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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8 - 모세와 그리스도의 충성 이정현 목사 2019-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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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3:1-6절 개역개정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3:1-6, 모세와 그리스도의 충성

 

히브리서의 저자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구약 성경을 많이 이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구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록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구약성경을 잘 일고 있었던 바울이 저자라고 얘기하지만 전체적인 문체를 볼 때 바울의 다른 서신과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바울의 저작설을 부인합니다. 또한 구약성경에 막힘이 없이 능통했던 아볼로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내외적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감추어 두셨다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는 누구에게 보내진 서신입니까? 다시 말해 히브리서의 독자는 누구입니까? 히브리서를 읽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했으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한 히브리 성도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많은 핍박과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보냄으로 그들로 하여금 인내로서 믿음을 잘 지킬 것을 권면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서의 내용 전체가 그리스도의 중요성,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본문은 하늘(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부르심 즉 선택받고 거룩한 백성이 된 우리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집이 된(6)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단지 한번 생각하고 깨닫고 고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담아두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에게 이처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그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도 많이 사용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모세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13:2). 또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갔던 사람들이 느헤미야의 인솔로 3차 귀환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고국인 유다가 멸망하고 폐허가 된 상태로 놓였다는 얘기를 들은 왕이, 느헤미야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고, 이곳에서 유다까지 가려면 많은 어려움과 적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음으로, 내가 너와 함께할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겠다는 하였습니다. 이방 왕이, 느헤미야를 안전하게 호위하라고 군대장과과 마병까지 보내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때의 군대 장관과 마병은 왕의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자를 신약적인 용어로 사도라고 합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마태복음 1040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예수님 외에도 신약에는 사도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도 있고요, 그 다음에 바울과 바나바도 사도이고요( ), 실라( )도 사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으로 그 이후로 속사도들도 많이 있지만, 이 많은 사도들 중에 가장 위대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사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시고 전파하시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쳐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완수하심으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가 되셨습니다. 바로 그 사도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사도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했다면, 이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주님이 사도로서 사역을 하셨고, 또한 대제사장으로서 사역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도의 역할과 대제사장의 역할은 서로 다릅니다. 사도는 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 반면 대제사장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사역을 한다면, 대제사장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역할을 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리스도가 사도로서 사람들 앞에 하나님을 나타내고,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사람을 나타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사도는 예수님의 지상사역에 적용되고, 대제사장은 그의 하늘 사역에 적용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는 인간 가운데서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시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대변자가 되기도 하신다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그 사역의 구분점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역은 단회적이면서 영원한 효력을 지니는 사건이나, 우리를 위한 그분의 중보사역은 지금도 계속되는 반복적 사역입니다.

 

히브리서만 보더라도, 예수가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증거는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히브리서 4:14/ ‘예수는 승천하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다.’

5:5/ ‘예수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다.’

5:10/ ‘예수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시다.’

7:26/ ‘예수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대제사장이시다.’

8:1/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하늘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적어도 10곳 이상에서 그분은 대제사장이신데, 어떤 대제사장이시며, 어떤 역할을 하시는 대제사장이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그분에게 고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뿐만 아니라 4장에서도(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 믿는 것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가 믿는 사도시오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과 시선을 그분에게 고정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신 분으로, 하나님의 집에 아들로 충성하신 분이십니다.

 

2절 이하에 보면 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타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 또는 하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하나님의 권속,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교회를 말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즉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하셨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모세는 단지 교회를 섬긴 일꾼일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셔서 그 교회를 스스로 세우시고, 자신의 교회의 머리이자 주가 되셨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 2절 이하 마지막 절까지, 계속하여 저자는 주님이 모세보다 어떤 면에서 우월하신 분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여기서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놓은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아래의 도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 예수님

 

선지자로 섬겼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섬기셨다.

종으로 충성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로 충성하셨다.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백성들을 인도하였다. 죄의 노에 상태에서 사람들을 인도하셨다.

율법을 집행하셨다. 율법을 성취하셨다.

범죄 하였다.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죽어 장사되었다. 죽으셨으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정죄만 할 뿐 결코 구원할 수 없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의와 영원한 구원을 줄 수 있는 사역을 감당하셨다.

일시적인 영광을 누렸다.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이 모든 내용들을 담아서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짧게 말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을 다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을 다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종으로 충성으로 다했다는 말에서 종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노예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한 지위가 있는 왕의 신하, 왕명을 수행하는 사절, 왕이 맡겨준 직무를 수행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집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충성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적으로 모세의 충성에 관하여 말하면서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모세 이후에 이루어질 사건과 관계되어 있는데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이루게 될 구원의 복음과 관계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단편적으로 말씀하실 일, 그리고 후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실 일에 관하여 증거하였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수행원으로서, 왕으로부터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관하여 증거 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1장을 통하여 이 본문을 좀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하고 불평을 하니까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내어서 그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백성들이 범죄 했다고 하며 모세에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을 때,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달라, 물린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8)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더니 진짜로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죽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단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고안하여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고 있는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모세에 의해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을 성실하게 했던 사람, 말씀대로 충성스럽게 했던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런데 장대에 매달린 놋뱀은 무엇을 상징하고 예표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은 죽은자가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8-30)장에 보면 예수님의 변화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올라가셨는데, 거기서 갑자기 예수님의 용모가 빛나는 광채로 변화가 되시고,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하십니다. 무슨 얘기를 나누시는가 하며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예수님하고 대화한 주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별세, 예수님의 죽음,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앞에 두고 예수님이 자신의 별세에 대해서 일러주셨다는 겁니다.

 

결국 모세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의 복음의 전하실 것을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 다는 것으로 증언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시기 전에 그리스도의 변화 중 모세가 나타나서 그리스도와 그 구원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시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주님께서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말씀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며 증언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하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민수기 12:7에서 "내 종 모세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그는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인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에 아들로서 충성을 다하셨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경 원문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집안에서() 충성을 다하였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위에서(에피) 충성을 다한 것으로 말씀하심으로 그의 우월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충성심에 관하여서는 성경 몇 구절을 읽어 드림으로 설명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6-11).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비교를 통해 볼 때, 예수님은 모세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존귀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일부이며 관리자로서 극진히 충성을 다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우주를 만드셨고 그 집의 건설자이시며, 아울러 그 집의 아들로 충성을 다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들로서 충성을 다하셨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 살아 나사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아울러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만국을 통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라오디게아교회에 편지하면서 주님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모세보다 우월한 충성된 분이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분은 충성스럽게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시며, 교회를 다스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보다 더 우월하신 그리스도로서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받으셔야 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모세보다 그리스도가 훨씬 더 우월하고 중요하심으로, 그분을 지속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흔들리지 말고 그분만을 생각하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6절에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한 모습을 볼 때 우리마음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성도답게 생활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첫째, 소망을 담대히 해야 합니다. 여기 소개 된 담대함이란 단어는 신뢰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 단어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의 확신과 담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장차 얻고 누리게 될 천국의 복락과 상급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유혹과 핍박이 온다 해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만 확실하다면, 그 안에서 기쁨과 감사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확실할 때 주의 일에 열심을 낼 수 있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나 또한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6:14)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랑했던 유일한 자랑거리, 자신의 삶에서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와 관계하여 말한다면, 곧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속적인 자랑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 누구 앞에서도 성도들이 자랑해야 할 것은 은혜로 인하여 구원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유일하고 지속적인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이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어떤 환란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런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결론

 

어제 국민일보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였던 신사훈 박사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새어머니의 인도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에는 영어성경을 25번이나 읽었답니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는 학생으로 알려저서 신사무엘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일본으로 대학을 진학해서 대학생 때 성경을 읽기 위해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독어 불어를 마스터 했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가서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귀국을 해서 서울대학교 교수로 갔습니다. 이 사람은 강의를 하면서 공산주의를 반대했고 학생들에게 국산품애용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당시 박태선과 문선명과 같은 이단과 맞서 싸우다가 많은 핍박과 생명의 위협과 테러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신학교 1학년 때 이분으로부터 통일교에 대한 비판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통일교도들이 와서 신교수님에게 인분을 끼얹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교회도 개척을 해서 원문을 성실히 해석해서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는 목회를 했습니다. 신사훈 교수가 서울대 교수 정년을 앞두고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은퇴 후에 어떻게 살 것입니까?’ 그는 저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지금처럼 충성스럽게 살다가 죽는 게 내 생의 목표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세처럼 신사훈 박사처럼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함과 하나님의 자녀란 자랑거리를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장차 큰 상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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