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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1 그 날에 반드시 베마 앞에 서게 된다. 이정현 목사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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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후서5:8-10절 개역개정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고후5:8-10, 그 날에 반드시 베마 앞에 서게 된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한 번 죽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동안 살았습니다. 심지어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점점 수명이 단축이 되어서 100세 전후로 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인생을 짧게 살든 오래 살든, 분명히 한 번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라고 하셨기에, 이것을 바꿀 사람은 없습니다.

이 죽음을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 또는 ‘개인의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죽음을 본문에서 ‘몸을 떠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본장 1절에서는 죽음을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말로 죽음을 표현하는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바라는 것은 차라리 죽어서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더 오래 사는 것보다, 빨리 이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7절과 연결해서 설명을 하면, 바울은 지금 여기서 살면서 믿음으로 주를 보는 것보다, 죽음 이후에 가시적으로 주를 뵈오며 살기를 더 원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 부다 믿음으로만 주를 보는 것이지만, 죽음 이후에는 가시적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는데, 그것을 더 기대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본장 1절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이나, 2절에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말씀은, 곧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그가 재림하시면 우리가 그와 같게 되는데, 그 때에는 주님의 참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나 사도요한이나 다 같이, 몸을 떠나 속히 주의 얼굴을 두 눈으로 뵈옵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명확히 성도가 죽으면 주와 함께 거하고, 신령한 몸으로 주를 뵈오며 영생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대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를 만들어 놓고 성도들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혹자는 죽은 자의 영혼은 깊은 수면에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어떤이는 연옥에 들어가서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즉각적으로 부활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성도가 죽게 되면 예수와 함께 거하게 된다고 하셨고,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모든 성도들이 주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가 되어, 주를 뵈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다짐합니다.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얼마나 멋있는 각오이며 결심입니까? 사실 우리는 아무도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 목숨을 부지하여 있는 것이나,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고 싶다고 더 살고, 죽고 싶다고 죽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주권적 영역입니다. 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주님의 섭리 영역이고, 나는 지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말합니다.

내가 언제까지 살지, 내가 언제 죽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바울도 이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지금 내가 할 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입니다. 사도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힘쓰고, 고난과 핍박 중에도 복음을 전할 것이고, 진리를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 것이고, 그들을 성숙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기 위하여 애를 쓸 것입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해도, 나의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의 기쁨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낮아지고 그리스도가 높아지기를 원하였고, 나는 망하여도 그리스도가 흥하기를 원하였고, 나의 기쁨을 추구하기보다 주님의 기쁨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오로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기 원하였고, 그리스도가 기뻐하시기를 원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지요? 왜 우리가 이 일에 더욱더 힘써야 하지요? 대충 살면 안 됩니까?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여 신앙생활 하면 안 됩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족들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까? 그런데 열심히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할 이유가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반드시 심판대 앞에 나타납니다. 베마 앞에 서게 됩니다. 최후의 심판 날이 있고 하나님과 셈할 날이 옵니다. 이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옵니다. 그래서 재림과 심판은 항상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심판의 날이 있다고 해서, 바울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급진적인 종말론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인하여 분명히 심판은 있지만 그 날과 그 시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내일 당장 주님이 재림하실 것처럼 긴장감을 조장하여, 지금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이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종말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분명히 그날의 심판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한 것은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가 그 심판대에 앉아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주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심판대라는 말도 나오지만,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는 말씀과, ‘그리스도는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이시다’(행 10:42)라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맡겨서 심판하신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포함하여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바울은 과거에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고린도 지역의 성난 유대인들에 의해 끌려가서 베마 앞에 서 본적이 있습니다. 총독 갈리오가 베마에 서서, 그 유대인들의 고소를 기각시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행 18:12-17). 그러니까 바울은 이미 베마 앞에 서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실감 있게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에서 ‘나타난다.’는 말은, 철저한 조사와 심문을 받아, 모든 것이 낱낱이 들어난다는 뜻입니다. 상세하게 재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자들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 5:24)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받는다고 하면 성경이 모순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것은 정죄의 심판, 지옥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지, 심문과 조사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옥 갈 심판은 받지 않지만, 심판대 앞에서 행위에 따라서 조사는 받는다는 말입니다.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값없이 받는 선물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10절을 보면 분명히,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우리가 다’는 바울을 포함한 모든 고린도교인들을 말하기 때문에, 성도들도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의 모든 행위가 낱낱이 들어남으로 인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세상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 세상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심판대 앞에서 구체적으로 들어나게 되면, 그것에 따라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이 부분에 대하여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 누구든지 그 공적에 따라 평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심판 날에 그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다 불타 없어지면 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의 업적을 평가하여 많이 남긴 사람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시고,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시고,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의 베마 앞에 서면, 그분이 나에 관해 매기신 성적표가 있을 것입니다. 도덕적 순결성은 몇 점인가? 겸손하게 살았는가? 교회 일에 성실했는가? 사랑과 인내와 믿음은 몇 점인가? 물질에 대한 청지기 정신은 몇 점인가? 헌신도는 몇 점인가? 주일은 잘 지켰는가?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주님이 들고 계시는 그 성적표를 보시고 나를 평가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자기 행위에 따라서 책에 기록된 대로(주님이 매기신 성적표에 따라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 날에 반드시 베마 앞에 서게 됩니다. 기쁜 날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기쁜 것은 몸을 떠나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뵈올 수 있으니 기쁜 것이고, 두렵고 떨리는 것은 나의 선악간의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들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생각하며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서도, 죄를 지으면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 것을 말함으로,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면 선만 들어나는 것이 아니고, 악도 같이 들어납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는 것처럼 모든 죄가 들어나게 될 것임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1년 동안 죄 지은 것이 몇 가지나 될 것 같습니까? 죄목만 쓰더라도 노트 한 권은 족히 넘지 않겠습니까? 알지 못하고 지은 죄와 마음으로 지은 죄까지 합하면 2권 3권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 날에 그 모든 것들이 주 앞에 들어날 것을 생각하여, 죄 짓지 말고 깨끗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좀 더 적극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그대로 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애를 쓰며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 주일마다 안 빠지고 나와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년3 예배자를 기뻐하실까요?

온전한 11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101조를 드리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놀러 다니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는 부족하지만 열심히 기도하며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자기 기분에 따라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을 기뻐하실까요?

베마 앞에 서서 상 받을 걸 생각해서, 주3 예배자가 되시기 바라고요, 온전한 11조를 하시기 바라고요, 항상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시고요, 이웃을 사랑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 자들이 되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 훗날 베마 앞에 설 때,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고 상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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