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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1 17 - 찬송 회복 이정현 목사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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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137:1-6절 개역개정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137:1-6, 찬송 회복

 

20211월의 주제가 예배회복이기 때문에, 첫째 주일에는 우리의 한가지 소원: 천상예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고, 둘째 주일에는 말씀 경청 회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찬송 회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대로 이 시간에도 경청함으로 은혜받고, 여러분의 삶 가운데 찬송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살펴보는데, 첫째는 우리가 찬송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 둘째는 왜 찬송해야 하며, 셋째는 어떻게 찬송해야 하는가, 넷째는 찬송의 능력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우리가 찬송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남쪽 유다 백성들이 3차에 걸쳐서 바벨론 나라로 잡혀갔습니다. 그 때가 BC 606-586년 사이입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의 손에 비참하게 끌려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각종 죄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멸시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이방인의 포로가 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먼 이국땅에서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이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이방인들로부터 인권을 보장받았겠습니까, 대우를 제대로 받았겠습니까? 정말로 비참하게, 고통 가운데, 하루하루를 눈물로 살았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바벨론 강가에서 고국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고향이 그리울뿐만 아니라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보고 싶었을 것이고 자기들의 포로 생활이 비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날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았을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7편의 이 말씀은, 유다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중, 거의 마지막 즈음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를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지에서 당하였던 수모와 수치를 보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은, 그런 고통과 역경 가운데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그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이런 면들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비록 환경은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경배하며 어떻게 찬송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찬송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예배 중에도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아예 레위지파 중에서, 노래하는 자들을 따로 세워서, 찬양하게 했습니다. 수백명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여호와 찬양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들이 웅장하게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오래 전부터, 예배 중 찬양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목동들이 양을 치면서도, 악기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즐겁고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노래를 부르며 찬송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노래와 악기를, 많이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노래와 시를 좋아했던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세계 여러 민족들 중에 특히, 아프리카 민족들도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예배 시간은 대부분 긴 편인데, 60-70%가 찬송과 춤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전부 일어나서 함께 춤을 추며, 박수를 치며, 환호하며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과 연관해서 이처럼 찬송을 좋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지에 가서도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수금을 타면서 시편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노예로서 심한 노동을 하면서도, 중간 중간 쉬는 시간에 몇 사람씩 모여서, 수금을 타며 찬송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과가 다 끝나면 강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바벨론 사람들이, 그 노래가 너무 듣기 좋고 감미로우니까, 우리를 위해서, 그 노래 좀 불러달라고 한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노래를 요구한 것이, 단순히 듣기 좋고 감미로웠기 때문만은 아니고, 새롭고 흥미로웠을 뿐만아니라, 포로자들에게 노래를 시켜서, 승리자의 우월감을 들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유대인들에게 노래를 요구한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정복자가 포로자들에게 노래를 시키면, 당연히 그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위해서(바벨론 사람들의 흥을 돋구기 위해서), 찬송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고,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은 것입니다. 여기 수금을 나무에 걸었다라는 말은 내 악기를 나무에 잠시 걸어두었다는 표현이 아니고, 다시는 내리지 못하도록 나뭇가지에 걸어서 줄로 꽁꽁 묶어 두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저들을 위해서는 절대로 이 수금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이며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벨론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희들이 부르는 그 노래를, 우리를 위해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정복자들의 요구를 계속 듣게 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올려야 할 찬송을, 이방인들의 흥미를 위해서 결코 부를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기도 합니다. 4절과 5절입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유대 사람들은, 비록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부르는 여호와의 노래를, 어찌 부를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차라리 내 오른손의 재주를, 잊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내 오른손의 재주는, 수금을 탈 수 있는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수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못하고, 너희 폭군들을 위하여 노래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이 수금 타는 기능을 잊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을 위하여 연주할 바에는, 차라리 내 모든 재주를,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잊어버리고, 너희들을 위하여 찬송을 부름으로, 너희를 즐겁게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우리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면 좋겠다. ‘혀가 입천장에 붙는다는 것은, 말도 못하고 찬송도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올려야 할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바벨론 너희들을 위하여 찬송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벙어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유대인들은, 비록 먼 이방 나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긴 하여도, 그들의 신앙의 대상과 찬송의 대상만큼은 분명하였습니다. 모진 포로 생활 가운데 이들의 신앙이 많이 변화가 되어서,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 우상 숭배하며 살았던 과거를 회개하고, 이제는 정신을 차려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만 찬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국 땅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수금을 켜며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입술을 벌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과 영광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찬송의 대상은 결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흥을 돋구어주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을 높이거나 칭송하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포로지에서의 유대인들은 오로지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우주만물에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찬송의 대상이었고, 영광을 올리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결코 다른 곳에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렸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만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67:37에서는,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하셨고, 시편 66:4에서는,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150:6)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호흡이 있는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 같은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에게만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2:8).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의 영광을, 다른 우상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데, 이것을 다른 신에게 돌린다면, 그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찬송과 영광은 창조주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드리는 합당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만 찬송을 해야 합니까? 혹시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드릴 찬송의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시편과 그 외 많은 성경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 주님만이 우리의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세세무궁토록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2. 왜 찬송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찬송해야 할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때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찬양하는데, 왜 찬양합니까? 찬송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 나에게 찬송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구원의 감격 때문에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430년 동안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애굽 땅에서 나와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가운데,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뒤쫓아 오던 모든 애굽 사람들은, 수장되어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간 이후, 너무 감사하고 기쁘고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15:1-2). 높고 영화로우시며, 힘이요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굽의 손아귀에서도 건져주시고, 여기 홍해 가운데서도 구원하여 주심에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찬송이 끝나자 이어서 아론의 누이 미리암도 소고를 잡고 춤추며 찬송을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21).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원의 감격 중에 하나님을 찬송했을 때, 미리암도 모든 여인들과 더불어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며, 하나님 여호와께 동일한 찬송을 드렸던 것입니다.

 

다음은,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인한 일들 때문에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시편 107:8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인자하심은, 말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갚지 않으신 것도 그분의 인자이고요,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도 그분의 인자하심 때문이고요, 수십 년 동안 먹고 마시고 자고 타고, 지금처럼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고요, 기거동작하며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그분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삶의 영역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들 위에 높은 분이시기 때문에찬송해야 합니다(113:4). 하나님처럼 홀로 지고하신 분이 어디있습니까? 이 세상을 호령하던 군왕들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높으신 분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심으로 마땅히 피조물들의 찬양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 외에 또 다른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영원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왜 우리가 찬양해야 하는가 하며는, 구원의 감격 때문에 찬양하고,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들 때문에 찬양 하고, 여호와는 모든 나라들 위에 높은 분이시기 때문에,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영원하시기 때문에,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3. 어떻게 찬양해야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방법과 수단을 묻는 질문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우리에게 찬송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께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찬송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을 어떻게 찬송하라고 하시는가요.

 

시편 33:1-3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악기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으로 딴 데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연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을 악기로 연주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사람들 앞에서 뽐내기 위해서 하면 안 되고, 하나님 앞에서 연주해야 합니다.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연주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시편 47:1에서는,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손바닥을 치며 즐거운 소리로 찬송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편 68:4에 보니까, ‘하나님 앞에서 춤추며 찬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얼마나 좋으면 춤을 추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덩실덩실 춤을 추지 않습니까? 그처럼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너무 좋으니까, 하나님이 너무 좋으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너무 좋으니까, 그 앞에서 춤을 추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손을 높이 들고 찬송을 하기도 해야 합니다(134:2, 63:4). 손을 드는 것은, 기도하거나 찬송하는 하나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 자세는,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린다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두 손 들고,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시편 141편에는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는 치켜든 손, 저녁에 제물로 받아주소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손을 드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찬송하는 것은 내가 이 찬송을 제물로 드립니다하는 뜻입니다. ‘내가 항복합니다. 내 찬송이 하나님께 제물 되기를 원합니다. 받아주시옵소서라는 뜻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의미로 손을 들고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즐거운 소리와 큰 소리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시편 66편에서는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찬양하라고 했고, 역대하 20장에서는,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근심 걱정 중에 찬송하지 말고, 평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찬송하는 것입니다. 또한 심히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속으로 찬송하거나, 낮은음으로 찬송하거나, 억지로 찬송하거나, 다른 사람 구경하지 말고, 중심으로 큰 소리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마치 2002년도 전 국민이 대한민국을 외쳤을 때처럼, 목소리 높여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를 때는,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손바닥을 치며, 기뻐 춤추며, 손을 들고, 즐거운 소리로, 심히 큰 소리로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말하면,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이며, 감리교 창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찬송가를 많이 지었던 촬스 웨슬리는, 이렇게 찬송을 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1)곡대로 불러야 한다. 2)영적으로 불러야 한다. 3)열정적으로 불러야 한다. 성경의 진술과 함께 웨슬리의 이론도 참고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4. 우리는 지금까지 찬송을 누구에게 드려야 하는지, 왜 찬송해야 하는지, 어떻게 찬송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찬송의 능력입니다.

 

구역 성경에 보니까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 시대에, 모압과 암몬 나라가 침략을 해 왔습니다. 여호사밧과 온 국민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온 백성들이 금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왕이 군대를 소집하여 전장으로 나갈때에, 성가대를 조직하여, 그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서 나아가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했습니다. 이 찬양대원들이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노래했을 때, 하나님이 복병을 두어, 모압과 암몬 사람을 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적들을 전멸시키고, 유다가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대하 20:21-23). 유다 백성들이, 군대 앞에서 적진을 향해 진군하면서, 전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승리하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찬양대의 찬양을 받으시고, 대단한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유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신약의 바울과 실라도, 감옥에 갇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도, 밤중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모진 고문과 채찍도 그들의 기도와 찬송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같은 최악의 조건과 환경에서도 그들은,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심한 상처로 괴로움 중에도, 밤중에도,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랬을 때 빌립보 감옥 안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옥문이 열리는 초자연적인 이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간수가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의 가족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는 가운데 일어났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시편 기자의 상황을 본문에서 몇 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기자는 사람들로부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을 받았고 이것으로 인하여 시인은 밤낮으로 울었다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런 것으로 인하여 시인은 낙심하며 불안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삶의 환경 속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고 결단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똑같은 말씀이 마지막 11절에도 동일하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 소리가 들리고, 내 마음은 불안과 낙심이 되고, 현실은 전혀 찬송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오히려 찬송하리라.’ 이것은 일종의 역설입니다. 전혀 찬송할 상황이 아닌 대도 내가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고, 좌절이 있고, 절망이 있는 상황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숙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오히려 찬송하리다라는 결단 아래 찬송하면, 그 찬송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찬송가 413장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 찬송을 작사한 스패포드 부인은 미국에서 프랑스로 가던 중, 배가 침몰 되어 자신만 간신히 구조가 되고, 함께 갔던 네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시카고의 대화재로 인하여 그녀의 집과 재산마저 한순간에 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과 슬픔의 체험을 거쳐, 이 찬송의 찬송 가사가 나온 것입니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앙의 위력이, 이 가사에 담겨져 있습니다.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그녀도 시편 기자처럼 역시,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라는 신앙으로, 능력 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결론

 

찬송가 303장에 보면 어찌 찬양 안 할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예수 안에 있는 우리 한량없이 즐겁고, 주 성령의 위로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천국 음악소리 같은 은혜로운 그 말씀, 끊임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3절에도....‘어찌 찬양 안 할까로 끝이 납니다.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시고, 적용시켜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날마다 인자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고난과 시련 중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요 힘이요 능력이 되시는 주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혹시 여러분들의 찬양이 식어 지고, 매 마르고, 감동이 없고, 능력이 없고, 형식적인 노래였다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의 찬양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100:1-2). 아멘.

 

 

 

 

찬송/ 3031-2절만 찬송하겠습니다.

 

기도제목/ 오늘 말씀을 통하여(오늘 말씀대로), 우리의 찬송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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