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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관계 (에베소서 5:22 - 6:9)
이정현 목사 2017-02-05 추천 0 댓글 0 조회 1237
[성경본문] 에베소서5:22 개역한글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에베소서6:9 개역한글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형성이 되고, 형제자매들이 있으면 형제자매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그들은 다 가족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또한 옆집에 사는 사람들하고는 이웃관계를 형성하고, 학교에 들어가면 친구관계와 졸업을 하면 동문관계나 학연관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팀 관계나 상하관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을 해서 부부관계를 이루며 살게 되고 여기에서 자연히 발생되는 사돈관계나 사위와 장인의 관계나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신혼 부부관계에서 자식이 생기면 또 다시 반복되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게 인생입니다. 이렇게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이 인생이며, 이것이 모여지면 곧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참으로 오랜 기간 동안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세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 번 째는 부부관계이고 다음은 부자관계이고 마지막은 주종관계입니다. 본문의 범위가 상당히 넓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으로 간단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잘 들음으로 은혜가 되시기 바라고, 저와 여러분들의 이런 관계가 평생토록 아름다운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관계’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좋은 관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관에 의한 좋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좋은 관계, 의미 있고 가치 있고 행복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관계의 중요성에 따라서 순서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부부관계가 제일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먼저 부부관계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 관계를 명확하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되고, 그리고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복종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임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의 대상을 분명히 정해 주었습니다. 자기 남편입니다. 외간 남자가 아니고 다른 아내의 남편도 아닙니다.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복종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큰 사단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내가 남편에게 그래야 되지요?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머리라는 말은 ‘근원’과 ‘권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그 아담에게서 여자를 만들었음으로 여자의 근원은 남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권위자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아내와 남편이 평등하게 지음을 받았지만 그 기능은 다른 것입니다. 남자는 지배하는 성향을 주셨지만, 여자에게는 순복하는 성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능에 따라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맞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5: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매사에 아내가 남편을 쥐고 흔들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면 안 됩니다. 조금 못나고 부족하고 어리석어도 자기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교회가 매사에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제는 이어서 남편들이 아내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의 사랑이란 자기를 희생하고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8절에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말씀을 듣고 아내들이 이것은 너무 과한 말씀이라는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제로 남편에게 주어진 말씀이 더 과하고 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남편들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처럼 희생적 시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내를 위해 내어주는데 피 흘리기까지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남자와 여자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창조되었음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했습니다. “남자는 전체를 보고, 여자는 세부적인 것을 본다. 남자는 논리적이지만, 여자는 직관적이다. 남자는 쉽게 결정하지만, 여자는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남자는 감정의 변화가 둔하지만, 여자는 감성이 쉽게 변한다. 남자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여자는 관계 지향적이다. 남자는 객관적이지만, 여자는 이상적이다. 남자는 방랑적이지만, 여자는 정착적이다. 남자는 존경을 중히 여기지만, 여자는 사랑을 중히 여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분명한 것은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과, 남편은 자기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할 때,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순종과 사랑의 관계가 되려면, 그 중간에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순종할 수 없는 경우에도 인내로 순복하고, 남편이 사랑할 수 없는 경우에도 인내로 아내를 사랑하면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내하심으로 순종하고 사랑하심으로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가지길 바랍니다. 

 

이제는 부자관계입니다. 자녀들을 향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를 말하기 전에, 자녀들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을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주님 명령이니 그대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이 명령은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옳은 것이며, 의의를 달지 말고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자녀들에게 순종을 강압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더욱 악한 것이나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이나 교회를 다니지 말라는 요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요구가 있다하더라도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부모가 죄를 범하라고 하는 것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라는 말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너희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주 안에 있는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전부 누구의 자녀이지만 부모는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 된 자로서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땅한 부모공경에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6: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 공경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 중 2계명과 5계명에만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둘째 계명 다음에 나오는 약속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제2계명을 지킴으로 얻을 수 있는 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약속된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5계명이 주어진 이후에는 곧장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고 나오기 때문에 실제로 계명을 지킴으로 따라오는 복에 대한 약속은 5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바울이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복을 약속하셨습니까? 주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녀들이 잘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복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장수한다고 하셨습니다. 부모공경과 장수를 필연적 관계로 볼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자녀들의 부모공경에 관해 말씀하신 이후, 이제 부모들의 자녀 양육에 관하여 짧게 말씀하십니다.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바울은 소극적인 권면과 적극적인 권면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권면으로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일관성 없이 말할 때, 부모의 주관을 강압적으로 말할 때, 감정적으로 잔혹하게 말할 때, 편애할 때, 무시할 때, 육체적으로 학대할 때 등등의 경우에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적극적인 면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교양은 자녀에게 본을 보여 자녀를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부모는 자녀들에게 본 된 행동으로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말씀대로 살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자녀들을 교육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훈계는 권면, 경고, 교훈 등의 뜻이 있습니다. 결국 훈계는 말로써 자녀를 훈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12사도의 교훈집이라고 불리는 디다케 4:9에 보면, ‘네 아들이나 딸에게 저주하지 말고, 젊었을 때부터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들의 자녀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부모들은 너무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만 교육을 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취미나 오락, 학교공부, 스포츠, 음악, 컴퓨터 등등을 위해서는 아이의 재능을 개발시켜 준다는 명목으로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쏟아 붓습니다. 기독교인 부모들도 아이들의 이런 면에 온전히 몸과 마음이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자녀들을 구원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 내 자녀로 사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녀들의 영혼을 위하여 울지 않으면, 나중에 피눈물 흘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 중요하지요, 좋은 직장 들어가서, 척척 진급하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사업을 잘해서 돈도 많이 버는 것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보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는 게 훨씬 가치 있고 중요합니다. 육체적인 모든 일들은 잠시잠간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한 것입니다. 육체적인 일은 궁극적인 가치는 없으나 영혼구원과 그 이후의 삶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올해는 인도자들 구역장들의 가족들부터 예수 믿는 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구역원들의 모든 식구들이 남편과 자식들이 모두 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함으로 은혜 받는자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인가귀도 즉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이번 4월 한 달 동안은 ‘20일 자녀들을 위한 부모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이미 다 믿는 가족들은, 바르게 믿고 열정적으로 믿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장해 가도록 위하여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부터 작심하시고 가족들에게 특별히 자녀들에게,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잘 양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부관계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로 생각하고 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어느 집안이든지 간에 이 고부관계의 문제는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설 명절이 지났지만, 어느 며느리가 명절 전에 시어머니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답니다.

 

아버님 어머님 보세요.우리는 당신들의 기쁨조가 아닙니다. 나이 들면 외로워야 맞죠.

 

그리고 그 외로움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고요.

 

자식, 손자, 며느리에게서 인생의 위안이나 기쁨이나 안전을 구하지 마시고 외로움은 친구들이랑 달래시거나 취미생활로 달래세요. 죽을 땐 누구나 혼자입니다.

 

그 나이엔 외로움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고, 나이 들어서 젊은이 같이 살려하는 게 어리석은 겁니다.마음만은 청춘이고 어쩌고 이런 어리석은 말씀 좀 하지마세요.나이 들어서 마음이 청춘이면 주책바가지인 겁니다.늙으면 말도 조심하고 정신이 쇠퇴해 판단력도 줄어드니, 남의 일에 훈수드는 것도 삼가야하고, 세상이 바뀌니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남보다 특히 젊은 사람보다 많이 알고 대접받아야 한다는 편견도 버려야합니다.나이 든다는 건 나이라는 권력이 생긴다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이 소멸해 간다는 걸 깨닫고 혼자 조용히 물러나는 법을 배우는 과정임을 알아야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몇 개월에 한 번을 하든, 1년에 한 번을 하든, 아니면 영영 하지 않아도 그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세요? 그것 가지고 애들 아빠 그만 괴롭히세요.마지막으로 이번 설날에 승훈이랑 병훈이 데리고 몰디브로 여행가니까 내려가지 못해요. 그렇게 아시고 10만원 어머니 통장으로 입금해 놓았으니 찾아 쓰세요. ​

 

이 편지를 받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습니다.

 

고맙다. 며느라.형편도 어려울 텐 데 이렇게 큰돈 10만원씩이나 보내주고...이번 설에 내려오면 선산 판 거 90억원하고 요 앞에 도로 난다고 토지 보상받은 60억원 합해서 3남매에게 나누어 줄랬더니... 바쁘면 할 수 없지 뭐 어쩌겠냐?둘째하고 막내딸에게 반반씩 갈라주고 말란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여행이나 잘 다녀와라. 제사는 이 애미가 모시마. 

 

이에 화들짝 놀란 며느리가 다시 답장을 씁니다.

 

헉!!!~어머니 친정 부모님한테 보낸 메시지가 잘 못 갔네요. ㅠ.ㅠ친정에는 몰디브 간다고 하고서, 연휴 내내 시댁에 있으려고 했거든요. 헤헤^^어머니 좋아하시는 육포 잔뜩 사서 내려갈께요. 항상 딸처럼 아껴주셔서 감사해요.

 

P.S. 오늘은 어머님께 엄마라고 부르고 싶네요.엄마 사랑해요.

 

다시 시어머니는 답장을 보내죠..

 

사랑하는 며느라...!엄마라고 불러줘서 고마운데 이걸 어떡하면 좋니.내가 눈이 나빠서 만원을 쓴다는 게 억원으로 적었네.선산 판 거 90만원, 보상 받은거 60만원 해서 제사 모시려고 장 봐놨다.얼른 와서 음식 만들어다오.사랑하는 딸아.난 너 뿐이다...

 

그다음 며느리의 답장은 없었답니다.

 

과연 며느리는 시댁에 갔을까요?

 

 

 

아주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입장만 잘 지키면 이 고부간의 문제는 해결될 것 같습니다. 며느리는 자기 친정 부모님을 존경하듯 시부모님을 섬기면 되고, 시부모님들은 자기 자식들을 사랑하고 아끼듯 며느리를 사랑하고 아끼면 아름다운 고부관계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은 주종관계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상전과 종은 분명이, 당시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 가운데서의 상하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그대로 오늘날의 직장에서의 주종관계로 적용할 수 있겠는가? 예, 그 원리는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이 노예를 소유로 생각하거나 원하는 대로 체벌을 하거나 매매할 수 있는 비인격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든 노예든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체들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오늘 본문의 진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종들은 상관을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기쁨으로 주를 섬기듯 상전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종들에게 부탁한 말씀 중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연결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5절에도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절에는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7절에도 ‘주께 하듯 하고’, 8절에서는 ‘주님께서’ 봉사에 대한 보상을 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듯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듯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15장 12-18절의 말씀을 보면 주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순종한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브리인이 종으로 팔려가서 주인을 6년 동안 섬기면 7년째 에는 주인이 그 종을 놓아주어서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이 그 주인을 너무 사랑하여 계속 이 집에 머물기를 원하면 송곳을 취하여 종의 귀를 문에 대고 구멍을 뚫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그 종은 영원히 주인의 종으로서 주인과 함께 살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아마도 이 귀 뚫린 종을 생각하여, 주께 하듯, 주인을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느 가정집에 가서 파출부로 일을 해도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해야 하는 것이고, 주유소나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예수님을 섬기듯 해야 하고, 식당에서 일을 하거나 회사에서 일을 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하듯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볼 때는 잘하는 척 하고 안 볼 때는 농땡이 치는 것은, 그리스도인 회사원으로서는 합당한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종들은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하지 말고, 불평불만을 토로하지도 말고, 오직 매사를 주님께 하듯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전들은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공갈을 그쳐야 합니다. 공갈은 자신의 위치를 사용하여 종들을 위협하고 겁먹게 하고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일은 삼가 해야 하고, 또한 우리의 상전이 하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의와 공평을 베풀어야 합니다(골4:1).

 

결론

 

바울은 지금까지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데 그 중에서 세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 관계, 자녀와 부모 관계, 그리고 종과 주인의 관계를 말하였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순종과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하고,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공경과 교육자의 관계가 되어야 하고, 종들과 상전과의 관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공갈을 그치고 인격적으로 공평하게 대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종이 상전에게 먼저 순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권위자이니까 그렇습니다. 아내의 머리가 남편이고, 자녀들의 권위자가 부모이고, 주인이 종의 육체의 상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무도 이런 관계에서 벗어나서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살아갈 때,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살아 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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