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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7 16 우리를 주목하시고 경청하시는 예수님 이정현 목사 20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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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0:38-42절 개역개정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716일 눅 10:38-42, 예수님의 발치에서 배우다.

 

본문의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앞에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비유가 나옵니다. 주님의 의도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고통을 당하고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그런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제한을 두지 않는 이웃사랑이 진정한 이웃사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이 본문을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본문과 앞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앞부분의 메시지는 이웃사랑을 말했다면 본문은 하나님 사랑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본문은 앞의 말씀과 짝을 이루어 사랑의 두 방향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완성에 관하여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앞 네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뒷 여섯 계명은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이것이 모든 선지자들의 강령이요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시각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본문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배운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 은혜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 동네에 사는 마르다라는 여자가 자기 집으로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여기의 한 마을은 마리아가 살고 있는 동네인데 다른 성경에 의하면 이 동네가 베다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사해 윗부분의 왼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과 사해 중간에 위치 해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지도로 확인).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영접했다고 했는데, 마르다를 일부러 한 여자라고 표현을 했고 그 여자가 소유한 집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당시 여자들은 소외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불신자, 야만인, 노예 다음으로 여자들 순으로 대접하고 천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누가가 당당한 한 여인, 즉 그녀가 자기 집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영접하더라라는 말의 목적어는 그들을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함께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마르다와 마리아의 또다른 가족이 누구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자는 바로 나사로입니다. 후에 나사로는 죽었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게 되고 또한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어 드렸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이 세 명의 가족들이 살고있는 집이었음으로 알 수 있고 본문에서는 나사로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이 들어오셨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39)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은 그 사람과 함께 공부를 하거나 그 사람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서 그의 말씀을 듣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는 랍비와 그의 제자 사이는 반드시 남자여야 합니다. 랍비도 남자 그의 제자도 남자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자는 여자 마리아였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문화나 종교적인 규율로 보아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앉아라는 단어가 수동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앉고 싶어서 앉은 것이 아니라 다른 랍비들이 허락하지 않은 랍비 예수님의 파격적인 허락하에 되었다는 점입니다. 감히 앉을 수 없는 그 자리에 주님의 허락하에 마리아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에쿠엔)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오로지 계속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데 열중하였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은 억지로, 마지 못해서 들은 것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자세로 들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 즉 듣더니’(에쿠엔)이라는 말은 다른 데 주의와 관심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매우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로 주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듣는 것은 믿음이 시작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고 더 나아가서 더 큰 믿음과 은혜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항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더 큰 믿음으로 역동적으로 삶을 살고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고 봉사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듣고 반복해서 들어야 믿음이 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마르다가 주님께 와서 이런 요구를 합니다.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다는 표현은 그녀가 지금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12명의 밥상을 차리느라 허둥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15명 정도의 식사를 마련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는데 이 말을 주님 내 동생도 나와 함께 여자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말로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지금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와 함께 부엌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입니다. 마르다가 못 마땅히 여긴 것은 자기는 지금 음식 준비하는 일에 바쁜데 마리아는 이곳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감히 예수님에게 마리에게 명하여 나를 도와 주라고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 말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바쁜 자기를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 책망이고 이런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고 마르다는 자기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마르다는 좀 무례하고 건방지게 주님에게 요청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요청을 받으신 주님이 다음과 같은 귀한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마르다야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마치 주님이 베드로를 시몬아 시몬아라고 부르셨고 바울을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셨던 것처럼 여기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부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 나사로의 가족들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계시고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처럼 마르다도 그처럼 사랑하신 것이고 특별히 이렇게 우리 일행을 영접해 준 것과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그 이름을 두 번이나 불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가 처한 상황과 상태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자인 누가도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다고 했는데 예수님도 동일하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가 분주, 염려, 근심하는 이유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음식 준비 때문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인정하셨지만 그러나 책망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시면서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실상 네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적인 일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육적인 일이지만 마리아가 내 발치에서 말씀 듣고 있는 일은 영적인 일인데 바로 이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마르다를 약간 책망하시면서 그녀의 육적인 일에서 영적인 일로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마르다의 요청을 거부하시고 오히려 마르다는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했을 때, 이 좋은 편은 어떤 편을 말할까요? 그것은 부엌에서 음식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에 집중하는 편을 말합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자기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자기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편이기 때문에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외부의 어떤 압력에 의해 방해가 된다 해도 이 자리, 말씀 듣는 자리,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 좋은 편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선 그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이웃 사랑은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면 본문을 통해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하나님 사랑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뒤의 말씀이 한 짝을 이루어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셈플을 선한 사마리아인과 마리아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인데, 마르다의 영접을 받아 그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지금 많은 음식으로 우리 일행을 대접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나의 말을 듣는 일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마르다를 약간 책망하면서 오히려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스스로 자기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이것을 선택하였으므로 마르다의 항의나 기타 다른 외압적인 것으로 인하여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마리아의 말씀 경청은 마르다의 음식 준비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하고 가치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리아가 그 좋은 자리를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좋은 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일입니다.

 

결론

 

혹자는 본문을 읽으면서 그러면 마르다가 애썼던 식당 봉사는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라고 질문합니다. 필요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중요하고 가치있는 봉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봉사보다 말씀 경청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조금 후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는데 이 시즘에서 제자로서 한마디라도 더 주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빼앗길 수 없는 더 좋은 편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9장의 성구...

 

오늘 마리아가 주의 발치에 앉아서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말씀 경청에만 집중한 것처럼 우리도 빼앗길 수 없는 좋은 편, 말씀 경청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 좋은 편을 선택하시고 이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송/

기도 제목/ 주님의 말씀 듣는 좋은 편을 선택하고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마리아처럼 살게 해 주시옵소서.

 

 

 

 

 

 

 

 

 

 

 

=====10:38
길 갈 때에...한 촌에 - '길 갈 때에'라는 모호한 표현은 장소와 시점 그리고 앞
부분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한 촌'이라는 표현 역
시 누가가 장소에 대한 정확성에 집착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개괄적인 표현이다.
'한 촌'은 요 11:112:1에 의하면 '베다니'라는 마을이며 이 마을은 예루살렘 동
쪽에 있는 감람산(the Mount of Olives)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마을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 사역한 것에
관해서는 이후에 언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13:32,33;17:11;19:28).
마르다...영접하더라 - 마르다의 자연스러운 영접과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예
수와 그들이 초면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11:5). 이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며
나사로의 동생이다(39;11:19,20;12:2,3).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살
아난 일이 있으며(11, 12)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이 있는데 그 만
큼 이들 가족은 예수와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주체로 마르다가
등장하는데 우연히도 '마르다'(* )라는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아람
어의 여성 명사이다. 성경에 그녀의 남편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으며
단지 마 26:6에 근거하여 그가 문둥이 시몬의 아내일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10:39
주의 발 아래 앉아...말씀을 듣더니 -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요 12장에서의 모
습과 병행을 이룸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도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고
(12:2) 마리아는 예수 곁에서 그에게 향유를 붓는다(12:3). 여기서 '아래 앉아'
(* , 파라카데스데이사)의 문자적 의미는 '곁에 앉다'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다(22:3). 이것은 마
리아가 마치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듯이 예수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매우
열심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는 마리아의 태도를 묘사한 '듣더니'(* , 에쿠
)가 미완료 능동태로 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 그녀는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은 채 열심히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던 것이다. 한편 마리아를 가리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의 발 아래서 그
의 말씀을 들었고(본절), 죽은 오라비를 위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고
(11:32),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에게 향유(perfume, NIV)를 부었기 때문이다(
12:3).

=====10:40
마르다는...분주한지라 - 마르다의 바쁜 모습은 그녀가 예수께 대단한 정성을 쏟았
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분주한지라'(* , 페리에스파토)'사방
에서 끌어당기다'는 의미로 그녀의 바쁜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이렇게 바쁜 마르다의 모습과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는 마
리아의 모습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그분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명하사...도와주라 하소서 - 아마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바쁘
니 와서 도와 달라고 마리아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
수의 말씀에 너무 열중인 나머지 그녀의 요청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난 마르다는 마침내 예수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마르다
의 이의 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을 것이다. (1)자신이 그렇게 바쁜데도
불구하고 전혀 자기를 도우려 하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인 책망이 있을 것이고,
(2)그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예수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있으며, (3)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자신의 판단과 행위가 가장 옳다
고 하는 확신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에 비해 자
기가 지금 얼마나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은연중 과시하려는 마르다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0:41
마르다야...염려하고 근심하나 -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부르는 이중 호격
의 사용은 예수께서 마르다의 정성스런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염려하고'(* , 메림나스)라는 표현은 '흩어지다'
'나누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 )에서 파생된 것으로 과도한 욕
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또한 '근심하나'(*
도뤼바제)'문제를 야기시키다'는 뜻으로 이것 역시 자기가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것
이다. 물론 예수께 대한 열심으로 말하면 마르다(Martha)나 마리아(Mary)가 매일반(
一般)이었다. 하지만 마르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먹을거리 보다는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119:103-105).

=====10:42
몇 가지만...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본문은 해석이 난해한 구절로서 각 사
본들에도 다양하게 표현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몇 가지''
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둘 다 음식의 가
지 수로 보는 견해.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마
르다는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바쁜 것이니만큼 음식의 가지 수
를 몇 가지로 줄이거나 또는 한가지만 하여도 족하다는 것이다. (2)전자는 물질적인
것을, 후자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접대 행위 자체보다는
영적인 것에 관해 가르쳤다는 디벨리우스의 견해에 따라 (2)의 견해(見解)가 더 타당
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예수께서 물질적인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한다.
좋은 편을...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은 거부되며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대
답이 주어진다. 예수를 섬기는 적절한 방법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물질로써가 아니
라 그분의 말씀에 동참함으로써 섬기는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여인들의 위치가 가
사 일에만 국한되지않고 여자들도 복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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