 교사라 할 수 있고 어찌 중직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도 자원을 선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물질을 악한 데 사용하거나 자기의 쾌락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데 선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입니다.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월 14,000원짜리 적금을 10년 들었는데 조금 있으면 만기라서 200만원을 탄답니다. 이것을 타면 어려운 미자립교회를 돕는데 헌금을 하시겠답니다. 혹시 이것을 타면 급하다고 쓸까 봐서, 목사님에게 미리 선포해 둔다고 전화를 주셨습니다. 미리 말을 해 두면 다른데 쓰지 않고, 어려운 미자립교회를 도울 수 있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권사님이 본인도 어려우신데, 10년을 조금 조금씩 적금 들은 것인데, 그것을 찾아서 어렵고 힘든 교회를 돕겠다고 헌금을 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구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돈을 쓰는 것이 자원을 선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명기 1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 그리하면 어떤 은혜와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냐 하며는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10).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원을 선용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풍성히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찬송/

기도 제목/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처럼, 변화 받은 삭개오처럼 주어진 자원을 선용하며 살게 하옵소서.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23 9 17 엘리사를 위한 여인의 세심한 배려 운영자 2023.09.17 0 420
다음글 2023 9 3 이들은 무엇을 위하여 자원을 사용하였는가? 운영자 2023.09.05 0 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