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6 27 복음에 대한 바울의 열정 | 이정현 목사 | 2021-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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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후서11:1-3절 개역개정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성경본문] 사도행전20:23-24절 개역개정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후 11:1-3, 행 20:23-24, 복음에 대한 바울의 열정 어느 분의 글을 보니까, 다음과 같은 감동스러운 예화가 있어서 소개를 하겠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라톤 선수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아베베라는 선수입니다. 이 분이 1960년 로마올림픽 때에 우승을 했는데 맨발로 뛰었습니다. 요즘은 스포츠 공학에 근거하여 운동화도 그 선수의 발에 맞추어서 특수하게 제작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마라톤 선수를 위해서 모 회사에서 10만 불(1억 2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특별한 운동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아베베 선수는 운동화도 없이, 맨발로 뛰어서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인간승리라고 극찬했습니다.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서, 두 본문을 근거로 열정 회복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열정, 열심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열정이 운동 선수에게 뿐만아니라 공부도 그렇고, 직장생활이나 사업도 마찬가지이고, 배우나 음악가도 그렇고,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 일에 열심히 노력하면 만족도 얻을 수 있고, 소기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고, 성공과 명예도 얻을 수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열심히 주의 일을 하면서,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위선적인 열심은 아니됩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열심,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열심, 맹목적인 열심, 보여주기식의 열심, 더 나아가서 자기들의 어떤 철학이나 사상, 이데올로기를 성취하기 위한 열심은 경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바리새파나 열심당원들이 이러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열심이나 민족적인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철저하게 지켰고, 성경에서 요구하는 11조 이상으로 헌금을 했고, 1주일에 이틀은 금식을 했고, 하루에 세번씩은 기도했고, 또한 열심당원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열심이 대부분 위선적이며, 자기의 의를 들어 내고자 하는 것이고,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성취하고자 하는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같은 열심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과거에 자신도 여기에 속한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2장이나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빌립보서 3장 5-6에서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교의 종교적인 열심 때문에 교회를 핍박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밤낮 가리지 않고 쫓아가서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분명 바울은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그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180도 변화가 되어서, 이제는 바른 열정을 가지고, 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먼저 고린도후서 11장의 말씀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어리석다고 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에서 누차 말하고 있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3:1, 5:12, 10:12). 바울은 자기의 업적, 공로를 자랑하는 것, 자신의 선행을 떠 벌이고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자랑을 좀 하겠으니, 나의 이 어리석음을 용납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바울이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고린도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이야기에 너무 자주 현옥되어 진리에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외모만 보았다고 말합니다(10:7). 미사여구를 쓰서 자기의 자랑거리를 널어놓는, 그들의 외적 모습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바른 것을 보여주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더라도, 이야기를 해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씩이나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업적과, 권위를 예증하는 일을 결코 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조심스럽고 어렵게 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 말을 하는 것이니, 나의 어리석음을 너희들이 용납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너희들이 나를 용납해 주어야 하는, 약한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으니, 나의 어리석음을 좀 용납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심은 두 번 다 ‘시기와 질투’라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역 성경 중 RSV, NIV에서는 ‘시기’나 ‘질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구절의 내용이, 하나님의 질투하심과 동일한 질투를 가지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온, 적대자들을 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린것처럼 하나님이 시기하기까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그 마음으로 바울도 고린도교회를 위해 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열심내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고린도교회를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중매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 관계를 근거로(사 50:1-2, 54:1-8, 62:5, 호 1-3장), 고린도 교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관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여기서 너희들을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중매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정결한 처녀로 중매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중매한다는 이 단어는 ‘약혼시켰다’(betrothed, RSV), 또는 ‘정혼시켰다’(공동번역)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순결한 처녀인 고린도 교인들을, 오직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약혼시켰다(엡 5:27, 요일 3:2-3)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문상의 의미이고, 여기서의 중매의 실질적인 뜻은, 고린도 교인들의 ‘개종’, ‘회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사람들을 예수 믿게 해서,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게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약혼한 당사자로서, 고린도교인들은 순결을 계속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이스라엘이, 이방의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되며, 오직 남편인 하나님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불신의 상태에서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만을 믿으며, 주님께만 헌신적으로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 교사들이나, 또 다른 미혹자들의 꾀와 유혹에 빠져서, 처녀의 정결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3).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교사, 미혹자들, 거짓 사도, 적대자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행했던 행위를, 뱀이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한 행위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창 3:13). 사단의 대리인인 뱀에 해당하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그곳의 교인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미혹한다’(엑세파테센)란 표현은, ‘완전히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 미혹, 완전 속임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바울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옛 뱀처럼, 고린도교인들을 완전히 속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알고 있던 바울은,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사도행전 20장의 본문으로 넘어 가겠습니다. 이 성경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시즘에,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님들을 불러 놓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것입니다. 23절부터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였다’는 말은 바울이 친히 성령의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바울이 통과해 지나가는 도시에서마다, 성령이 예언자들을 시켜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운명을 말해준 것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자연스럽다고 봅니다(21:10-14). 이제 밀레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의 앞에는, 지금까지 당했던 어떠한 어려움보다도 더 심한 상황들, 곧 문자 그대로 실제적인 투옥(쇠고랑)과 견딜 수 없는 극심한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무거운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 사는, 사도 앞에 놓여진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관심밖에 둠으로써,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그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려고 한 것입니다. 바우어(Bauer)라는 학자는 이 구절을 “...을 다하기만 하면(...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내 생명을 내 놓겠습니다(또는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만, 그의 생명을 내놓은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목적은 주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다 마치는 데 있었습니다(롬 14:8, 빌 1:20-21).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많은 고난과 핍박과 수모와 천대와 죽음의 위협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당하였던 고난의 실제적인 모습들을, 고린도후서 11장에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인 고린도후서 11장 뒷 부분에 나옵니다. 길기 때문에 요약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16-18절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1절과 연결하여, 자랑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러나 나도 육신을 따라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 나는 강과 강도와 동족과 이방인과 시내와 광야와 바다와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였다. 나는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이런 고난과 환란 중에도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자기가 다 죽게 생겼는데도 교회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메섹의 아레다 왕이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나는 광주리를 타고 창문 너머로 내려와서,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얘기합니다. 이같은 성경의 기록들을 보면, 바울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는,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의 나라에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전파의 열정적인 사람이 됩시다. 바울과 똑같은 전도인은 아니라할지라도, 바울은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지만, 우리는 내집 근처라도 다니며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처럼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우리는 1년에 1-2 사람이라도 전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밖으로 나가서 전도하지 못한다면, 전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사명을 위해 생명을 바쳤지만, 우리가 그 정도는 못돼도, 생명 부지하겠다고 어리석게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 진정한 은혜와 복을 받았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으면 바로 그 사람 때문에 가정이 살고, 가정이 살면 시회와 국가가 살고, 우리 국가가 살면 우리나라를 통하여 세계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나비가 전 세계의 기후를 바꾸어 놓는 것처럼, 우리의 한사람 전도가 세계 복음화의 대 이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안양병원에 김태식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암 연구소 소장이신데, 이 분은 예수를 믿고는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의사로 만드셨나를 생각했답니다. 의사를 하면서 암에 걸려 온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깨닫기를 “아!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살리라고 하시는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 때부터 복음을 증거하는 데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조지 포먼(George Forema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3-40대 이상 되신 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와 함께 70년대 권투계를 주름잡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습니다. 이 분은 흑인 슬럼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교에 가기를 싫어했고 자라나면서 휴스턴 뒷골목의 불량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열정적인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역자들도 자기가 맡은 부분에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사역하고, 장로님들은 심방과 치리에, 없는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일하시고, 안수집사님들은 재정출납과 봉사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고, 권사님들은 심방과 기도에 힘을 쏟고, 모든 성도들은 경건생활에 열정을 쏟는다면,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조금 못하고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성과가 좋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많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정말 땀 흘리며 애써서 최선을 다했으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열심을 내라” “열심을 내라”고 강조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5-8). 우리도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을 소망하며,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열정적으로 전도인의 직무를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 나 주만 위해 기도 제목/ 매사에 열정적인 사람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특히 바울처럼 복음 전파에 열정이 있게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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