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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3 19 이기기를 원하는 자는 절제하라 이정현 목사 2023-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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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9:24-27절 개역개정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23319일 고전 9:24-27, 이기기를 원하는 자는 절제하라.

 

지난 주에도 절제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절제의 정의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이 절제는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제는 자기의 의지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다고 했고 이것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절제하지 못하여 인생을 망친 두 사람 즉, 하와와 아간의 예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절제에 대한 말씀인데, 이 단어가 성경에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개역개정판 한글 성경에는 구약에는 없고 신약에만 12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절제라는 단어 외에도 절제의 의미를 묘사하는 성경의 표현이 여러개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제에 대한 비슷한 표현도 살펴봄으로 절제의 광의적인 의미를 아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절제에 대한 다른 표현들을 몇 구절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잠언서에서는 절제를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16:32)이라고 했고 누가복음과 로마서의 몇 구절에서는 육신의 욕구를 억제할 것’(21:34, 6:12-13, 6:19, 13:14)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옛사람을 예수와 함께 못 박는 것’(5:24)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절제를 낮의 사람과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13:13)이며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고전 9:27)이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3:5)이라는 말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이런 표현들이 나오면 자제, 절제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탐욕과 사치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서에서는 사회, 경제적으로 강한자들과 부요한 자들에게 사회적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에 관하여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이런 규정들을 만들어 놓은 것은 결국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부의 재분배를 통하여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리대금업과 담보물을 장시간 압류하는 것을 금지한 규정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하신 것이고 또한 가난한 자들의 옷을 담보하였을 경우 그 옷을 해가 질 때까지 담보물로 잡아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은 그 옷이 저녁의 이불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땅의 곡물이나 포도를 수확할 때도 남김없이 다 거두지 말고 수확한 후의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부한 자들의 탐욕으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비숫한 의미의 규정이 안식년 제도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안식년이 되면 모든 논밭의 토지를 쉬게 해야만 했고 안식년에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곡물들과 과일들은 남녀 종들과 가축을 비롯한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그냥 둬야 했으며 때로는 종들에게 자유의 신분을 주어서 내 보내되 넉넉하게 재물과 곡식을 주어서 내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안식년 제도에서뿐만 아니라 50년마다 한 번 있는 희년 제도도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의 땅과 집과 몸이 부자들의 탐욕스러운 욕망에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지위가 매우 낮은 품꾼들과 일일 노동자들에게 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 부자들에게 아침까지 그 삯을 자기 손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19:13, 24;14-15). 상거래를 하는 상인들에게는 공평한 저울추와 에바를 사용함으로 공정한 상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규정도 있습니다(19:35-36, 25:13-16). 이것 또한 상인들의 탐욕과 불의를 차단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들이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부자와 권력자들의 탐욕을 경계하는 말씀 중에 특이하게 경계석을 옮기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조상 때부터 우리 가문에 이 땅을 주시고 그 경계를 정하여 경계석을 세우게 하셨는데,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자기의 땅을 좀 더 넓게 만들기 위하여 그 경계석을 밤에 몰래 강제로 옮기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재산이 많고 힘 있는 자들이 강제적으로 압력을 넣거나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여 힘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땅을 빼앗음으로 열 번째 계명을 어기는 종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탐욕을 부린 큰 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율법서에서 뿐만 아니라 엘리야 시대 때에도 이같은 내용들이 실제로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것으로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사건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이 자기에게는 이미 많은 땅과 토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궁 근처에 좋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던 나봇의 땅을 매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봇은 왕이 원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분배하여 준 이 땅을 파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는 것이라고 하여 거절을 하였습니다. 거절을 당한 왕이 속상한 이야기를 왕비였던 이세벨에게 하자, 이세벨은 거짓 증인들을 매수하여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리게 합니다.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 나봇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에 사로잡힌 이세벨의 간계로 나봇은 붙잡혀 가게 됩니다. 그는 재판관으로부터 제대로 심문을 받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그를 성읍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그들은 나봇만 죽인 것이 아니라, 그의 상속자인 나봇의 아들까지 다 돌로 쳐서 죽이게 됩니다(왕하 9:25-26). 이 사실을 왕비 이세벨에게 보고하니, 이세벨은 근심하여 식사도 못하고 누워있는 왕에게 가서 이제 일어나서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라고 말합니다. 그때서야 아합 왕은 일어나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은 이미 자기들에게 많은 재물과 부동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거짓 증인까지 세우고 나봇 뿐만 아니라 상속자인 그의 자식들까지 죽여가며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서를 지나 선지자들의 글에서도 이런 자들을 책망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사람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주전 8세기 경의 선지자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당시의 지배계층과 부자들의 탐욕이 도를 넘어서 결국 이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가져왔다고 지적을 합니다. 그들은 마땅히 부와 권력으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보듬고 살아야만 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았고 신 한 켤레 값으로 가난한 자들을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강제로 곡물세를 징수하여 그것으로 재산을 불리고 돌로 집을 짓고,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고급 포도주를 마시며 사치와 향략에 젖어 살았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자들의 머리에 티끌을 탐낼 정도로 사회적인 약자들을 착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1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거움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5:11-12).

같은 시대의 선지자였던 이사야도 욕심에 사로잡혀 허랑방탕하게 살아가는 지배계층과 권력자들, 부자들에게 동일한 지적과 경고를 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불의한 탐욕에 사로잡힌 권력층들이 고아나 과부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탈취하거나 뇌물을 받고 그들의 재판을 억울하게 하는 일들이 다반사였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장로들과 고관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물건들로 자기들의 집에 가득 쌓아두었으며 그들의 얼굴을 마치 맷돌질하듯이 짓밟아 버렸다고 했습니다. “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15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3:14-15). 그러면서 고관들과 장로들과 지배계층은 매일 연회를 열어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하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며 향략에 빠져들기도 했다고 지적합니다.

 

심지어 미가 선지자는 그들이 부동산을 탈취하며 부정한 저울추를 사용하여 이익을 탐하였고 권력과 돈에 눈이 어두워 마치 식인종처럼 탐욕을 부렸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벨론 이전의 선지자였던 스바냐는 가난한 백성들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방백들을 부르짖는 사자라고 표현을 했고 재판장들을 이튿날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의 고관들과 심지어 재판관들까지 탐욕에 눈이 멀어 정치와 판결을 굽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은 탐욕과 사치에 빠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족, , 고관, 부자들임으로, 이들에 대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고와 책망과 심판을 받는 것은 결국 더 가지고 더 취하고 더 좋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이고 절제하지 못한 데서 오는 일들이었습니다.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사실상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즐기고 있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것들을 강제적으로 빼앗아 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마치 잠언서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탐욕을 채우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또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거머리와 같은 탐욕자들이었습니다. 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30:15-16). 더 많이 가지겠다는 탐욕자들은 날마다 나고 다고 하는 거머리와 아이를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한 줄 모르는 불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권력자들과 부자들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있는데, 그들은 이 사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어렵고 가난한 자들의 것을 더 억압하고 착취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을 돌보고 섬기라는 사명을 잃어버리고 탐욕과 사치와 방종에 빠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자기들의 사명완수를 위하여 마땅히 절제하며 자기들에게 주어진 부와 권세를 어렵고 힘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했어야만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너희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절제와 노력이 필요함을 권면하기 위하여 운동 경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매 2년마다 열렸던 이스미안 경기’(Isthmian games)가 있었고 인근 지역인 아테네에서 열린 올림피안 경기와 기타 몇 개의 경기가 정기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큰 운동장에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모여서 각종 운동 경기를 즐겼던 것입니다.

 

여기 운동장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가 헬라어 스타디오인데 이는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606.75피트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이 경기장, 스타디움’(Stadium)으로 뜻이 굳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그리스 도시들에 있는 경기장들이 한
스타디오(200m)로 규격화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장에서 달리는 사람들 중에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알고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24)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문자대로 육상 경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상을 얻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오직 한 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의미한 것은 경기에서 우승자가 질주하는 것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상을 얻겠다는 목적만을 가지고 그 목표만을 향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합니다.’ 이 경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절제해야 합니다. 이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보통 10개월 가량의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음식이나, 오락, 수면 시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했다고 합니다. 이런 절제의 시간과 절제의 훈련 기간을 그쳐야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0 개월 동안에는 정말 피나는 훈련과 절제의 과정을 그쳐야 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절제하고 오락도 절제하고 잠자는 것도 절제하고 성관계도 절제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무절제하게 생활하고 시합(경기)에 나간다면 결코 면류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라는 말은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에서는 승자에게 월계수나 솔잎, 또는 어린 파슬리(parsley) 잎을 엮어 만든 화환(wreath)을 머리에 씌워 주었으며 올림피안 경기에서는 우승자에게 야생 감나무 잎으로 엮은 화환을 씌워 주었습니다. 이처럼 나뭇잎을 엮어 만든 그런 면류관은 경기자들에게 최고의 영예(榮譽)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면류관은 금방 시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쓴 우승자의 영예 역시 덧없는 것입니다. 이같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이처럼 훈련하고 절제하는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피나는 훈련과 절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사람도 이처럼 철저히 절제해야 하건만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더 철저히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자가 목표하는 면류관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면류관은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운동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 못지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박질하면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마땅히 모든 부분에서 절제해야 합니다.

바울은 26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달리기 선수들이 달리는 골인 지점의 방향을 분명히 정해 놓고 뛰는 것처럼 바울 자신도 목표와 방향을 확고하고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구절 즉,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다는 말씀은 권투 시합을 비유로 말한 것인데, 이것은 권투 선수들이 시합을 하기 전에 상대방 없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현한 말로 전문 용어로 스키 아마키아라고 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싸움이 상대방이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적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구절을 현대어성경에서는 결승점을 향하여 한 눈 팔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달려가면서 곁길로 새거나 게으름을 피우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자신의 신앙경주에서 분명한 목적과 분명한 방향을 두고 전력을 다해 달리는 운동경기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목적과 방향성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진리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게 신앙의 목적이자 방향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말고 항상 이것을 목적으로 그리고 이 방향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중요 또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속도보다도 방향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빨리 뛰어서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빨리 뛰어도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그 사람은 상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골린 지점, 목적, 그리고 방향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내 몸을 쳤다는 것은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였다는 의미이고 복종하게 함은은 이제는 온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온전히 복종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하였는가 하며는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봐 염려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버림이 될까 염려하였다는 말은 구원이 상실될까 봐 염려했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로부터 상 받는 것을 잃게될까 봐 염려했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누비며 복음을 전파하였던 바울 조차도 혹시 주님 앞에서 상 받지 못할까 봐, 주님을 섬기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끝까지 자기는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절제에 힘쓰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 내용을 순서대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의 율법서에서는 탐욕과 사치를 부리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역사서에서는 탐욕에 빠져버린 아합과 이세벨이 거짓 증인을 세우고 나봇과 그의 아들까지 죽여서 포도원을 빼앗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선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권력자들, 지배자들, 고관들, 재판관들이 한결같이 고아와 과부와 가난하고 소외된자들을 도와주고 섬기라는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땅과 몸과 곡식을 탐욕으로 빼앗는 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절제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절제하고 또 절제해야 상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신앙생활에 승리하고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상 받기 원하시는 분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하면 신앙이 점점 더 성숙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나 매사에 절제하지 못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도 받을 수 없고 신앙이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비참한 나락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절제하느냐, 절제하지 못하느냐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루 하루를 절제하지 못하는 말세의 자연인들처럼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를 본받아 바울과 같은 자신의 몸을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는 절제의 사람을 사시겠습니까?

 

바라기는 예수님의 절제의 성품을 본 받아서 바울이 일평생 동안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이 되지 않기 위하여 늘 절제하며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기기를 원하는 자는 절제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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