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월 9일 눅 2:40-52, 우리를 주목하시고 경청하시는 예수님
얼마 전에 “경청”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청’(聽) 자를 분석해 놓은 것을 보니, 임금 ‘왕’ 자와 귀 ‘이’자가 같이 있고, 그 옆에 열 ‘십’자와 눈 ‘목’자가 있고, 날 ‘일’자와 마음 ‘심’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풀어보면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왕이 귀를 열어 듣는 것처럼, 열 개의 눈과 한마음으로 그 사람의 말을 집중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이 경청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경청함으로 경청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장막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절기를 지켜야만 합니다(신 16:16).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남녀가 함께 절기에 참여하여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그 부모가 해마다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표현은 부모도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점과, 함께 갔던 예수님도 한 유대인으로서의 교육과 신앙지도를 잘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말씀에서 벗어나서 타락하고 위선적으로 살았지만 그 가운데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래도 율법의 의식들과 절기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에 맞추어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의 유월절과 이어지는 무교절 절기도 다 마친 것 같습니다. 유월절은 1월 14일 하루 동안 지키는 절기이고 이어서 15일부터 21일까지 1주일 동안 무교절을 지키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참석해야 하지만 다 참석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적어도 처음 2-3 정도는 많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들도 어느 정도 참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경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43)라는 말을 썼습니다. 예루살렘에 며칠 동안 계셨는지는 모르지만 절기를 보내고(아마도 유월절은 필수 참여 절기고 무교절은 필수는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14일과 15일 이틀은 참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고향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로 하룻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당시유월절에 모이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았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기 때문에 거리와 숙소 음식점은 상당히 복잡했을 것입니다. 부모들이 하룻길을 가다가-하룻길은 약 32km 정도 잡는데, 그때서야 아이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모가 예수님을 잘 살피지를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당연히 함께 있고 동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하룻길을 간 것입니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친척의 일행 중에 있을 줄로 알고 신경 쓰고 있지 않았으나 저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그가 없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그의 부모들이 찾고 있을 시간에 성전에서 최고 석학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아들이 없어진 줄 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친족들과 아는 자들 중에서 예수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까지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45절에 ‘찾으면서’(아나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줄곧 계속하여 예수의 행방을 수소문하였다는 뜻입니다. 부모들은 다급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아들 예수를 찾고 찾으며 내려 온 것입니다. 사흘 후에 부모가 예수를 성전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곳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성전에서 유대교의 선생들과 함께 앉아서 무엇인가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성전의 어디를 말할까요? 탈무드에 보면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동남부 등등이 있었는데, 이 세 곳에 각각 회당이 하나씩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개의 회당 중 랍비들은 바로 이 안뜰의 동남부에 있는 회당에서 주로 율법을 강론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당시 이곳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율법에 대하여 토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선생들은 누구를 말할까요? 당시 생존해있던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말리엘’(Gamaliel),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등으로 짐작이 됩니다. 추측해 보건대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중 적어도 한두 사람 정도는 예수님과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외경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에서는 이때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며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 등도 논의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없습니다. 아무튼 어린 예수께서 당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다’고 하셨고 그리고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대 선생들과 율법에 관한 말씀을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하셨습니다. 12살의 어린 예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시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그분이 선생들의 말에 경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 선생들의 말을 주위 깊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선생들에게 질문도 하셨는데 무엇인가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고 다 알고 있었음에도 물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여기의 ‘놀랍게 여겼다’(여시스탄토)는 말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놀라움을 나타내는 말로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선생들과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계속 반복해서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놀라움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토록 영특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과 질문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12살 어린 소녀이지만 그분은 곧 하나님이심으로 예수님의 답변은 곧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골 2:3).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지금 선생들의 말을 듣고 대답도 하는 것을 보고 모두가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드디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고 말합니다.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처음 가졌던 감정은 놀라움이었습니다. 불과 12세에 불과한 소년이 당대의 석학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그들에게도 놀라움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신비스러운 일들이나 차츰 성장하면서 보여준 특출한 지혜와 인격에 대해 남다른 경험을 한 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경험한 바 계시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적 의의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책망조로 탓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걱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속상한 감정을 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49절) 그 부모로 하여금 예수의 신분에 대해 다시금 깊이 숙고해 보게 하였을 것입니다.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이는 혈육상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하신 삼가는 투의 공손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분명히 천명하신 단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부르셨는데 이것 역시 처음 언급된 것입니다(눅 22:29, 23:46, 마 11:25, 막 14:36, 요 5:17), 이것은 자신의 신성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 밑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계신 분이고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 존재하여 계셨던 분임을 시사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집이라는 말은 ‘일’이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라는 말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일을 실천해 나가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그가 머물 자리이고 그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위하여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연히 성전에 있어야만 했던 당위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드렸지만 그 부모들은 전혀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를 못하였습니다. 과거 마리아에게 임한 예수 탄생에 관한 계시를 생각해 보면 이 구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부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그 부모는 예수님의 말씀의 그 의미를 확실히 깨달을만한 영적 수준에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본문 마지막 두 구절은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는 모습과 지혜와 키가 자라감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조금 전 예수의 모습에서는 그의 신성을 보았고 이제는 그의 인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심으로 한 가정의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으실 때까지(3:21) 18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 동생들을 보살피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막 6:3). 요셉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18년 어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요셉이 죽자, 장남인 예수가 그의 가족을 부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족들에 대한 부양 책임도 성실하게 감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12살 때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그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곳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취급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신인 양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온전히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셨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분은 유명한 당시 선생들의 말을 경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선생들의 율법 강의나 해설을 귀담아 잘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 18년이 지나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시작되는데, 그 공생애 때, 다시말해서 30살부터 33살까지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셨고 사람들의 간청이나 말에도 귀를 기울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기를 즐거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기 전에도 꼭 기도하셨지만 항상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셨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서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여러 가지 제목을 놓고 길게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이 지나갈 수만 있으면 지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다가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하며 자기의 뜻을 죽이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님의 기도 기도마다 다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어셨습니다.
이것과 아울러 예수님은 사람들의 소리(간청)에도 귀를 기울여 들어주십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 성에 들렸다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 10:46-52). 그때 길가에 앉아있던 디매오의 아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이곳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7).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으면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지 바디매오는 잠잠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48)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물로 주님은 바디매오가 길거리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어떤 상태로 앉아있고 무엇을 하는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계속 부르짖는 그의 소를 들으신 주님이 ‘그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맹인은 ‘주님이 나를 부른다’는 그 소리에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왔다’고 말합니다. 아직 몸이 나은 것도 아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나서 뛰어서 주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맹인이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원한 섞인 자기 마음의 소원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자 ‘즉시로 그가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2).
마가복음 10장의 이 말씀의 중심 내용은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어떤 모습으로 주님에게 나오든지, 주님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하며 나오면 주님은 그런자를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나오는 자는 다 치유 받고 은혜받고 회복되고 긍휼함을 얻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송하고 그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기 거지이며 맹인이었던 바디매오도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을 때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에 맞추어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소경이요 거지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도 외면하였고 오히려 시끄럽다고 구박을 주며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부르짖음에 귀를 쫑긋 세워서 그의 한 맺힌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주님도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의 아우성대는 소리와 환호하는 소리로 거지의 소리를 외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픈 마음도 있엇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복잡한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들 가운데서 유독 그 한사람의 절규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를 부르시고 그의 소원에 따라 그를 고쳐 주셔서 즉시로 보게 하셨습니다.
결론
이같은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경청을 잘하신 분이시고 공생애를 사셨을 때에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았던 분이시고 또한 그 분은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경청하고 계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찬송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여전히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근심 걱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분에게 호소하면 주님은 우리의 간청에 귀를 기울여 들으시사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거지와 맹인이었던 바디매오의 절규를 들어주셨다고 한다면 우리의 간청에 귀를 기울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하는 그 소리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신 주님이십니다. 나를 항상 주목하시고 나의 소리를 언제나 경청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주님의 경청을 배워서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소외당하는 이웃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말고 경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 주만 바라볼찌라.
기도 제목/ 우리의 작은 소리를 경청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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