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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18 기업 무를 자의 책임 이정현 목사 202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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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룻기3:7-15절 개역개정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14.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15.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618일 룻기 3:7-15, 기업 무를 자의 책임

 

6월의 주제가 결단성과 책임인데, 지난 두 주일에는 결단성에 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책임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룻기의 말씀을 근거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룻기는 사사기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기드온 사사가 재임하던 기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기드온 사사 시대에 룻과 보아스 사건이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유대 땅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굉장한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그를 가리켜 유력한 자라, 즉 부유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대 땅에 심한 기근이 있어서 그 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엘리멜렉은 자기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 동쪽 지역인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유대 땅에는 기근이 심하여 먹을 것이 없었고 이방 땅인 모압에는 양식이 풍족하였기 때문에 이주를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은 가족들을 굶길 수 없어서 가족들을 돌보기 위하여 타국으로 이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말씀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나안 땅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에 지금은 기근으로 힘들지 모르지만 반드시 복 주셔서 잘 되게 하실 것을 믿고 인내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믿음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말씀은 생각하지 않고(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형편과 상황만 고려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상황만을 생각하고 자기감정이나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의 엘리멜렉은 현재 먹고 사는 문제만 생각하여 삶의 터전을 쉽게 옮긴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이 자기의 가족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가서 그곳에서 잘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유대인으로서 엘리멜렉은 자기의 아들들을 위하여 모압 여인을 취하여 혼인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불신자들과의 잡혼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지 않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그곳에서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1:3). 몇 년 후에는 두 아들마저도 죽었습니다(1:5). 그래서 나오미와 그녀의 두 아들들에게 시집온 이방 여인 오르바와 룻만 남게 되었습니다. 불쌍한 과부 셋만 남게 된 것입니다. 유력한 가정이 10년 만에 비참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감정과 실용적 입장에서 처신했던 한 가장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대 땅의 형편이 많이 좋아져서 고국을 떠난지 10년 만에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모압에 머물 것을 적극 권유하고 새로 시집을 가고 너희들의 앞길에 하나님의 복이 있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이 권유로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자기 길로 떠났지만 첫째 며느리 룻은 결코 어머니 곁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다시 권유합니다.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1:15).

 

시어머니의 이 말을 들은 며느리 룻이 멋있게 대답을 합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16-17). 나는 끝까지 어머니를 따르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룻은 유대인이 아닌 모압 사람 이방인이었습니다. 모압인들이 주로 섬기는 신은 그모스였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을 일컬어 그모스의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는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김으로 자기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 여호와를 섬김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나오미는 룻과 함께 그해 추수 때에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오미를 알아보고 이게 나오미냐?’라고 합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즐겁다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결코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내가 풍족하게(FULL) 이곳을 떠났지만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EMPTY) 돌아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즐거운게 아니라 괴롭고 마음이 아프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어머니를 좇아 낯선 타향에 온 룻은 처음부터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는 며느리가 됩니다. 추수기이기 때문에 들판으로 이삭을 주우러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며느리가 어느 들판에 가서 곡식을 베는 자의 뒤를 따라다니며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룻기 2장을 읽어보면 가을추수 하는 들판에 여러 명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밭의 주인이 나오는데 그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그리고 곡식을 베는 자가 나옵니다. 실제적으로 가장 고되게 노동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을 다른 구절에서는 소년들이라고도 표현을 했습니다.

 

또한 이 베는 자들을 지휘하는 사환이 5절에 나타납니다. 이는 모든 노동자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는 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곡식단을 묶는 소녀들이 나옵니다(8). 그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말하면 주인, 사환, 베는 자들, 곡식단을 묶는 소녀들, 이삭을 줍는 룻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룻은 이삭을 줍는 사람들 틈에도 끼일 수 없는 이방 여성이었지만 그들 틈에 끼어서 생계를 위해 이삭을 줍는 것입니다. 이 때 마침 주인인 보아스가 이 밭을 방문하였습니다. 주인과 종들이 함께 아름다운 인사를 나눈 후에, 왠 낯모르는 소녀가 있기에 주인이 사환에게 묻는 것입니다. ‘제는 누구냐?’ 이 물음에 사환이 이 소녀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온 모압 소녀인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이삭을 줍고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보아스가 룻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딸아 너는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이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이삭 베는 자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할테니 너는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고 목이 마르면 저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

 

보아스는 처음 본 이방 여인에게 대단한 배려를 한 것입니다. 특혜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모압 여자에게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준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보아스는 룻에게 계속해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했고 남자들로부터 안전하도록 조치를 했고 마실 물까지 마음대로 먹게하였을까요? 나오미가 자기의 친척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이 여자에게 관심이 있어서일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말을 듣고 너무 감사하여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10)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보아스가 11절에서 그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2:11). 이 말은 전에 네가 시어머니를 잘 봉양한 것과 부모와 고국을 떠나 낯선 유대 땅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것이 잘 알려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내가 너를 배려하고 너에게 남다른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보아스는 네가 행한 일에 따라 하나님이 보답하실 것이고 너에게 상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12).

 

이 과찬의 말을 들은 룻이 당신의 하녀 중 하나만도 못한 나를 이처럼 위로해 주시고 마음을 기쁘게 해 주시니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룻에 대한 보아스의 배려와 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떡을 그녀에게 줍니다. 자기 곁에서 먹게 하였습니다. 볶은 곡식을 주어 배불리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곡식 베는 자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너희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고 너희들이 이삭을 조금 많이 남겨서 룻으로 하여금 많이 줍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보아스의 이 같은 배려와 은혜로 말미암아 그날 하루 만에 룻은 보리 한 에바 즉, 한말쯤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대단한 은혜와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오미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선하게 먹이신다는 사실을 10년 만에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고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가난한 자와 외국 거주인의 생계를 위하여 주인은 이삭을 남겨 두어야만 합니다(19:9-10, 24:19). 보아스와 일꾼들은 이 말씀대로 준행을 한 것이고 그 은혜를 룻과 다른 여인들이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룻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복을 받은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스를 통하여 덧입은 것입니다.

 

이제 보아스와 룻과의 관계가 더욱더 친밀해져 갑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와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부자이고 많은 일꾼들과 시녀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성품도 좋고 믿음도 좋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고 남에 대한 사랑이 풍성한 사람입니다. 룻기 2:23에 보시면 보리 추수 때 뿐만 아니라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했습니다. 1달이 넘는 기간 동안 보리와 밀 이삭을 주었으므로 이것으로 1년을 먹고 사는 데는 전혀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 룻기 39절과 12절에서 이 사람에 대하여 기업 무를 자라고 했습니다. 기업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합니다. 고엘은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1)사람이 무자하게 죽으면 그의 아내를 취하여 자식을 낳아 죽은 가문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2)부채가 많아서 남의 종으로 팔려갈 때 그 부채를 갚아 주고 그를 노예 신분에서 구출하는 것입니다. 3)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의 원한을 갚아 주는 가까운 친족을 가리켜 고엘이라고 했습니다.

 

룻기에서는 1번째에 해당되는 경우라고 봅니다. 엘리멜렉의 두 아들이 죽었음으로, 가문의 대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의 가문을 위하여 기업 무를 자(고엘)가 필요한데, 룻은 그가 보아스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보고 당신이 나의 고엘이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룻기 3:9 말씀입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이것은 룻이 보아스에게 말한 일종의 청혼요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청혼요청을 받은 보아스는 부드러운 말로 그 청을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나도 너의 기업 무를 자이기는 하지만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기 때문에 그에게 물어보아서 그 사람이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한다면 내가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하고 너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엘리멜렉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권리를 포기함으로 보아스는 자기가 룻을 맡겠다고 공적으로 선포하였고 장로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여 룻과의 결혼을 허락합니다. 장로들이 둘 사이의 혼인을 허락하면서 매우 아름다운 말로 축복을 하였습니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4:11-12).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모압의 여인인 룻이여 열매 있는 이스라엘의 모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축복하는 말임과 동시에 예언적인 말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하였고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룻기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기 마지막의 이 족보에 이어 마태복음 첫 부분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말하면서 족보를 이어가다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본문의 룻은 이방여인이었고 비참한 환경 속에 있었던 여자였고 미래가 불투명한 여자였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의 보아스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예표하는 인물이고 룻은 우리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보아스는 사랑을 베푸는 자입니다. 배려하는 분입니다. 은혜를 주는 자입니다. 도와주는 자이며 위로해 주는 자이고 기쁨을 주는 자입니다. 더더구나 기업을 무를 자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보아스는 구약의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입니다. 특히 보아스가 고엘이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의 구약적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보아스는 그리스도를 닮았으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그의 모든 경제적 문제나 모든 빚을 다 갚아 주고 그녀와 결혼을 하여 엘리멜렉 가문의 대를 이어주는 사람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진정한 기업 무를 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청산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심으로 믿음의 가문에 들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한 고엘,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해 주셨기 때문에 된, 은혜의 결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당신만이 마실 수 있는 그 잔을 마심으로 고엘의 책임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으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완수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책임을 감당하셔서 우리에게 죄 용서와 자유와 해방의 은혜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룻은 오늘날의 교회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룻은 보아스의 사랑을 지극히 받았습니다. 배려함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도움을 받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보아스로 말미암아 마음의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엘에 의해, 위로와 은혜를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와 교회는 기업 무를 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로와 은혜와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희망을 갖게 되고 기쁨과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에 의해서 룻이 돌봄과 위로와 은혜와 사랑을 받았듯이 우리의 신랑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교회도 돌봄과 위로와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속의 위험 속에 있는 사람들은 돌봄을 받으시고 고통과 아픔과 근심 걱정 중에 있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으시고 냉냉한 가슴으로 있는 분들은 사랑을 받으시고 은혜를 모르는 자들은 그 은혜로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룻이 보아스의 사랑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한없는 넓은 사랑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시며 고엘이 되십니다.

 

 

 

찬송/ 예수는 나의 힘이요(93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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