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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180120 -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이정현 목사 2019-01-20 추천 0 댓글 0 조회 1281
[성경본문] 잠언3:34-35 개역개정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3:34-35,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지난주에는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성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예수님의 겸손은 섬김으로 나타나셨고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은 순종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꺼꿀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섬김과 순종을 보니까, 정말 그분은 겸손하신 분임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겸손의 멍에를 메고 겸손을 배워서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성경을 통하여 교만했던 사람과 그 삶의 결과와 겸손하게 살았던 사람의 결과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뻔한 결론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말씀을 주의 깊게, 사모함으로 잘 들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온화하고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교만한 사람이 거칠고 불친절하고 완고한 것입니다. 이 완악한 마음에는 말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말씀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에서,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 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밭에, 어떤 씨는 가시밭에, 어떤 씨는 옥토에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떨어진 씨앗이 땅 속에 묻혀야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데, 길가 밭은 딱딱하고 완고하여 전혀 씨앗이 땅속에 묻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새들이 와서 주어먹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땅에는 열매 맺을 수 없음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땅은 곧 교만하여 완고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딱딱한 사람, 꽉 막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 마치 딱딱한 벽에다 공을 던지면 그대로 튕겨져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어지지 않고 튕겨 나오는 사람입니다. ‘저걸 설교라고 해, 논리와 이성에 맞지도 않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고 있어, 과학적인 사고와 생물학적인 입장에서 전혀 맞지 않는 설교를 하고 있다고, 저런 것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해서 설교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서 나가버리는 사람은 마음이 완악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분명 교만한 사람입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전혀 말씀을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만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에 수두룩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이 애굽의 왕 바로이고요(4:21, 7:3, 14, 8:15, 9:7, 10:1, 11:10, 14:4,7), 또한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보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완악했습니다(29:18 81:12, 3:17). 하나님이 바로의 완악함에 대하여서 10가지 재앙으로 벌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징벌하여 광야 40년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수십 차례 말씀하시고 권고하셨음에도, 그들이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듣지 않자, 하나님이 징벌하신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 결과는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교만한 자들의 대표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고 성전과 회당 중심으로 살았고 때때로 종교적인 금식도 하고 선행도 하고, 겉모습만 볼 때에는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가르치고 있었던 이들이, 정작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완악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든자를 고쳐주면 됩니까 안 됩니까? 예 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급한 환자만 치료해 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기 위하여 그 사람을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의 질문은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 앞에 종교 지도자들은 한 마디도 대답지 않고 저 자를 고치기만 하면 안식일에 일하는 자로 책잡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그들의 태도와 마음이 완악함을 아시고 노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3:5).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책잡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 왕이 나옵니다. 이때의 헤롯은 아그립바 1세를 말합니다. 그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사도들을 잡아들이며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그는 야고보를 잡아와서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광경을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베드로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적적인 방법으로 베드로는 감옥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헤롯이 베드로를 찾았지만 이미 베드로는 그곳을 떠난 이후였습니다. 왕은 파숫꾼을 죽이고 자기가 머물고 있는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어느날 헤롯이 왕복을 입고 단상에서 백성들 앞에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 연설을 듣던 백성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12:22).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 소리에 헤롯은 우쭐하고 자기가 정말 신이 된 것처럼 교만하였습니다.

 

헤롯 아그립 1세의 교만의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12:23).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죽였던 헤롯, 복음을 가로 막았고, 마음이 하늘처럼 높아버린 교만한 헤롯을,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치시니 벌레하나에게 먹혀 죽었습니다.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분봉 왕이, 신처럼 호령하던 그의 권세가 하루아침에 벌레에게 먹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어떻게 다루십니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헤롯이 대단한 것 같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고, 그가 말하면 안 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교만하면 하나님이 한 순간에 이처럼 버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잠언서 기자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거만한 자를 비웃으신다고 하셨고, 그런 교만한 사람은 미련한 자인데 그런 자의 영달함을 수치스럽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영달은 사람이 우러러 볼만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 교만을 피우면 내가 수치스럽게 하시겠다고, 남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잠언서는(18:12)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이라고 하셨고,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고 하셨고(16:5), 시편은(147:6) “여호와께서 악인들(교만한 자)은 땅에 엎드러뜨리신다고 하셨고, 베드로는(벧전 5:5)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근거하여 볼 때 교만은 하나님의 응징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교만은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막 교부(Desert Father3세기 경에 시작된 주로 이집트스케티스 사막에서 생활한 은수자, 금욕주의자, 수사, 수녀(사막 교모)이다. 가장 잘 알려진 사람으로는 270-271년에 그 사막으로 이주하여 사막 수도원주의의 교부이자 창시자가 된 대 안토니우스이다)8가지 마귀가 있다고 합니다. ‘탐식, 간음, 탐욕, 슬픔, , 태만, 허영, 교만입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단계의 마귀가 탐식이고 가장 높은 단계의 마귀가 교만의 마귀라고 했습니다. 교만은 가장 악한 것이고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업이 잘될 때 조심해야 됩니다. 수십억의 매출을 올렸다고 자랑할 때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201의 경쟁율을 뚫고 SKY대학에 들어갔다고 밥 살 때가 아닙니다. 자식들이 호텔에서 결혼한다, 남편이 승승장구한다고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이만하면 건강하다 백수는 하겠다고 할 때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한 것처럼, 내가 잘해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노력해서, 심지어 내가 기도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교만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교만하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거덜먹 거리면, 이럴 때 뭐가 된 줄로 알면, 이럴 때 마음을 높은 데 두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깔보고 무시하면 하나님이 순식간에 거두어 가십니다. 한 순간에 여러분들의 자랑거리를 없애 버리십니다. 단지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그 복을 잘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교만과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고, 이제는 겸손과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사도들에게 구걸을 하자 사도들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그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나서 기뻐 뛰며 찬송하며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인줄 안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몰려 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이적이 우리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인의 능력과 경건이 이 사람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밝힌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을 믿는 믿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한껏 낮추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 사도행전 14장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바울과 바나바의 겸손한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제1차 전도여행 길에 루스드라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만났는데, 바울이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줄 알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 즉시로 일어나 걸었던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하였고,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를 끌고 오고 화환을 챙겨 와서 바울과 바나바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두 바씨를 완전히 신처럼 받드는 것입니다.

 

두 사도는 자기들의 옷을 찢으면서, 무리들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우리도 여러분과 똑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니, 창조주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에게 제사하는 일을 말렸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결코 숭배 받아야 할 신이 아니며, 존귀와 영광과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이 비유는 누가복음 18장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합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우선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함을 얘기했습니다. 자기는 토색, 불의, 간음, 이 세리와 같지 않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종교적인 생활을 자랑스럽게 밝힙니다. 나는 1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은 금식을 하고 소득의 11조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이때의 금식은 이틀 동안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 온전한 금식이고, 11조도 생활비 중에 내는 11조가 아니라 온전한 11조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모범적인 대단한 신앙인이 분명합니다. 그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렇게 기도 아닌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 제가 이처럼 위대함을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 반면 세리는 멀찍이 서 있었고,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세리는 기도하는 태도도 바리새인과 다르고, 마음도 다르고, 그 내용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기도를 하지만,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바리새인은 옆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함을 얘기했으나, 세리의 마음은 그져 하나님의 면전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가련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리고 바리세인은 자기의 의로움과 경건을 들어냈지만, 세리는 나는 죄인이오니 나의 죄를 덮어달라고 강청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판단은 어떠했습니까?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어째서 세리가 이같은 은혜와 사랑과 좋은 평가를 받은 것입니까? 당시의 세리는 유대인들의 신발에 묻은 똥처럼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죄인의 대명사로 여김을 받았고, 매국노요, 로마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으로 취급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자가 의롭다함을 받았다구요? 그 이유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 이 같은 예수님의 결론은 청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겸손과 겸손의 결말에 관하여 이것처럼 더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론

교만하면 안 됩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업어치기로 내팽개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비웃음을 당합니다. 그의 영달을 수치스럽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하나님은 심연에 빠지게 하십니다. 결국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비결이고, 높아지는 비결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22:29),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10:17),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시고(11:2),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이 기쁨을 주신다(29:19)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계속적으로 쓰임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결국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입니다(15:33). 그리고 겸손에 관한 가장 귀한 축복의 말씀은 잠언 224절의 말씀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6:8)고 하셨고,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고”(2:3),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게사는 것입니다(벧전 5:6).

 

자랑스러운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탐정리라는 섬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김제의 한 부자 집에 찾아가 머슴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아 그 자신은 물론 주인집까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그곳에 금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다가 부잣집 주인 조덕삼과 머슴인 이자익 청년이 영수가 되어서 교회를 받들어 섬기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맡았던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개척하다보니 이곳 금산교회에만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교사가 없는 날은 으례히 조덕삼 영수보다 설교에 능한 이자익 조사가 주일 설교를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1908년에 조덕삼과 이자익을 사이에 두고 장로 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투표 결과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떨어지고 머슴이 장로가 된 것입니다. 곧 교회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졌습니다. 이때 자기 집 머슴이 장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덕삼 영수는 일어나 성도 여러분! 참 감사합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봉사하기가 어려운데, 젊은 이자익 영수를 장로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어 섬겨서 교회를 부흥시킵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교인들이 감동을 받아 그 다음해에 조덕삼 영수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자익 장로는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의 총회장에 세 번이나 당선되었습니다. 한편 조덕삼 장로님의 겸손하고 훌륭한 믿음은 자자손손 계승되어 오늘날까지도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위선된 겸손 말고, 가짜 겸손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겸손을 배우고, 조덕삼 장로가 보여준 그 겸손을 배워서, 진짜로 겸손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됨으로, 약속된 귀한 은혜와 복과 사랑을 풍성히 누리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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