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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8 01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이정현 목사 202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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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무엘상7:1-4절 개역개정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81, 삼상 7:1-4,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지난 7월 한 달 동안도, 폭염과 코로나 확산으로 인하여 불안과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와 가족들과 교회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도와주시고 기도해 주신 덕분에, 1개월 동안의 안식월을 잘 마치고, 지난 주 목요일에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1주일에 세 번씩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씩 운동도 하고, 창세기의 말씀을 좀 집중적으로 읽으며 공부하였습니다.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당회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8월을 맞이했습니다. 8월의 주제는 사모함 회복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사모함이라는 단어를 전부 찾아서, 그 중에서 몇 개의 본문을 중심으로, 8월 한달 동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국어 사전에 사모(하다)’라는 단어를 찾아보니까,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함’, 또는 우러러 받들고 마음속 깊이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사모함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단어를 찾아보니까, 흠모, 갈망, 앙망이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한글개역성경에 사모함이나 사모하다가 6, 흠모라는 단어가 2, 갈망이 3, 그리고 앙망이 12회 나타났습니다. 이 중에서 사모하다는 말은 주로 시편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앙망하다는 말은 이사야서에 많이 나타납니다. 이같은 사실만 놓고 본다면, 시편기자 다윗과 이사야 선지자가 다른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모하며 앙망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무엘상 7장 앞부분의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했다는 말씀을 살펴봄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비록 코로나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길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거나 낙심치 말고, 이번 한 달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이, 더욱더 깊어지고 간절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사시대 때, 늘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던 호전적인 민족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왔습니다. 사무엘 상 4장 초반부에 나오는 전쟁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군사 4천명 가량이 죽고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이제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이 언약궤를 앞장 세워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기보다, 오히려 이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전쟁에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언약궤가 전장에 등장하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소리로 환호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온 줄 알고, 블레셋 사람들도 두려워 떨며, 애굽을 치신 신을 우리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쉽고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참패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보병만 3만명이 죽었고,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처음에는 두려워하였지만,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게 되니까, 이스라엘과 그들의 신 여호와를 우섭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빼앗아 온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들의 신인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틑날 다곤 신전에 가보니까, 다곤 신의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곤의 머리를 다시 올려 놓았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갔더니, 이제는 다곤 신의 머리 뿐만아니라, 두 손목까지도 끊어져서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 사람들을 치셨습니다.

 

그래서 아스돗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가드로 보내게 됩니다. 가드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그 지역의 사람들을 독한 종기로 치셨고, 다시 이 언약궤는 에그론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에그론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셔서, 그 지역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 들어온지 7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 궤로 인하여 우리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음으로, 이 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지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젖나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이스라엘 땅인 벧세메스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송아지를 떼어놓은 젖나는 암소 두 마리는, 그 수레를 끌고 똑바로 이스라엘 땅으로 간 것입니다. 이것으로 블레셋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당한, 모든 고통과 환란과 재앙과 죽음이,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벧세메스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으로부터 자기의 땅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궤를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두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여호와의 궤가 궁금하니까, 그 궤를 들여다 봄으로, 70명의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와서 이 언약궤를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됩니다. 간단히 말하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서 싸우다가, 전쟁에 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언약궤가 블레셋 지역에서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다가, 블레셋의 신들과 백성들에게 큰 재앙을 내리시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돌려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벧세베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잘 못 취급함으로 사람들이 죽게되자, 이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그 다음 이야기로 넘어 가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벧세메스 지역으로 가서, 여호수아의 밭에 있는 언약궤를 옮겨와서,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먼저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인데,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언약궤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확실히 믿지 못하고, 다만 전쟁에 가져나가면, 당연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장 형제는, 언약궤를 하나의 부적물로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단순히 이것만 가지고 나가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인도해 가야할 제사장이,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언약궤를 부적물이나 수호신 정도로 생각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 승리하니까, 여호와라는 신은 우리가 섬기는 다곤 신보다 못한 신으로, 하찮게 업신여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과 가드와 에그론 지역에서 역사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다곤신과 비교할 수 있는 신이 아니라, 절대적이며 사람을 죽이시기도 하시고, 재앙을 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심을, 블레셋 지역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민족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블레셋 지역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 언약궤를 벧세메스로 보내면서, 송아지 두 마리를 블레셋 지역에 떼어놓고,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실어서 보내면서, 이 어미 암소 두 마리가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똑바로 벧세메스로 가면, 이것은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온 재앙인줄 알겠다고 했습니다. 젖먹이 송아지를 떼어 놓은 암소 두 마리는, 자기 새끼들이 생각나서 가다가 되돌아 왔습니까? 한 마리는 돌아오려고 애를 썼는데, 다른 한 마리는 똑 바로 갔습니까? 아닙니다. 성경 사무엘상 6:12입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 하였고이것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있었던 모든 재앙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 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돌와 왔을 때,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여호수아의 밭에 두었고, 언약궤를 잘 못 모셔서 결국 70명의 주민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밭에 방치하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언약궤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구경거리로 함부로 대하였습니다. 민수기 4:15에 보면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고 했고, 20절에서는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만지거나 그 안을 들여댜 보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행동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지적 호기심의 대상, 구경거리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재앙이 왔다면, 자기들의 잘못을 고쳐서 여호와의 궤를 잘 모시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른 지역으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보다 못한 여러신들 중의 하나로 생각을 했다면,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으나, 여호와를 너무 가볍게, 구경거리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하여 기럇여아림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벧세메스 사람들의 제의를 받아 들여 자기들이 여호와의 궤를 정중히 옮겨가게 됩니다. 삼상 6: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져다 주겠다고 한 것 아니라, 너희들이 와서 이 궤를 옮겨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의에, 벧세메스 지역에서 70여명의 사람들이 죽은 사건을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벧세메스까지 가서 그 언약궤를 메고 온 것입니다. 기럇여아림은 벧세메스에서 북동쪽 14km 정도에 위치해 있었고 조금 높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벧세메스에서 약 12k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벧세메스에서 더 가까운 예루살렘(실로)으로 옮기지 아니하고, 더 먼 기럇여아림으로 옮겼을까요? 그것은 이미 실로는 이전의 전쟁으로 인하여 성소가 훼파되었으며, 또한 성소와 여호와의 언약궤를 보관하고, 책임 있게 돌보는 일을 하는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이 죽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기럇여아림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훌륭한 영적 사람, 아비나답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럇여아림 사람들은 벧세메스 사람들의 제의가 있었을 때, 선뜻 나서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언약궤를 메고 왔던 것입니다.

 

그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그 궤를 지키게 한 것입니다. 혹자는 아비나답은 제사장 계열의 사람으로서, 언덕 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가문의 가장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그의 아들을 궤를 지키는 사람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사람은, 여호와의 궤를, 달리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겼다고 말합니다(지키게 하였다). 여기의 엘리아살이 여호와의 궤를 지켰다는 것은, 단순히 그 물건을 지켰다는 의미보다, 그 궤가 상징하는 하나님을 성실하게 잘 섬겼다는 얘기입니다.

 

본문 2절로 가겠습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여기에 여호와의 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되어, 20년간 머무르게 된 것을 말하는데, 여기의 20년은,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머문 전체의 기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에서 다윗이 다윗성으로 옮겨지기까지, 무려 7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삼하 6). 그렇다면 본문에 언급된 특정한 기간 20년은, 하나님의 언약궤로 인한 심판이 중지되고,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사무엘 선지자로 인하여, 미스바 대 성회를 통하여, 이스라엘 전 민족의 각성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궤가 기럇여아림에 20년 동안 있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2절 마지막 부분에,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궤가 2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표현해 주는 말씀입니다. 조금은 과장된 표현을 썼겠지만, 여호와를 사모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궤를 모시고 있는 기럇여아림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언제 이와같은 전 민족적인 사모함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여호와의 법궤가 빼앗겼다가 다시 돌아와서 안정적으로 안치가 되었을 때, 민족적인 사모함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각종 죄악에 물들었던 홉니와 비느하스 시대가 끝나고, 기도 많이하고 영적인 선지자 사무엘이 등장하였을 때, 이같은 민족적인 사모함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 민족에게도 이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적 새 바람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10만 개가 넘는 한국교회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천만 명이 넘는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또한 대한 민국 곳곳에서 새로운 영육적 지도자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기성 세대에서 뿐만아니라,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 세대에서도 훌륭한 영육적 지도자들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통하여, 대한민국 모든 백성들의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의 사모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애곡하다는 뜻이고, 헬라어로는 관심을 가지고 응시하다는 뜻입니다. 이 둘을 합하여 말하면, 우리의 잘못을 애곡하며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회개하더라도 입술로만, 형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죄를 자복하고 통곡하며 슬퍼하며 회개하였습니다. 또한 은혜를 간구할 때에도,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며, 관심을 집중시키고 하나님을 응시하며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짧은 시간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했으며, 몇몇 사람이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전 민족이,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청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생활로 20년 동안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사무엘 선지자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서 사역을 합니다.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은 우선적으로 우상들을 제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이 쉽게 접하고 자주 빠졌던 우상은, 바알과 아스다롯이었습니다. 이들은 부부신으로 비와 다산과 풍요를 주관하는 신으로, 당시 가나안 땅에 만연했던 우상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것들을 제거하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이런 죄악 가운데 빠져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런 우상들을 너희 가운데서 다 제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의 제거하라는 명령형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특별히, 철저히 없애라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마음속에 아무리 중요하고, 소중한 그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조차도 철저히 없애라는 것입니다. 돈과 이성과 자식들과, 명예와 지위와 권력이 우리의 우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우상인 것입니다. 이것들을 모두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무엘이 그의 백성들에게 말하는 사항은,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마음의 온갖 우상들을 제거하였다면, 이제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들을 제거하고 버렸다면, 당연히 그 마음을 이제 하나님께로 두고, 그 하나님 여호와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비와 풍요와 다산을 주관하실 뿐만아니라, 세상의 정세와 권세자들을 주관하시고, 온 세상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고, 그 하나님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사이에서의 혼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방신들을 섬기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두 마음은, 곧 불신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같은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각종 우상들을 제거하고, 오직 그만을 섬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리하면 그 결과로,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만약 사무엘의 권고대로, 이스라엘이 우상을 버리고, 오직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섬긴다면, 분명히 하나님에 손에 의해서 건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무엘은 도울 힘이 없는 우상들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긴다면, 그 하나님의 손이, 너희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이 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희는 우상을 제거하고’, ‘그만을 섬기라, 두 가지 사항을 얘기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4).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권고를,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서,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선지자가 말하는대로 백성들이 들었습니다. 제거하라는 명령대로,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만을 섬기라는 말대로, 그들은 여호와만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종교 다원주의를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신이심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종교 지도자였던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했고, 잘 섬기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무조건 전쟁에 승리할 걸로 생각했지만, 결국 패하고, 그 언약궤는 블레셋에 빼앗기고, 제사장 형제는 전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블레셋에게 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블레셋 진영에서 역사하심으로, 당신의 통치권이 건재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아니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언약궤가 다시 이스라엘 진영 벧세메스 지역으로 왔을 때에도,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여서, 지극히 거룩하신 경배의 대상으로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의 구경거리로 여기다가, 많은 사람이 죽고 말았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만유의 통치자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되고 난 이후부터는, 장장 2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모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하며 하나님을 갈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같은 사모함이, 이같은 애틋한 그리워함이, 이같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앙모함이, 사무엘 선지자의 권고에 따른, 합당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들의 삶 속에서 우상들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모함이 있어야, 말씀에 따른 합당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그 말씀을 그대로 아멘하고,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모함이, 말씀에 따른 합당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모함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혹자는 하나님을 사모함이 없는 믿음은 결코 자랄 수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갈급 해 하고 앙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믿음이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심하게,‘사모함이 없는 신앙은 거짓이요,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면, 그 신앙은 거짓 신앙이고, 그런 사람이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모함, 앙모함과 갈망의 중요성과 가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모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 속에 자리 잡고있는 그 어떤 우상이라는, 제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는 작은 요소라도 그것을 제거하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쏟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한 성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부활 주일에 두 분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 중 한 분에게 목사님이 형제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구원의 확신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한 번 더 질문했더니, 역시 그 성도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면서, ‘앞으로 열심히 예수님을 알아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아무튼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1달이 지났는데, 이 성도가 자기 카메라들 들고 와서, 매 예배를 동영상으로 찍는 겁니다. 주일 낮 예배, 오후예배, 수요일, 금요저녁기도회, 새벽예배까지 촬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사람을 불러서 형제님, 우리교회는 작은 교회라서 주일 낮 예배는 찍어서 성도들에게 보낼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다른 예배는 찍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그 성도님이 목사님, 제가 요새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아서 제가 촬영을 해서 그 말씀을 주중에 계속 들으려고 촬영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이 성도가 예배를 촬영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은혜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루 점도록, 일주일 내내, 예배 영상, 설교 영상을 틀어놓고 같이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아멘으로 응답하며 은혜를 받고 있답니다.

 

그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영상예배가 재생되고 있으면, 같이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집을 갖다 온 사람들은, ‘그 집에는 말씀과 찬양과 기도가 넘친다고 말한답니다. 그 사람이 내 인생 가운데 지금같이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간증을 했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내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세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예배를 사모하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사모하니까, 이렇게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하나님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로 갚아 주십니다.

사모함이 내 인생을 멋지게 바꾸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107:9). 하나님을 애타게 사모함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 나의 영혼이 잠잠히

기도제목/ 여호와를 갈급히 찾는자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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