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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합을 깨트린 여인 (요한복음 12:1-11)
이정현 목사 2017-02-12 추천 0 댓글 0 조회 2034
[성경본문] 요한복음12:1-11 개역한글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요12:1-11, 옥합을 깨트린 여인

성경에는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사건이 4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7장의 내용은 다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과 요한복음 12장의 사건 만 동일한 것으로 봅니다. 

동일한 사건을 말하지만, 성경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차이점을 다 말할 수는 없고 다만 마태와 마가보다 요한복음의 기술이 더 상세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5대 절기 중에 가장 중요한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逾越節)은 유대인들이 이집트 왕국의 노예 생활로부터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을 봄에 지내는 절기라고 해서 ‘봄 축제’라고도 하며, 노예 생활로부터의 탈출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자유의 때’라고도 합니다. 주님이 이 유월절 엿 세 전에 베다니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는 시간적 배경을 말하고, 베다니는 공간적 배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1주일 동안만 이 예루살렘에 계시다가, 그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다니’는 요단강 동편의 베다니(세례 요한이 세례 주던 곳)와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가 있는데, 본문의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입니다. 이곳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던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본문 바로 앞장에서 나사로가 죽었고 장사 지낸지 4일이나 지났는데, 예수님이 이곳에 오셔서 그 나사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생명이 되심과 부활이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를 주최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문 2절의 말씀을 보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인 것처럼 보입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는 분주히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광경을 보면, 이 잔치를 연 사람이 나사로의 가족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병행구절을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잔치의 주최자를 문둥이 시몬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렌스키라는 학자는 마르다가 시몬의 부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샌더스라는 학자는 시몬은 나사로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둘 다 신빙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세 복음서를 종합해 볼 때, 이 잔치의 주최자는 시몬이지만, 요한은 나사로의 부활을 부각시키고자 나사로의 가족 중심으로 기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잔치의 주최자인 시몬은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에 의해 살아난 나사로를 중심으로 본 기사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잔치의 주최이든지 간에, 나사로와 그의 집안에 베풀어 주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잔치임에는 틀림이 없었을 것입니다. 11장에서는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 때문에 가족들과 많은 동민들이 큰 슬픔에 빠져있었다면, 이제 주님이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12장에서는 온 가족과 온 동민들이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어, 주님을 대접하고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마리아가 비싼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서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이라고 했는데, 이는 적어도 300데나리온 정도 나가는 향품인 것 같습니다. 300데나리온은 노동자 1년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노동자 1년 연봉이니까 적어도 5천 만원 이상이지 않겠습니까?

양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약 340g 정도 된다고 하네요. 문제는 향유를 담는 옥합도 비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옥합은 뚜껑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깨트려야 향유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순전하다.’는 것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고급품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은 동인도 산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는 나지 않고 전부 인도에서 수입해 온 향품입니다. 자, 이렇게 귀하고 비싸고 고급품인 수입품 향유를, 주님께 아낌없이 다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 누구의 강요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단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지만, 본문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머리에 향유를 붓기도 하고, 또한 몸에 붓기도 하고 그리고 발에 붓기도 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머리나 몸에 향유를 부을 때를 기록한 것이고, 요한은 발에 부을 때를 기록하면서 이것과 연결하여 마리아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그 발을 닦아 주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 여자가 머리를 푼다는 것은 수치로 여겼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진정한 감사, 온전한 헌신,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한 제자가 그녀의 행동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합니다. 마태는 이 사람을 ‘제자들’로 표현을 했고, 마가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고,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라라고 그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을 비롯하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강하게 꾸짖었겠지만, 그 앞에서 선동을 하여 앞장서서 불만을 토로 했던 사람이 가룟 유다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를 가리켜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수많은 이적을 체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고도 마지막에 주님을 배반하고 마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고마워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하고 값진 것,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예수님에게 다 부어드린 마리아의 행위에 대한 유다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래의 의미가 재미있습니다. 이 말은 ‘이 향유를 우리에게 맡기면 우리가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겠다’는 애기입니다. 자기들에게 맡겨만 주면 이것을 비싸게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예수 한 사람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어려운 많은 이웃들을 위하여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경보다는 먼저 이웃 사랑에 투자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신 주님이, 단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빈곤층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자선가처럼 말했지만 속마음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는 회계의 업무를 맡은 사람으로 사람들이 돈궤 안에 돈을 넣으면 그것을 훔쳐가는 도둑놈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훔쳐 감이러라.’는 말은 과거에 한 번 헌금 도둑질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여러 번 돈궤에서 공금을 횡령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에 대한 주님의 이 판단을 볼 때, 마리아가 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리지 않고 가룟 유다에게 맡겨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했다면, 아마도 가룟 유다는 그 돈의 상당 부분을 훔쳐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애초부터 가난한 사람은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기회만 되면 자기의 욕심, 욕망을 채우려고 했던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며,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를 질책했던 유다를 향해 주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지금 마리아를 향해 질책하고 비난하고 있는 유다와 제자들에게 ‘내버려두라’는 말로 제동을 걸었습니다. ‘가만 두어라.’ 저 여인이 나에게 향유를 부은 것은 임박한 나의 장사를 예비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행동하였을 수 있지만, 주님은 장차 일어날 모든 일들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장례식에는 시체에 기름이나 향유를 붓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을 때, 너무 늦은 시간이라 향유를 바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니고데모만이 약 100근 정도의 몰약과 침향을 섞어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주었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이것을 생각하시면서, 여기의 마리아가 이미 부족분의 향유를 내 몸에 발라주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자기의 장사의 날을 기념하는 행위로 본 것입니다.

당시 마리아는 단지 존경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고이 간직해 온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어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을 사용하셔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큰일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마리아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항상 그들과 함께 있는 가난한자들을 구제하는 일보다,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구제도 힘써야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의 구제를 명분으로,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한 이 여인의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은, 두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그룹은 유대인이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시다는 얘기를 듣고 예수님과, 주님이 살린 나사로를 보기 위하여 왔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적대자들인지 아니면 우호자들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왔다가 가까운 베다니에 계시는 예수님께 찾아 온 것입니다. 찾아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를 뵈옵고 믿고 따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나사로와 주님을 보기 위하여 찾아 온 것뿐입니다. 유월절의 진정한 어린양으로 오신 주님,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그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보다 더 악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메시야를 대망하며 기다리고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이곳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이들도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그가 행하셨던 이적들, 특히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음을 보고 들어서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주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두고 한 여인과 여러 사람을 대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요한은 한 가련한 여인과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를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 편에 있는 이 가련한 여인은 자기 오라버니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자기 가정을 돌보아 주신 사랑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비싼(자기에게 가장 귀한, 자기의 전 재산인)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리고, 채면 불구하고 자기의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헌신을 최대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유다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닌 제자였고, 12제자들 가운데서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자가, 한 여인의 헌신을 책망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거기에서도 돈에 대한 자기의 욕심(욕망)을 드러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를 입은 도둑놈이었습니다. 주님을 팔아버린 배신자였습니다. 이 둘 중에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입니까? 이 두 사람 중에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진짜 제자는 마리아이고, 진짜로 주님을 사랑한 자도 마리아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앙에 두고, 마리아는 오른쪽에, 많은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왼쪽에 두고 대조를 시킵니다. 오른쪽의 이 여인은,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에게 있는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자입니다. 그런데 왼쪽에 있던 이들은 모두가 다 같이 매 안식일마다 성전이나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던 자들입니다. 단순한 예배자들이 아니라, 대제사장들은 예배를 인도하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냥 이적을 행하는 자로만 여기며 그냥 구경삼아 보고 지나갑니다. 더 나아가서 이 나쁜 대제사장들은 그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뿐만아니라 그에 의해 살아난 나사로도 죽이려고 합니다. 둘 중에 진짜 신자는 누구입니까? 둘 중에 진짜 은혜를 입은 자는 누구입니까? 둘 중에 진짜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진짜 신자는 마리아이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없지만,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동일하게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막14:9).  

여기에 나오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은,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성취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소문이 나서, 그녀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 본문을 읽고, 여기에 대한 말씀을 설교로 듣고 있으니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그 여자가 행한 일을 우리가 말하며, 그녀를 기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은혜를 은혜로 알고 진실 된 마음으로 엎드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을 위하여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 물질, 몸을 드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위에서 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낭비라고 말하더라도, 그런 말에 동요되지 말고 마리아처럼 기꺼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큰돈을 다른데 사용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데, 왜 주님께 바치느냐고 얘기해도, 흔들리지 말고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귀한 것을 주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쳐다만 보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구경만 하고 있다하더라도, 당신만은 머리털을 풀어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한다하더라도, 마리아처럼 여러분들은 묵묵히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주님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처럼 사는 그런 사람을, 주님은 인정하시고 칭찬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행위는 세월이 지나도 계속 회자되어, 성도들의 마음에 기억될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멋지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보람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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