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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3 29 - 감옥에서의 기도와 찬송 이정현 목사 202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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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16:16-34절 개역개정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6:16-34, 감옥에서의 기도와 찬송

 

역설(paradox)이라는 말이 있는데, 국어 사전에 찾아보니까 역설을, ‘표현 구조상으로나 상식적으로는 모순되는 말이지만 실질적 내용은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표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를들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바쁘거든 돌아서 가라.’ ‘사랑하기 때문에 너와 헤어진다.’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런 표현들이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4).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2). 이런 것을 가리켜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찬송과 관련하여서도 시편에 역설적인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11). 다윗이 처한 지금의 환경은 낙심되고 불안하고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괴로움 중에, 결코 찬송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그래도 나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는 다윗의 고백은 분명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서 찬송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주로 우리가 드려야 할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바울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기도와 찬송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도 분명히 역설적입니다. 말씀을 잘 들음으로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아시아 지역을 전도하다가, 바울은 아시아 서쪽 끝에 위치한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드로아에 있을 때 밤에 환상이 사울에게 나타나서 마게도냐의 한 사람이 손짓을 하며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의 손짓을 하나님의 인도와 부르심으로 알아서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단어 우리가에서 사도행전의 저자가 이 여행에 함께 동행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는 바울과 실라 뿐이었지만, 중간에 가다가 디모데가 합류하게 되었고, 여기 드로아에서 누가가 동행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선교여정에 바울을 포함한 4사람이 함께 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환상을 본 후 곧장 배를 타고 아시아를 떠나 마게도냐로 들어갑니다.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로 들어갔습니다. 이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고 했습니다. 빌립보를 마게도냐 지역의 첫 성으로 부른 것은, 그 도시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행정구역에서 제일 중요한 도시였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강가에 모여 있는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때 주께서 옷감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말씀을 듣게 하시므로 그와 온 집이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루디아를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자기 고향에서 많이 나는 고급 옷감을 가져다가 빌립보의 고급 로마 장교들에게 파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해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이라고 한 가지 더 덧붙여 설명합니다. 여기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기보다 유대인의 유일신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구원받은 사람은 아니며 구원과 가까이에 있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바울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아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에서 루디아의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게 됩니다. 루디아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곧장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남을 섬기며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 16장 앞부분에서는 중요한 한 사람 루디아가 개종을 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 이하에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극적으로 구원을 받아서 빌립보교회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때도 바울 일행은 루디아를 만났을 때와 같이 기도하는 곳을 찾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였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여종의 주인은 복수로 나타남으로 공동 주인인 셈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소녀의 불행을 착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매춘업의 포주들과 현대의 조주빈처럼 소녀들과 여자들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재정적 이익을 챙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의 점쟁이들은 주인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자들로 주인의 사유재산과 같았습니다.

 

그 여자가 바울 일행을 따라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바울의 설교를 들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이 나타날 때마다 이런 말을 하니까 바울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왜 바울을 괴롭게 했을까요? 그것은 만약 바울이 그 여자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이 귀신과 관련된 활동처럼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복음전파가 귀신의 활동과 연결되면,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엄청난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괴로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귀신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함으로 그 여자에게서 귀신을 추방시켜 줍니다. 귀신은 그 여자에게서 나가고, 소녀는 그 시간 즉시로 완쾌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귀신의 능력으로 인한 점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같은 이적과 표적으로 인하여 바울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보상과 대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19절 이하의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19-23). 사람을 온전케 해 준 덕으로, 바울은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빌립보의 사람들 중, 여종의 주인들이든, 관리들이든, 상관들이든 모두 다 자기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어리석고 법 없는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얻어맞고 두 발에 착고가 채인 채로 깊은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감옥 사진) 터툴리안이 마음이 천국에 가 있는 사람은 그 발이 착고에 채워져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더라도 그 육체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갑자기 당한 상황이고 너무 무식하게 일이 진행되어서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 속에 있었고 매를 심하게 맞아 육체적으로도 큰 고통 속에 있었던 그들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것도 조용히,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기력은 미약하고 손발이 부자연스럽지만, 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도하고 찬송한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송한 시간이 한 밤중이라고 했는데, 이는 보통 밤 12시를 말합니다. 그러니 완전 야밤입니다. 이들이 이 시간에 일어난 것은 아무래도 매를 심하게 맞은 것 때문에 온 몸이 욱신욱신하고 피멍이 들어서 많이 아팠을 것이고 그리고 저녁에 감옥 깊은 곳까지 들어 왔기 때문에 저녁을 먹지 못하여 배도 고팠을 것입니다. 그런데다 발은 착고에 차여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몸은 아프고 불편하며 배는 고프지, 그러니 잠이 오겠습니까? 그들은 그 야밤에 아픔과 고통을 무릎쓰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기도가 나온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기도이거나, 아니면 자기들에게 매질을 한 저 나쁜 사람들에게 벌을 내려 달라고 저주를 퍼붓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바울과 실라가 이런 기도를 하였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저들의 이런 기도를 들으사 역사하셨을까요? 그러므로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핍박자들을 저주하는 기도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실라가 이 감옥 안에서 무슨 기도를 하였을까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준 것 때문에 이렇게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속히 우리를 이곳에서 석방시켜 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무죄석방을 위하여 기도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런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며 또한 어떤 어려움과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복음 전파를 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고 봅니다. 물론 이같은 기도 조차도 추측일 뿐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도했던 내용 즉,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해 달라는 것과 이런 고난을 통하여서 복음의 진보가 있게 해 달라는 것을 사실로 추측하는 것은, 그들의 기도 이후 곧장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사실과, 차후 바울이 다른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한 기도의 내용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환난 중에도 심한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의 이 기도는 자연스럽게 찬송으로 이어집니다. 찬송은 감사와 기쁨이 있을 때 감격스럽게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너희가 괴로울 때 기도하라, 기쁠 때는 찬송하라’( )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런 고통과 시련과 억울한 폭행과 불법적인 수감을 당할 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함으로 그 마음이 변하여 기쁨과 평안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 찬송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기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찬송하는 것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으면 억울한 옥살이 중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않으면 이 감옥에서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육체는 고통스럽지만 마음의 평안함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의 찬미하매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과거부터 미래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과 실라의 찬송은 하나님이 이들의 기도와 찬양을 받으시고 큰 지진으로 옥터를 움직이실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한밤중에 시작된 기도도 한 동안 계속되었고 이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찬양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육체는 깊은 감옥 지하에 갇혀있으나 그들의 영혼은 영적인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시간과 사정과 환경을 초월하여 믿음으로 기도하고 영적으로 찬송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후 4:8)고 한 것처럼, 빌립보 감옥에서도 그들은 주를 향하여 기도하며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속적으로 찬양하고 있는 이 소리를 다른 죄수들이 듣고 있었습니 다. 여기 듣더라’(에페크로온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 이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고통과 어려움 중에 무엇을 하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제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들은 기도응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매인 것들이 다 벗겨졌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이적은 바울과 실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섭리 중에 있는 간수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지진으로 인하여 간수는 자다가 깨어났고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가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로마법에 따른 처형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자기가 지키던 죄수가 도망가면 자기가 대신 그 감방에 들어가야 하는 법이 두려워서 죽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로 이미 바울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가지고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어,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간수의 이 질문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죄인들이 생애 가운데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바울도 가장 정확하고도 중요한 대답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믿으라고 것이고 믿음의 대상을 주님으로 정하면, 너 뿐만아니라 집안의 모든 식구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비단 이 간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 외의 모든 간수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계기로,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밤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씻겨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제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한 간수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의 가족들도 각자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서 모두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전천후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대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한 간수 가정이 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고 다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즉, 한 간수의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미리 바울과 실라를 이곳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이 루디아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바울과 실라를 사용하셨고 이 부분에서는 고난과 고통 중에 간수의 가족들을 구원하시고자 바울과 실라를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 두 가정을 중심으로 빌립보교회가 탄생하게 되고 바울이 선교사역을 다할 때까지 바울의 신실한 선교 동역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 사이의 아름답고 멋진 동역자 관계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의 주제와 관련하여 좀 더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착고에 매이고 감옥 생활을 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하였다면 기도하고 찬송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거나 하소연하고 선교사역에 낙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움직였고 옥문이 열렸고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간수의 가족들이 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들의 기도와 찬송을 받으시고 놀랍게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에는 이처럼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어도,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적과 표적이 일어나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게 합니다.

 

역대하 20장의 말씀을 보면 모압 연합군이 남 유다를 침략해 왔을 때, 여호사밧 왕은 부들부들 떨면서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금식하라고 선포합니다. 왕과 모든 백성들이 함께 모여 금식하며 저 배은망덕한 모압과 암몬이 연합하여 우리를 치러 올라오니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몰라서 하나님 여호와만 바라봅니다. 우리를 저들 가운데서 건져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여호사밧 왕이 레위 자손들 가운데서 노래하는 자들을 뽑아서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게 합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전쟁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온 백성들이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이제 전투에 나아가면서 찬양대를 앞 새워서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곧 기도와 찬송으로 전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났습니까? 이들이 충분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나아갔을 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그들을 치게하심으로 그들이 패하였고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22-24). 전쟁에 승리하자 모든 백성들이 나팔을 불며, 하나님 여호와께 찬송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도와 찬송했을 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악신이 들렸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울 왕을 사로잡아 마음대로 그를 조종하였던 것입니다. 왕이 미쳤으니, 그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며, 대내외적으로 나라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수금을 잘 켰던 다윗이 부름을 받고, 사울 왕 앞에서 수금을 연주했더니 그 악신이 떠나갔더라고 말씀합니다. 연주한번 했는데, 수금 한번 켰는데, 하나님 앞에서 찬송하나 불렀는데,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대단한 영적인 연주자였습니다.

 

결론

 

여러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개되는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의 이 시나리오를, 실제로 빌립보 무대에 올려놓으심으로 현대인들에게 보여 주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한 사람의 선택된 백성이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이 전도자의 특별한 상황을 통해서라도 그 사람을 찾아가서 기필코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점하는 귀신들린 여인을 낫게 하시므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깊은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창세전에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그리 만들어 바울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 하여금 그곳에 들어가 사람과 가족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환경과 이 자리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모든 상황에서 복음전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당했던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불평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바라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에 널리 떨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카톨릭 신자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신교를 박해했습니다. 특히 신교의 대표자였던 세오졸프를 칙령 거역죄라는 죄목으로 파리 탑 위의 감옥에 가뒀버렸습니다. 그 해 부활절에 루이 14세는 황제의 위엄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에 나서려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세오졸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찬송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심 성령 증거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161)라는 곡이었습니다. 이때 왕의 왕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가사가 루이 14세에게 천둥처럼 들려 왔습니다. 큰 충격과 두려움이 그 속에서 일어났고 그는 곧장 감옥으로 달려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후 그를 석방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찬송은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프랑스에서 가톨릭보다 기독교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찬송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루하루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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