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4:20-2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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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요 4:20-26,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
2월의 주제는 ‘교회의 기능에 충실하자.’입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을 성실히 잘 감당하자는 말입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 즉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하신 4가지 중요한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4대 기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배, 전도와 선교, 기독교교육, 구제와 봉사입니다. 2월 한 달 동안 이 4대 기능에 대하여 살펴는 데,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예배에 대하여 알아봄으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사마리아성 수가라는 동네에서 한 여인을 만나서, 그 여인에게 자기를 계시하심으로 그 죄 많은 여인을 구원하시고, 또한 그 여인에게 진정한 예배에 관하여 가르쳐 주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 앞부분부터 시작을 해서 26절까지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는데, 첫째와 두 번째는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앞의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예배에 실제 적용하는 부분이 될 것입니다.
1. 용서 받은 사람은 예배를 열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를 오고가고 할 때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이렇게 요단강 동편 땅으로 왔다갔다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을 하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가라는 한 동네를 지나가시다가, 너무 피곤하여 잠시 우물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때 마침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주님이 그 여인보고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만일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생수를 줄 수 있습니까, 이 우물은 야곱이 준 것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3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는 말씀을 시작하신 것은, 결국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얻은 사람의 영혼에 만족감을 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하여 영혼이 구원 받은 사람은, 다시는 영적 갈증을 느끼지 않으며 목마르지 않고, 먹어도 먹어도 다함이 없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을 것입니다. 주님이 이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질문이 ‘당신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생수를 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내가 지금 그 생수를 줄 수 있다고 하셨고, ‘이 우물은 야곱이 준 것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는 질문에는,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먹는 자는 목마르게 되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음으로 내가 야곱보다 더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통하여 그 여인이 주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원하셨고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내게도 그런 물을 주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이렇게 간청하는 여인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영생수를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하면 그래 주겠다, 아니면 못 주겠다고 대답하시면 되는데, 주님은 생수와 전혀 관계없는 다른 주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세 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가다, 부르다, 오다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오다 다음에 ‘여기로’(here)라는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서 이리로(이곳으로) 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명확히 그 여인에게 말하기를, 네 남편을 불러서 이리로, 이곳으로, 나에게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주님께로 와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불러오라는 주님의 말에 당황하고 놀란 이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볼 때, 이 여자에게 남편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육적인 쾌락을 누리기 위하여 많은 남자들을 갈아치웠습니다. 성격이 맞지 않아서 인지, 경제력이 부족해서인지, 구타를 했는지, 아니면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했는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자기만족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와 헤어진 것입니다. 정식 결혼을 했다가 헤어졌는지, 아니면 그냥 첩으로 있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내연관계로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남자를 5섯명이나 갈아치우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자기 남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볼 때에 이 여자는 지금 법적인 혼인관계 속에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첩 제도는 인정이 되니까 아마도 내연 관계로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남자가 자기 남편이 아닌 것은 맞는 것입니다. 주님도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여자의 지난 과거와, 현재의 속사정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과거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지금 어쩌고 사는지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 여자는 처음에 주님이 물 좀 달라고 하셨을 때는 ‘당신’이라는 말을 썼다가, 이제 자기의 과거를 다 알고 말씀을 하시니까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기가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질문해 놓고, 이제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크신 선지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일련의 말씀을 볼 때에 이 여자는, 여기서 예수님에게 자기의 죄를 그대로 들어 내 놓고 용서를 구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나에게 남편이 없다는 그 말 속에,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남의 남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음으로 돌에 맞아 죽어야 될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 부정한 관계로 있는 여자입니다. 나의 이런 모습이 알려지면 나는 형사 처벌의 대상이고 많은 사람들이 돌로 나를 칠 것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자기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시는 예수 선지자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 여자가, 나에게 말한 이 분이 구세주 메시야임을 알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뛰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에, 이 여자는 이때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이 여자가 화제를 돌립니다. 화제가 갑자기 바뀌는 것은 본장에서 두 번째인데, 앞에서는 여자가 생수에 대하여 말하는데, 주님이 네 남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하셨고, 이제는 남편 얘기하다가, 갑자기 그 여자가 예배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그 여자가 화제를 갑자기 전환합니까?
혹자는 자기의 과거와 현재, 자기의 치부가 다 들어나니까,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화제를 돌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분이 자기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까, 보통 분이 아닌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이 분이 선지자라면, 자기가 바라고 열망하고 있던 한 가지 의문점을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처소문제였습니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참된 예배가 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 분이 선지자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대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 용서 받은 사람으로서 그녀는 예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죄 용서 받은 사람은 곧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열망한다는 사실입니다. ...
예수님을 정말로 나의 구세주를 믿은 사람, 믿다가도 죄를 짓고 그 죄를 용서 받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기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경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조용조용히 찬송할 수 없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말씀을 꿀송이처럼 달게 받으며, 하나님께 더 바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감격과 감동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내가 매 주일, 오후에도, 수요일에도 나오는데, 그런 감격과 은혜가 없고 맹숭 맹숭하고 미지근하고 깨달은 것도 없고, 가물어 메마른 땅처럼 내 영혼이 바짝 말라있다면 내가 정말 죄 용서를 경험했는가? 내가 정말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는가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가짜 예배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까?
주님이 문둥병자들에게 너희 몸을 제사장들에게 보이라고 하시니까, 가다가 10명이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줄을 알고, 연거푸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병을 저주 받은 것이고, 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죄 용서를 받았다,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려났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려나서 병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제일 처음에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찬양하고 주님 앞에 나와서 꿇어 엎드려 감사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죄 문제를 나는 남편이 없다는 말로 고백한 후, 자기가 그렇게 갈망하던 예배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참 예배가 됩니까?
2.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예배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의 역사를 보면 1)제1성전은 솔로몬 성전이었고(965-958-586년), 2)제2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이었고(534-520- 년), 3)제3성전은 헤롯 성전(BC 19-AD 63년-70년)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여기에 회당이 예배의 장소로 더하여 졌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기 때문에 제3성전과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셨고 또한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예배의 장소가 달랐습니다. 스룹바벨이 제2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와서 우리도 성전건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스룹바벨이 너희 같은 혼혈족들은 이 거룩한 일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스4:1-6, 느 4:1-2). 그래서 나중에 그들이 BC 322년에 그리심 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세운 것입니다(요세푸스). 약 200년 간 이렇게 예배를 드리다가 BC 129년에 힐카누스에 의해서 그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은 없어졌으나 그들은 여전히 그리심산이 축복의 산으로 믿고 그곳을 기도처소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예수님 시대까지 그대로 내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우리가 예배 할 곳이 바로 이 그리심산이라고 하는 것이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라고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그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주님께서 대답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내 말을 믿으라는 말은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결국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의 말을 믿는 것이고, 주님의 말을 믿는 것은 곧 그분 자신을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자기가 신앙의 대상이심을 밝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두 장소 다 부인하셨습니다.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대노할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을 예배 처소로 부정을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배의 장소를 대단히 중요시 여겼습니다. 매 안식일 예배 때에는 성전과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각종 절기 때에는 반드시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곳이 아니면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장소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신 것은 종교개혁적인 발언 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폭탄과 같은 선언이신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내 마음과 내 영이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아니라, 내 영혼이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은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하고 영은 중심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형식에 취우치거나 습관적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이심으로 마땅히 우리도 영으로 예배해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플로리다주의 펜사콜라 시에 ‘급행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답니다. 오전 8시, 낚시, 골프, 사업상 미팅, 여행,,,20분 만에 마친답니다. 너무 인본주의적인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진리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따라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대로, 인간의 방법대로, 인간의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 듣고 헌금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벗어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에 따라 예배하는 것을, 진리로 예배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주님이 온 마음을 다하여 예배하라고 하신 것이고,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말씀에 따라서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예배할 때가 이미 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3. 마음을 다하여 진리에 따라 말씀을 듣고 찬송하고 헌금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시간 관계상 다 설명할 수는 없음으로, 이 시간에는 중요한 3가지 요소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요소들을 말씀에 따라서 시행을 하자는 것입니다.
1)말씀듣기/ 성경 봉독하는 것을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는 설교를 듣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는 탑돌이하고 무릎 꿇어 절하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종교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을 받고 말씀을 들음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중 이 시간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1)기도함으로-말씀을 들을 때 기도해야, 성령께서 잘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2)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살전 2:13/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3)사모함으로(간절함으로)- 행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찾듯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메마른 땅이 단비를 구하듯, 파수군이 아침을 기다림과 같이 사모해야 합니다.
(4)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5)아멘-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예수님이 베다니 동네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고 마르다는 식사대접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다가 와서 마리아가 식사준비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이때 주님이 마리아는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하셨습니다(눅 10:38-42). 여러분도, 말씀 듣는 더 좋은 편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위의 5가지를 기억하고, 이대로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찬송하기/
(1)찬송의 유일한 대상은?/ 시137편
(2)어떻게 찬송해야 하는가?-찰스 웨슬리/ 곡대로, 영적으로, 열정적으로/ 시103편
3)헌금하기/
(1)감사함으로
(2)자원함으로
(3)즐거운 마음으로
(4)평균케 하려는 생각으로
(5)힘껏, 힘에 지나도록
이것은 바울이 마게도냐교회의 헌금생활을 고린도교회에 이야기한 말씀입니다. 마게도냐교회는 정말 가난한 교회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액의 연보를 드렸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고린도교회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가난한 교회보다 헌금을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너희도 마게도냐 교인들처럼 헌금해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설교를 들어야 되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내 영혼이 예배 하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됩시다.
말씀을 들을 때,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모함으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아멘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할 때, 곡대로, 영적으로, 열정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헌금은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힘껏 힘에 지나도록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예)홉니와 비느하스 vs 하나냐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멸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를 모르고 예배를 아무렇게나 드렸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한마디로 자의적 숭배, 곧 우상숭배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한 날 한시에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었던 아버지 엘리는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이라는 아들 이름을 부르며 죽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하나님이, 내가 어떤 제사로도 엘리 집안의 죄를 사하지 않겠다고 하셨고, 그 집안의 후손들은 선과일이 떨어지는 것처럼 젊어서 죽게 됨으로 노인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를 잘 못 드림으로, 그와 그 후손들에게 비참한 결과가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7장에 나오는 하나냐라는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무리가운데 뛰어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곽을 관리하는 직분을 받게 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예배자를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올 한해 예배의 승리자들이 되시고, 주3예배, 주33예배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살아야 모든 것이 사는 것입니다. 개인도, 가정도, 사업도, 구역도, 교회도, 이 세상도 사는 것입니다. 잡념도 버리고 근심걱정도 버리고. 예배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살아있는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매 시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이 있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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