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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4 05 - 우리를 위한 주님의 전인격적인 십자가의 고난 이정현 목사 20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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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7:27-44절 개역개정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7:27-44, 우리를 위한 주님의 전인격적인 십자가의 고난

 

교회력으로 말하면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40일 간의 절기를 말하는데, 부활절 이전 40일간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 바로 오늘부터 시작이 되는데 이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고난주간의 클라이막스는 역시 이번 주 금요일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날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다음 주일 새벽에 다시 살아나시게 됩니다. 다음 주일을 우리는 주님이 사망권세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날임으로 부활절이라고 부릅니다.

 

고난주간은 사실 오늘 종려주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공생애 3년을 마치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오셔서 마지막 1주간의 사역을 하시는 것인데,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펴고 들고 흔들며 주님께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라고 찬송했던 날이라고 해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종려주일과 함께 시작된 올해의 고난주간에는, 예년과 달리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좀 더 깊게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저는 오늘 주님의 전 인격적인 고난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 한 주간은 주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십자가 고난으로 마감하시기 때문에, 그동안 새벽기도를 하지 못했는데, 내일부터는 새벽기도를 다시 시작하면서, 한 주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함으로,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를 배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역사적 유산을 남깁니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 Toynbee)는 세계 역사상의 우수한 문화와 문명을 고난과 역경의 소산이라고 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인류를 위한 모든 고난 중에서 가장 유익한 고난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상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고통의 크기도 컸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에 고통을 당하는 전인적인 고난, 삼중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겪으셨던 십자가의 삼중 고난을 되새겨 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풍성히 받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주님은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극심한 육체적 고난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1세기 로마시대에 극형중의 극형이었습니다. 주로 반역자나 극악한 살인자들에게 가해지던 형벌이었습니다. 교수형이나 단두대형은 육체적인 고통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사형법이지만, 십자가형은 육체적인 고통을 최대로 느끼며 몸부림치며 죽게 하는 사형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세로(CICERO)는 이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사형법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십자가형의 시행과정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십자가형에 언도된 죄수를 빈사상태에 이를 정도로 채찍질합니다. 둘째,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직접 지고 현장까지 가게 합니다. 셋째, 죄수의 옷을 벗기고 죄 패를 목에 걸고 십자가에 못 박아서 고통 가운데 서서히 죽어가게 하다가, 죄수의 다리를 꺾어 소생의 가능성을 배제해서 완전히 죽게 합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전 과정을 다 겪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주님은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받고 군병들에게 채찍으로 린치를 당하는 동안 이미 육체적인 에너지를 소진하셨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태로 머리에 가시채를 씌었습니다. 군인들은 갈대를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그의 얼굴에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 육체적인 힘마저 없는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무려 14번이나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양손 양발에 큰 대못으로 박히셨습니다. 이제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머리에서 손에서 발에서 한방울 한방울 피를 흘리셨습니다. 여기에다 주님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22편은 이러한 주님의 고난에 대해 상세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22:14-16).

주님은 이 육체적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본문 33-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여기 쓸개 탄 포도주는 이미 쓸개가 포도주에 오래도록 담겨 있어서 그 효과를 내고 있는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매우 쓴 맛을 내게 된 것으로, 마취효과가 있어 죄수들에게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혀끝으로 맛보신 다음에 거절하셨습니다. 대못에 박힌 손과 발에서 오는 엄청난 고통, 그리고 깊이 박힌 가시 면류관으로 인해 전달되는 찢어질 듯한 머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는 데 그 포도주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나, 주님은 그것을 마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동사가 미완료형(에델렌)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 마시게 하려는 로마 군병들과 마시기를 거절하시는 예수님 사이의 실랑이가 한동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들은 이거라도 조금 마시고 고통을 견뎌보라는 것이었으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시고 육체적인 고통을 그대로 다 겪으셨다는 말입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주님이 거부하신 것은 십자가 고통을 고스란히 당하겠다는 의미입니다.

 
2. 주님은 정신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은 육체적인 것일 뿐 아니라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고난을 포함합니다본문 39-40절을 살펴봅시다.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예수님은 지나가는 자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머리를 흔드는 것은 심한 조롱의 표현입니다(109:35).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예수님을 향하여 온갖 욕설과 비방과 희롱으로 모독적인 말을 퍼부었습니다. ‘너 성전을 헐고 있는 자여, 그리고 삼일 안에 다시 세우는 자여!’ 그들은 예수님을 비하하고 조롱하기 위하여 떠들었지만, 오히려 그 말은 놀랍게도 실제적으로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육체를 성전으로 말하였으며(2:21), 그 성전 된 육체가 지금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은 일찍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의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 속에 있는 공명심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좌초시키려는 마귀의 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이적을 행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신 것의 대가는 오직 모욕과 손가락질 뿐이었습니다.

41-42절의 말씀도 보시기 바랍니다.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한결 같이 예수님께 희롱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미워하던 예수에 대한 십자가의 처형이 이루어지자 마치 어린아이가 천박하게 장난을 치듯이 계속 조롱하였습니다실로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던 존재인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예수가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마음껏 그를 비웃었습니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여기 이스라엘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내신 왕이라는 의미가 보다 더 잘 살아나는 표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예수를 더욱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조소 섞인 표현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진정한 사실이었습니다.

주님의 당하신 정신적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시편 22편에는 메시야가 당할 정신적 고난과 관련하여 예언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22:6-8).

군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모두 벗기고, 그 옷들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벌거벗긴 채 만인이 보는 앞에서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수치와 모멸감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좌우에는 흉악한 강도들이 달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 강도의 두목인 것처럼 처형 현장을 꾸민 것입니다. 한 강도는 주님을 비방하며 욕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3년 동안 그토록 많은 말씀과 사랑의 수고를 기울여 가르쳤건만, 마지막 순간에 스승의 곁에서 용감하게 당국자들과 맞서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지 갈릴리에서 따라온 소수의 여자들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비참한 운명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여인들이 눈물짓고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여인들 중 주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나무에 달린 채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고 있는 십자가 아래에서 창백한 얼굴에 거의 혼절 직전까지 이른 주름 잡힌 여인의 통곡하는 모습이 주님의 마음을 갈래갈래 찢어놓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정신적인 통증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감내해야 한 수치심과 모욕감은 인류 구원의 대업을 향한 주님의 결단 없이는 결코 참아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능히 자기를 구원하고 조롱하는 군병들과 무리들을 제압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모욕과 조롱, 모든 정신적인 고난을 인내로써 참으시며 감내하셨습니다. 왜 입니까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정신적 고난을 참으신 희생과 인내를 보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죄에서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정신적 고난을 이기지 못하셨더라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주님은 영적인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또 하나의 고난은 영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적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난이었습니다.

주님은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 상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에 이르기까지 거의 여섯 시간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신 후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무슨 뜻입니까엘리야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말입니까아닙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1절의 말씀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절규였습니다. 주님은 인류의 죄 짐을 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치루셨고, 이 때 하나님 아버지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45절에는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였다고 했습니다. 온 땅에 임한 어두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님의 영적 고난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때 받으신 영적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창세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완전한 하나를 이루며 영교해 오셨습니다. 아버지 안에 아들이, 그리고 아들 안에 아버지께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위에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되셨고, 이 무서운 영적 고통을 아들은 어둠 가운데서 오직 홀로 감내해야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이 당하신 육체적인 고난은 한마디로 살을 찢고 피를 흘리는 고난이었습니다. 이 육체적 고난보다 더 심한 것이 정신적 고난이라고 봅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온갖 욕설과 비방과 희롱과 모독적인 말로 인한 고난일 것입니다. 주님의 이 고난이 누구 때문인지도 모르는 저 무지목매한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어이없는 말과 행동은 주님이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한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버림을 받는 영적인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육체적 고통도, 정신적 고난 앞에서도 한마디 말씀도 안 하시고 묵묵히 감내하셨지만, 영적인 고난 앞에서는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그런데 중요한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왜 주님이 이처럼 엄청난 고통의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까?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그분에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 잘못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요,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의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를 자원하여 짊어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그 고통을 온전히 감당해야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궁극적 목적인 인류 구속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모든 육체적 고통을 친히 다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극심한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영생의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심으로, 우리가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새 생명을 얻었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다 천국을 유업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소망 성도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에서 전인격적이며 총체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만 당하신 것이 아니라 정신도, 마음도, 그리고 영적으로도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흔히 십자가 고난이라 하면 손과 발이 못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린 육체적 고난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더 크고 심대했습니다.
 

주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극악한 죄인으로 취급되어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죄인들의 손에 의해 죽어야 하는 정신적 고통과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영적 고통까지도 당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습니다.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는 측량할 길이 없을 만큼 크고 넓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에 감격하여 평생 십자가만을 알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결단했고, 십자가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GS/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제목/ 십자가의 고난을 더 깊이 알게 하옵소서. 이제 이후로 십자가의 은혜로 살게 하시고, 바울처럼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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