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태복음11:28-3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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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마11:28-30, 나는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2019년도에는 예수님의 성품에 관하여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1월은 예수님의 성품 중에 겸손에 대하여 설교합니다. 마태복음 11장은 예수님의 이 성품에 대하여 너무나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자기 자신의 성품에 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온유’라는 단어(프라우스)는 ‘사려 깊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친절한 성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이처럼 사려 깊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친절하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온유라는 단어가 10회 정도 사용이 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이 모세와 관련된 기록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하나님이 모세의 온유함을 칭찬하시는데,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볼 때, 덤벙덤벙 대지 않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성품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온유함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온유함 만큼이나 하겠습니까? 모세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그의 온유함이 뛰어난 것이지만, 감히 주님을 어느 인간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모세는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은 온유함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겸손’이라는 단어(타페이노스)는 ‘마음을 낮은 데 두는 것’ 또는 ‘낮음’을 말합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술하면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묘사하면서 마태는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는데,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새끼를 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겸손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멋있고 위풍당당한 군마, 준마를 타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입성하실 수도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시므로 그의 겸손한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사용된 ‘겸손’이라는 단어를 마태복음 11장 본문에서 사용한 ‘온유’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프라우스)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온유와 겸손이라는 단어는, 같은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동의어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것은 그의 겸손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인 대구법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주님의 내적인 겸손이 외적인 온유함으로 표출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본문에서는 주님의 겸손을 비슷한 단어를 하나 더 사용함으로 반복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겸손의 세 가지 측면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이 겸손하신데, 그 겸손이 무엇으로 나타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겸손은 성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선재’라는 말은 ‘먼저 존재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이 땅에 태어나시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그분은 태초부터, 창세 전에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의 태초는 영원 전 태초를 말합니다. 그때에 말씀이 계셨다고 했는데, 그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의 이 ‘말씀’에다가 그리스도를 넣어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태초에 그리스도가 계시니라,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리스도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영원 전에 이미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의 긴 기도가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5). 여기서 주님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으로 볼 때, 예수님은 창세전에 이미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하여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 내신 바 되었으니”(벧전 1:18-20). 이것은 창세전부터 계셨던 그분이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가 지상에 나타나실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즐거워했다는 말은 대망 중에 크게 즐거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은 과거에 믿음으로 멀리보고 기뻐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리해서 말하면, ‘아브라함은 내가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을 미리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했더니, 유대인들이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으로부터 2천 년 전의 인물이고, 예수님은 지금 30살 초반이신데, 그런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보았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네가 아직 한참 어린데 2천 년 전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냐? 이 반문에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아담도, 천지도 있기 전에 선재하셨던 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선재하심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 전부터 하늘에 계셨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분임을 알게 됩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태어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곧 성육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던 미가 선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나오는데, 그분은 영원 전부터 계신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분은 영원 전부터 게신 자인데 이제 베들레헴에 이스라엘의 목자로 태어나신다는 말씀입니다.
영원 전에 선재하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육신 사건은 대단한 주님의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연약한 사람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지극히 낮은 자리에 오셨기 때문에 성육신은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빌립보 교우들에게 전하였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사도는 교우들에게 너희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기를 바라는데 그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아느냐, 주님의 마음은 바로 겸손이다. 어느 정도 겸손하신지 여기를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 ), 그러나 그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다, 자기를 비웠다( ),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사 자기를 낮추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명확하게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정말 자기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신 겸손한 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겸손은 섬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님이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지극한 겸손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상대편의 발을 닦아 주려면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많으니까 여러 번 대야에 물을 떠 와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발을 다 씻겨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3-14).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대인의 집에 들어가면, 그 집안의 종들이 손님의 발을 씻겨주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도 손님의 발을 닦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선생과 주가 되어서 너희들의 발을 씻겨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선생과 주일뿐만 아니라 만유의 주이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하찮은 인간들의 발을 씻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겸손이 섬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주님이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인자가 세상에 오신 것은 섬기기 위함이시다, 자기 목숨까지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고 헐벗고 못 먹고 병들고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섬기셨습니다.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말씀으로 위로하며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천국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인간을 섬기기 위하여 오신 주님은 그 목적대로 사람을 잘 섬김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겸손은 섬김으로 충분히 나타났습니다.
3. 예수님의 겸손은 순종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자기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사셨던 것입니다. 주님에게 주어졌던 그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띄고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사명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제 곧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을 아신 주님은 자기가 지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어 하나님께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더욱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주님이 마셔야 할 이 잔이 너무 쓰고 고통스럽고 힘들고 무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급히 자기의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을 내 세웁니다. ‘하나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찾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그처럼 애를 쓴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7-9). 주님이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였더니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아들이면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간절히 구하였더니 하나님이 들어주셨고, 그의 순종으로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주님이 붙잡히시고 다음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장장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서 갖은 고난과 수모와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시며 한 방울 한 방울 피를 흘리셨습니다. 마지막 그는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기도하셨고, 그렇게 처절하게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마침내 당신의 목숨을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앞에서 살펴 본대로 자기를 낮추사 사람과 같이 되신 것은 지극한 그의 겸손을 나타내고, 그 다음에 십자가에 봇 박혀 돌아가신 것은, 그의 능동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겸손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성품은 겸손하십니다. 그 겸손함이 성육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선재하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그의 지극한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동화되셨습니다. 인간의 자리, 그들의 희노애락의 자리에 함께 참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와 선생이시지만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왕으로 오셔서, 무릎 꿇어 일하는 종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죄에서 건져주시고 구원과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자기를 한껏 낮추신 주님의 겸손은, 마지막 십자가에 죽는 순종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주님의 성육신을 볼 때, 그분이 얼마나 겸손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무릎을 꿇고 사람을 섬기는 모습을 볼 때, 그분이 얼마나 겸손한지를 알게 됩니다. 또한 주님이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이 얼마나 겸손하신지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이 성품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항상 낮은 데 마음을 두시고, 주변의 사람들을 섬기고, 끝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겸손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역자들, 중직자들, 교사들, 구역 인도자와 구역장들, 찬양대원들, 먼저 믿은 자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내 마음을 그들의 낮은 자리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살펴서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하고 그들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또한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4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 준하여 우리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겸손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올 한 해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겸손을 배워서, 겸손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은혜 입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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