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눅 23:26~28)
이정현목사
2017-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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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누가복음23:26-28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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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눅23:26-28,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빌라도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당시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총독입니다. 그는 이 땅의 치안을 유지하고 세금을 순조롭게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총독 앞에 세워 놓고, 세 가지 죄목을 걸어서 고발을 한 것입니다. 1)백성을 미혹한다는 것이고, 2)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며, 3)자칭 왕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말한 대로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이것은 분명 로마에 적대하는 큰 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백성을 선동하여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민란을 주도하신 적이 없고요, 그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하셨지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구요, 더더구나 주님은 이 세상나라의 왕이 되고자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세 가지 주장은 다 거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이런 죄목을 주님에게 뒤집어 씌어서 빌라도 앞에 고발한 것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예수에게서 책을 잡아 공개적으로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4절에서,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많은 무리들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저 북쪽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총독이 저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지금 이 예루살렘에 내려와 있는 갈릴리 지역의 분봉 왕 헤롯에게 주님을 보내기로 합니다. 이때의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안티파스는 처음에 예수님을 보고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앞에서 희한한 이적을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헤롯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결국 헤롯도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찾지를 못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 앞에서 두 번째 얘기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심문해 보았으나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헤롯도 그리하였고,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다.’ 빌라도는 두 번째 심문에서도 주님의 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이렇게 말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16절에서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라고 말한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면 무죄석방을 해야 하는 것이지, 때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때리는 것, 태장도 죄의 한 결과이기 때문에, 무죄한 자에게 태장을 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의 반발이 심하니까,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래라도 달래기 위해서 말한 것이라고 보여 집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던 무리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태장 정도로는 자기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얘기이겠지요? 이 정도로 끝낼 것 같으면 시작도 안했다는 얘기이겠지요?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죽이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라바가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지금 감옥에 갇혀 복역 중에 있는 죄수입니다. 이 사람의 죄는 대단히 큰 죄이고, 그 죄가 확실하다고 이미 판결이 되어 복역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이런 사람을 내어주고, 예수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법이 없습니다. 논리도 없고 합리적인 이성도 없고, 정의도 없고 의리도 없습니다. 오로지 뭇 백성들의 어리석은 외침만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살기어린 군중들의 고함소리만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제 세 번째 동일한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 그들은 더 큰 소리로, 악을 쓰며 소리를 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런데 보십시오. 23절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그들의 소리가 법을 이겼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정의를 이겼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빌라도의 부인의 소리를 이겼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결국 빌라도의 판단을 이겼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그들이 구하는 대로 언도 하였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참으로 큰 죄인은 놓아주고, 죄가 없으신 주님은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놈은 풀려나고, 아무런 죄가 없으신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로마 병정들로부터 심한 채찍을 맞게 됩니다. 여기 저기 상처가 나고 피멍이 들어갑니다. 이윽고 허물 허물해진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머리에는 가시채 관을 쓰시게 됩니다. 가시가 살을 뚫고 머리 깊숙이 박히고 피가 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합니다. 침 뱉음을 당하시고, 갈대로 머리를 얻어맞기도 하십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셨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그 몸으로 골고다 언덕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게 되셨습니다.
비웃고 조롱하고 돌을 던지는 무리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주님이 기진맥진하여 가다가 쓰러지고 또 쓰러지시니까,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다가 대신 십자가를 지워 가게 하였습니다.
영화/
주님이 이렇게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그리스도를 조롱하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 말고, 다른 무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하여 2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백성들과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는데, 이 여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 주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인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들은 왜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을까요?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심이 너무 안타까워서 울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고통을 겪으시면서 상처 입은 모습, 지쳐서 쓰러지시는 그 모습을 보고 울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울음소리를 아신 주님이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겨우 정신 차려서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하신 말씀이,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지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길을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애통해 하며 울어야 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애통해 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 못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신 것은, 나는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이 길을 가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이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인데, 그 때 너희가 당하게 될 고통과 괴로움을 생각하며 울라는 것입니다. 불과 몇 십 년 후면 그들은 무서운 고난과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인데, 그 때에 성전도 다 파괴되고 로마의 군화 발에 짓밟히게 될 것인데, 그것으로 인하여 너희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님은, 자기를 위하여 울게 아니고, 바로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고, 울어야 할 대상을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나를 위하여 울고 그리고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여기서 ‘...위하여 울라.’는 말에는, 울면서 기도하라는 뜻이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속에서 ‘내게로 오라’는 것은 ‘기도로 나에게로 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처럼 주님이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눈물 흘리라는 뜻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슬피 울며 애통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눈물과 기도가 연결된 사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눈물기도, 또는 통곡기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순간 다 잃었습니다. 자기의 10자식도 하루아침에 다 죽었습니다. 자기 몸은 악창이 나서 진물이 질질 흐르고, 고통스러워서 기왓장으로 벅벅 긁고 있었습니다. 자기 부인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고, 친구들은 번갈아 가며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다.’(욥16:20)고 했습니다. 위로는 환란이 짓누르고 사방은 꽉꽉 막혀있었지만,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은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라고 말했고,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시39:12)라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또 다른 시편기자는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라고 하면서, 그처럼 울면서 주야로 기도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다 제 13대 왕인 히스기야는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는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히브리서 기자는, ‘눈물과 통곡의 기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짐으로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그처럼 통곡하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후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위대하게 쓰임 받는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거스틴에 대한 애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타가스테(Thagaste)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354년). 어거스틴은 청소년기에 신앙을 잃고, 카르타고에서 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한 여자와 동거를 하면서 18세에 아들을 낳기도 합니다. 또 어거스틴은 연극에 빠지기도 하고 극장의 쾌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20대에 이단인 마니교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아들 어거스틴이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그때 그때마다 눈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카르타고로 유학을 갈 때도 기도했고, 멀리 로마로 유학 갈 때도 어머니 모니카는 울면서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더더구나 공부하라고 유학을 보냈더니, 어린 자식이 사고를 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해 놓았습니다. 더더구나 아들이 이단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는,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녀의 끈질긴 기도로 결국 아들은 돌이키고, 당시 밀란의 감독 암브로시우스(Ambursius, 340-397)에게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세례 받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런 결과를 통해 어거스틴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기른 자녀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기도로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 온 어거스틴은 그 후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반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이 되어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방탕한 아들을 눈물의 기도로 길렀던 어머니 모니카처럼, 우리들에게 어거스틴처럼 방탕한 자식이 없다면 감사하고 다행으로 여기고, 그 같은 방탕한 자식이 되지 않도록, 자녀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둘째 아이가 3살 때 갑자기 말을 더듬는 것입니다. ‘현수야’라고 부르면, ‘...예...아아..빠’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한 두 번 하고 말겠지 그랬는데, 그게 아니라 계속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집사람은 말 더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책이나 논문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언어치료를 받아 보았습니다. 유명한 교수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상대편과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해서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걱정이 태산 같은 것입니다. 아이의 앞날을 생각하니까 앞이 캄캄한 것입니다.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사람은 울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3년 반이나 지났습니다. 그동안은 눈물로 나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말을 더듬지 않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금은 그 아이가 커서, 이제 말로 먹고 사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문제를 넘어가게 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하십니다. 욥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다윗의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셨고, 눈물로 기도했던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통곡하는 주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셨고,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셨고,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저희 부부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각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셨습니다.
결론
오늘 주님은 울어야 할 대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 기도 제목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기도 제목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면, 부모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뿐만 아니라, 자녀를 위하여 울면서 기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의 아픔과 상처, 문제들, 미래, 희망, 결혼 한 자녀들의 가정을 내 가슴에 안고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합니다. 가슴을 치며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혹 자녀들이 안 믿는다면, 자녀들이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신앙생활 안하는데도, 부모의 마음이 평안하거나 별 위기의식을 못 느낀다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고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 자식의 영혼은 죽는다는 생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는 자녀들이라면 그 믿음이 성장하도록,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가치관을 바르게 세울 수 있도록,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자녀들이 되도록, 멋진 크리스찬으로, 지혜롭게 달란트를 잘 계발하여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계만방에 들어낼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성품이 좋은 아이가 되도록, 성격이 모나지 않게 성장해 가도록, 그리고 청소년들은 세속적인 문화에 빠지지 않도록, 악한 것에 자기의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도제목을 주신 것에 따라, 모니카처럼 자녀들을 눈물의 기도로, 멋진 하나님의 자녀로 기를 수 있는 모든 부모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모진 고통과 수모와 멸시와 채찍에 맞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말씀을 상고하여 보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 제목을 주신 것처럼, 나를 위하여서 울고, 또한 자녀와 손자손녀를 위하여, 울면서 기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슴을 뜯으며 통곡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만족을 얻는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눈물의 기도, 통곡하는 기도를 통하여, 자손들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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