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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4 26 - 녹록치 않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이정현 목사 202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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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10:23-25절 개역개정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제공: 대한성서공회

 

10:23-25, 녹녹치 않은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히브리서도 성령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성경이라는 사실과, 이 서신의 기록목적은 분명합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히브리인 또는 유대인이라고 볼 수 있고, 6장과 10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돌이켜 떠남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볼 때, 독자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독자는 흩어져 있는 유대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유대인이었는데, 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다수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극렬히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 성도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이 되어 복음은 확산이 되었습니다. 사방팔방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기독교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이유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게 힘이 드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지켜나가는데 어려움과 고난과 환란과 핍박이 많으니까, 특별히 옛날에는 한 민족이었고 유일신 하나님을 섬겼던 신앙의 동지였던 유대인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으니까, 우리가 잘 못 믿었나? 우리가 잘못 개종했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 성령께서 누구를 감동하여 영감시켜서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우월성을 여기에 기록해서 보냄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를 하고 때로는 배교를 경고하면서 환란 중에 소망을 갖고 끝까지 인내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전체의 내용은 유대교로 회귀하려는(자꾸 되돌아가려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우월성을 제시한 것인데,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일면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외적으로 신앙생활 하기가 힘들 때,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이 있을 때, 환란으로 인하여 나의 신앙을 포기하고 싶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 권면의 내용은 이미 앞에서도 말한 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고 있는 진리를 굳게 잡으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믿는 도리, 히브리서가 주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유일성(우월성)을 말한다고 봅니다. 여기의 그리스도의 충분성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 이후 신앙생활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존 맥아더라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받는 순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는다. 각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데 필요한 그 어떤 필수적인 자원도 부족하지 않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을 통하여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곧 모든 영적인 원천을 갖게 된다.” 맥아더는 기독교는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바울도 골로새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8-10). 구원과 그 이후 신앙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거나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으며 또 다른 어떤 사람을 믿거나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죄악 된 인간이 구원을 받는데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상대주의나 종교 다원주의하고는 완전 다른 내용입니다. 기독교는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은 예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4장에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39)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1장에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2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잘 알고 있는 말씀으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는 말씀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에서 말하는 믿는 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유일성(우월성)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의 움직이지 말라는 말은 죄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 원래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말라,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상태에서 조금도 빗나감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외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에서 좌우로 요동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감언이설에 넘어가도 말고, 누가 와서 폭력을 가해도, 악한자의 박해가 있어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경과 주위로부터 오는 시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는 도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기독교로 왔다가 어려움과 핍박으로 인하여 변절하거나 배도 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처럼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요동함이 없이 굳게 서서 끝까지 움직이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또한 움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온 마음과 뜻을 다해 그것을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굳게 잡기 위함입니다. 또한 굳게 잡고 있어서 끝까지 움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는 그처럼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하는 충분한 가치와 중요성과 미래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고난과 핍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을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며 살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신자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미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23절 상반절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다고 하셨습니다. ‘미쁘다는 말은 이쁘다는 뜻이 아니라, ‘미덥다, 믿음직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하신 분이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하셨는데, 우리를 부르신 이는 믿음직스러운 분이심으로 그분이 반드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3에서도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미쁘신 주님이 마침내 우리를 굳건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미쁘신 곧, 믿음직한 분이십니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믿는 도리를 흔들림 없이 굳게 붙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살다 보면 상황과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신앙생활을 중지하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시험에 들 때도 있고, 고난이나 시련이 닥쳐올 때도 있고, 계획한 일이 제대로 안 되고, 가정에는 안 좋은 일만 일어나고, 사업은 무너져가고 있고, 배우자가 믿지 않고 혼자 믿는 것 때문에 신앙을 지탱하기도 힘들고, 때로는 갖가지 유혹과 시련이 오기 때문에, 이런 것들 때문에 신앙이 흔들릴 때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것뿐만 아니라 잘 믿다가도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신앙생활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흩어진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보내어 권면하셨던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는 도리, 즉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유일성, 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으라.’ 우리가 이런 일로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그 진리를 굳게 붙잡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약속하신 미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굳세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전부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하고. 한 몸의 지체. 거룩한 공교회, 전세계적이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총수로서의 보편적 교회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돌아보아 살피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몸 안의 여러 지체들입니다. 지체들끼리는 서로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또한 바울도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15:7, 14)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16에서는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했고 데살로니가전서 5(11, 15)에서는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지체들 중에 연약함이 있거나 부족함이 있거나 어려움이 있거나 시험에 든 자가 있으면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권면하고 때로는 책망하기도 해야하는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가족들 중에 어려움과 병약한 자가 있으면 당연히 시간을 내서 찾아보고 물질로 도와 드리고 마음을 다하여 격려하고 기도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가족된 성도들 사이에도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격려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룩쉬스몬으로 의사들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가끔 환자들이 갑자기 고열이 나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또는 간질환자가 이를 갈고 온 몸을 파르르 떨면서 거품을 흘리며 격렬하게 발작하는 현상을 표현할 때 파룩쉬스몬, 격려하다는 말을 씁니다.

 

내 주변에 있는 같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희생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 감격하여 이웃을 사랑할 것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열정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되도록 격려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형제사랑하기를 계속하라’(13:1)고 했고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12:9-10)고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고 했고, 베드로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고 했습니다.

 

열열히 사랑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다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선을 베풀도록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형제자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선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치 초대교회 성도들이 극한 가난 중에 풍성한 연보를 하여 가난한 성도들을 도와주었고 또 자기들의 전답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선행이 열렬해지도록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뿐만아니라 다른 성구도 몇 구절 보도록 하겠습니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2:15-16).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4, 16-18).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또한 디모데전서에서도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려운 이웃들에게 쓸 것을 주며, 궁핍한 자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한 일에 힘쓰고, 친절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권면을 받고 있는 자들임으로 마땅히 이런 일에 앞장서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것처럼, 잘하고 있고 열정적으로 하고 있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을 더 열정적이고 더 최선을 다하고 끝까지 온 몸을 불살라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형제자매가 되었고 한 몸의 지체가 되었음으로 마땅히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분은 김치를 많이 담구어서 교역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어떤 분은 마스크를 사서 제공하기도 하고, 어떤 장로님은 매월마다 한 번씩 지체부자유자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맛있게 대접하기도 하고 혹자는 샘물교회에 가서 목욕이나 청소 봉사를 하기도 합니다. 이틀 전에도 유 모 집사님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맛있는 피자를 대접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칸트 은혜교회가 불이 나서 예배당을 다시 건축한다고 하니까 몇 백만원을 헌금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변에서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여러분들의 호주머니 사정도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돌아보며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베풀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아무튼 소망의 식구들은 서로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함으로 열렬한 사랑과 최선을 다하는 선행을 통하여, 나약하고 어려운 이웃들이 용기와 힘을 얻고 더욱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를 더욱 힘쓰라.

 

흩어져 있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했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를 더욱더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5절의 말씀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씀에서 우선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그들의 습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론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로 주장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주장은 이들은 곧 유대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하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다시말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여 유대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기독교공동체인 교회를 형성하여 예배를 드리고 함께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확산되어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고 그 교회의 일원으로 예배와 교제에 참여하게 되니까,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이 싫은 겁니다. 유대인들과 유대 기독교인들은 어느 정도 융화가 될 수 있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은 아무리 신앙을 가져도 하나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교회 오는 것을 싫어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예배 모임을 싫어하고 멀리하고 심지어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성경의 의도와 교회론을 잘 모르고 자기들의 주장이 강함으로 결국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습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들만이 선민이고, 자기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방인들은 사람 취급도 안하고, 마치 지옥의 불 소시개처럼 여기는 것으로,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못된 습관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런 생각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날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결산해야 할 날을 가리킨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같은 세 가지 의미는 결국 종말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과 예루살렘과 우주적 종말이 바로 그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주장이 다 맞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날은 곧 그리스도의 재림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5절의 말씀은 주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를 거부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따르지 말고 더욱더 열심히 모이자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모이기를 거부하는 저들을 따르지 말고 우리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교회 모임에 참석하자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거부하고 연합, 단결, 일치주의를 더욱더 강화하자는 것입니다. 재림의 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모임을 거부하거나 게을리했다는 책망은 듣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형제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도 말고, 나쁘게 말하지도 말고, 그 모임에 떨어져 있지도 말고, 그 모임에서 떨어져 나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헌금 설교한다고, 누가 꼴보기 싫어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죄인이 들어왔다고 나는 저런 사람하고는 같이 신앙생활 못한다고, 고난과 환란이 있다고, 누가 모이지 말라고 강압한다고 예배 모임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반기독교적인 세력들은 자기들의 힘을 규합하여 기독교인들의 예배 모임과 교육과 기도와 전도와 친교 모임을 방해하여 모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기독교의 예배는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우리의 예배는 결코 중단될 수 없으며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인하여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가정에서 인터넷으로 영상예배를 드리는 곳이 많이 있지만, 이것은 감염병이나 특별재난 시 임시적이며 대안적인 예배이지 정식적인 공 예배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제는 임시적 방편으로서의 예배를 벗어나서, 온 성도들이 한 예배당에 모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공예배 모임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와 신앙에 관한 한 정부의 명령에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신앙양심에 따라서 영적인 일을 결정, 시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하셨으니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시험이 오더라도 이것 놓지 말고 굳게 붙잡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에 속하여 있다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옆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내 것으로 여기며 그들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은 주의 재림이 반드시 있으며, 그날이 가까이 온 줄 알고 있습니까? 그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생각하여, 모이기를 패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주일 예배에 결석하는 것을 합리화하지 말고, 모든 모임에 더욱더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GS/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지만

 

기도제목/ 이 말씀(믿는 도리를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에 힘쓰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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