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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3 12 모든일에 절제하라 이정현 목사 202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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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7:1-9절 개역개정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312일 고전 7:1-9, 모든 일에 절제하라.

 

3월의 주제가 절제입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알맞게 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방종하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 통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을 기독교적 의미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정결하여 우리의 행위를 알맞게 조절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가 기뻐하시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우리의 행위를 알맞게 조절하는 것을 절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절제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그리고 썩지 않게 보전하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절제란 자신을 부패하여 썩지 않도록 잘 지키고 보호하는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나오는 절제라는 말은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고전 7:9). 이 말은 그 뒤에 나오는 불같이 탄다, 내적인 욕망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스스로 제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불타오르는 정욕을 제어하는 것을 절제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에는 계속하여 다양한 욕구와 욕망들이 솟아오릅니다. 음식에 대한 욕구, 무엇인가 값비싸고 좋은 물건을 갖고 싶은 욕망, 이성에 대한 욕망, 자리와 명예에 대한 욕망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것 자체를 가리켜 죄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한 욕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좋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과하거나 선을 넘게 되면 악이나 죄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이 과하게 되면 결국 비만이나 다른 병을 앓게 됨으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값비싼 물건에 대한 욕망이 과하면 사치와 낭비와 과시를 넘어 교만의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성에 대한 욕구는 당연한 것이겠으나 이것이 과도하게 표출이 되면 성 범죄에 이르게 됩니다. 명예에 대한 욕망이 도를 넘으면 결국 넘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를 넘는 욕구, 선을 넘는 욕망은 결국 죄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절제라는 것입니다. 욕구와 욕망은 있지만 그 선과 도를 넘지 못하도록 스스로 제어하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탐욕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헬라어는 합성어로 더 많이가지다의 미래형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는 좀 더 많이 가질 것, 좀 더 많이 소유하고 좀 더 많이 획득하고 좀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탐욕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많이 갖고 싶어하고 또 구하는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비단 이것은 물질 뿐만아니라 성이나 명예와 권력과 심지어 전쟁도 마찬가지로 좀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마음, 즉 탐욕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탐욕은 우상숭배와 같다(5:5)고 말하면서 절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지나침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차라리 모자랐더라면 괜찮았을텐데 너무 많이 공급이 되어, 또는 너무 가지려는 욕망 때문에 오히려 죄에 빠지고 말았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절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절제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4대 덕목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부분에 대한 지식, 타인 앞에서의 용기, 말과 행동의 정의 그리고 모든 일에 절제입니다. 절제가 헬라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아니 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어른들은 아테네의 청년들에게 두 가지를 경고하였습니다. 첫째는 네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네 자신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절제의 미덕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성을 흰말로, 욕망과 본능을 검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성의 흰말이 수레를 끌어야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스토아 학파의 조상인 제논의 제자 중에는 허영이 심하고,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늘 절제하지 못한 삶을 살기에 제논은 그를 불러 야단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그 때 제논은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사가 요리할 때에 소금을 잔뜩 집어넣어도 맛이 좋단 말이냐?”고 하였습니다. 절제란 없거나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많지만 아끼고 삼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총독 벨릭스 앞에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4:25에는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라고 합니다. 바울도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당시의 권력가인 벨릭스에게 절제를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말세라고 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얘기하면서도 절제를 말합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딤후 3:3). 요즘 사람들의 절제하지 못함을 이미 예견했고 아마 그 당시인들도 절제하지 못하며 살았던 모양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결혼에 대한 다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해라.’ ‘남편과 아내는 각각의 성적인 의무를 다하나 아무도 상대편을 주장하지는 못한다.’ ‘부부는 서로 분방하지 말라.’ ‘협의상 기도하기 위한 분방은 가능하나 짧은 기간만 하라.’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 하나님의 은사대로 하라.’ 이같은 몇 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특히 부부의 분방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바울은 부부침실을 각각 따로 써는 시간이 길어지면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탄이 너희를 시험할까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절제가 약한 동물이라 그 아킬레스 건을 사탄이 공격하면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하여 분방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적인 열심이며 주를 향한 사모함이 특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더 깊이 더 집중적으로 기도해야 할 문제가 있어서 분방을 하더라도 오래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래 하게 되면 분명 거기에는 사탄이 시험하게 되고 정욕의 절제에 약한 너희들은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분방하여 기도하다가 오히려 절제 못함으로 인하여 시험에 넘어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권고입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교인들이 절제에 약함을 알고 부부의 분방 문제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모든 미덕 중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무려 1장에 걸쳐서 이 단어의 정의를 설명할 정도로 귀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인간의 모든 욕구 가운데 최상의 것라고 말한 것이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절제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요사이는 운전을 하면서 별일 아닌 것 가지고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욕설을 하고 상대편의 교통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경적을 울려대고, 전조등을 번쩍이며 저돌적으로 진격합니다. 조금만 아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여 끼어들게 하지만 나와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틈을 주지 않습니다. 시비가 붙어 감정이 격해지면 삿대질 끝에 멱살을 잡고 더 발전하면 격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월 시비 끝에 살인을 한 비극적 사건도 있었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다 앞차가 비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운전자를 끌어내서 때려 숨지게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더욱 참담한 것은 두 차 안에 어린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감정을 조금만 절제하였더라면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절제는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16:32). 절제하는 마음은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법칙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이 절제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성품이기는 하지만 인간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절제를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5:23에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절제는 그냥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9에는 절제를 육체적 욕망에 대한 극기라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9:25에는 절제를 악덕에 대한 극기라고도 표현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절제는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대조되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제는 인간의 의지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성령의 은사로 주시는 열매가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절제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문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는 절제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우리 스스로는 절제하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의 말도, 돈도, 성질도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솔직히 인정해야 절제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절제하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과거의 실패를 과장하고 자신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벌써 다 해봤는데 나는 안돼. 이번에도 또 실패할거야라는 자기 포기가 절제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의 실패의 이유는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감정의 노예로 살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아서는 절제할 수 없습니다. 그때그때 기분 때문에 공부하지 못하고, 일을 망치고, 성경 읽기를 포기하고, 교사도 못하고, 다른 부서에 봉사도 못하고, 감정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제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절제의 열매를 맺고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모든 인간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절제인데, 이 절제는 인간의 지식과 의지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의 의지력과 자제력과 감정을 도와주셔서, 절제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과의 싸움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도움) 비로소 온갖 욕망으로부터 절제가 가능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절제를 잘해야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믿음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에 덕이 있어야 하고, 덕에 지식이, 지식에 절제가, 절제에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이미 믿음이 있고,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에게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율법이 필요합니다. 율법은 절제하라고 주신 절제용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4:21에서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라고 합니다.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 얼마든지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남을 위하여 고기와 포도주를 절제하겠다는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을 위한 자기 통제인 절제는 신앙이 성숙한 자만이 가능한 덕목입니다. 절제는 차원 높은 신앙인의 덕목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의 일꾼들의 자격을 보십시오. 감독의 자격을 기록한 디모데전서 3:2에는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라고 하여 절제를 말합니다. 같은 내용의 디도서 1:8에도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라고 합니다. 여성 직분자의 자격을 기록한 디모데전서 3:11에서도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절제는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주어진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 항상 모든 일에 절제해야 내 영혼이 부패하는 데서 지킬 수 있고 맡겨진 사역을 효과적으로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려 절제하지 못하여 실패한 인생들이 성경에 참 많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탐욕을 부린 첫 번째 인물은 하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선물로 주시고 그에게 이 땅을 일구어 가꾸고 지키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을 수 있도록 했으나 단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정년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왕적인 통치 권한을 주셨지만 그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피조물임과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함을 이 명령을 통하여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금지명령은 사람에게는 무제한의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넘어서는 안 될 한계를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인간으로서 이 선을 넘지 말라는 표지판과 같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마땅 했으며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3:4-5)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이 과일을 먹는다고 해서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의 말이 자기 마음에 들어오자 그 나무의 과일을 처져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나무의 과일이 지천지로 있는데도 하와는 유독 그 나무의 과일에 집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이처럼 처음 인간들은 탐욕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같이 되려는 인간의 극대화된 욕구가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심판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욕심을 부려 절제하지 못하여 실패한 인생은 아간입니다.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여호수아는 이제 작은 아이성 전투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은 작은 성이니 군사 2-3천명만 올라가도 거뜬히 이길 것이라고 말하자, 여호수아는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3천명 정도의 군사를 작은 아이성으로 보냈는데, 그만 정복에 실패하고 아군 36명이 죽고 말았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여호수아는 자기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티끌을 뒤집어쓰면서 날이 저물 때까지 탄식하다가 마침내 하나님께 실패의 이유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에게 바쳐야 할 물건을 도둑질했으며 내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받친 물건을 도둑질한 자를 찾아내기 위하여 제비 뽑기를 했더니 아간에게 걸린 것입니다. 아간에게 너의 죄를 고백하라고 했더니 아간이 세 가지 고가품을 보고 탐내어 가졌다’(7:21)고 말했습니다.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 200세겔과 50세겔의 금 덩어리 하나를 훔쳤다고 자백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그와 그의 가족들과 모든 물건들을 아골 골짜기에 던지고 사람들은 돌로 쳐서 죽이고 물건들은 불태워 버렸습니다(7:2-25). 명품과 고가품에 대한 탐욕에서 비롯된 아간의 범죄는 자기와 가족들 전체를 파멸로 빠뜨리고 말았고 탐욕으로 취한 것들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불에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절제는 필요합니다. 이 세상을 밝고 아름답고 질서 있고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면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절제하고 싶다고 모든 일에 절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의 능력으로 매사에 절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절제를 계속함으로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절제의 열매를 맺음으로 우리 모두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우리의 삶을 알맞게 조절합시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방종하지 맙시다. 우리의 감성적 욕구에 이끌려 살지 마시고 우리의 말에도 절제하시고 먹는 음식도 입는 의복도 절제하시고, 우리의 힘과 시간도 절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삶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절제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것, 잡수신 것, 말씀하신 것, 사신 모든 것은 절제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희롱하고 침 뱉고 따귀를 때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절제하지 않으셨으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절제하심 가운데 성취가 된 것입니다. 열 두영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단숨에 다 없이할 수 있었지만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절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절제를 배우고 닮아서 매일같이 절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전 삶에 절제는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있어도 절제하지 못하면 없는 것보다 못합니다. 나무에 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이 너무 많으면 나무가 죽습니다. 약이 건강을 보살피지만 약을 남용하면 해가 됩니다. 사람에게 주신 본능을 적절히 사용하면 선물이지만 지나치면 인간의 파멸이 오고 인간성이 파괴되어 동물처럼 살아가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모든 면에서 절제가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 따라서, 우리 모두 모든 일에 절제하며 삽시다.

 

찬송/ 박홍준의 절제

기도 제목/ 저희들에게 절제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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