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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06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 이정현 목사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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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21:1-16절 개역개정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6.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4106일 

사도행전 21:1-16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

 

바울은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 왔습니다. 그곳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놓고 그 앞에서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 내용은 에베소에서 한 자신의 활동을 회상한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열심히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자신에게 지시하신 것을 따라 자신의 수난예고를 합니다. 아울러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장로들에게 교회를 부탁하며 삼갈 것을 삼가고 늘 깨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의 미래를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게 됩니다. 말씀이 너희를 굳게 세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바울은 장로님들과 눈물의 작별을 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바울이 밀레도를 떠나서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밀레도에서 두로까지의 여행 경로를 살펴보겠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님들과 작별을 한 후 바울은 다시 배로 이동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으로 귀환을 다루고 있는 먼 여행길입니다.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고스(Cos)로 갑니다. 고스는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이고 이곳의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고 이 학교 출신의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고 지금의 의사들은 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합니다. 바울 일행은 고스에서 배를 타고 로도(Rhodes)로 가고(85km) 로도에서 바다라(Patara)로 갑니다(85km). 이런 섬들 사이에는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소형 선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배를 이용하여 어렵지 않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사도행전 27:5에 의하면 바다라에서 무라 항구로 갑니다. 이 무라는 바다라보다 더 큰 항구이기 때문에 베니게로 가는 보다 더 큰 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무라에서 베니게로 가는 배를 갈아타는가 하며는 지금까지는 에게해 지역을 항해한 것이고 이제부터는 지중해 지역을 항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베니게로 가는 큰 배로 갈아타서 먼 거리를 항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정은 굉장히 먼 항해였습니다(644km).

 

바울이 구브로 섬을 지날 때에 1차 전도 여행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전도하여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을 회상하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두로에 도착을 해서 짐을 풀려고 합니다. 이 두로는 시돈과 함께 베니게의 유명한 항구입니다. 왜 가이사랴로 곧장 가지 않고 이곳에 정박을 했는가 하면 여기가 타고 온 배의 종착점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것처럼 짐을 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배는 상선이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많은 곡물과 과일들 그리고 잡화들을 싣고 와서 두로에 풀어서 팔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로는 세계 최고 최대의 무역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싣고 온 물건들을 하역하고 또 다른 물건들을 실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바울 일행은 7일 동안 두로의 제자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본문 4절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두로 지역에 있는 제자들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찾다는 수색하여 찾아내다는 뜻으로 매우 적극적으로 찾았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두로에는 믿는 신자들이 있었고 곧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는 과거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핍박을 피해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이 베니게에 왔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서 바로 그 기독교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11:19). 그리고 또한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베니게를 한 번 방문했던 적도 있었습니다(15:3). 아마도 그때의 성도들을 이곳에 와서 열심히 찾아보았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들을 찾아 만나서 1주일 동안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로의 성도들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나서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심한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이 기다린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성령님은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받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결박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과 같습니다(9:51). 그래서 바울은 그들과 작별을 합니다. 이들이 작별하는 모습도 어디에서 본 듯합니다.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5-6). 두로의 성도들이 바울에 대한 애정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바울 일행은 두로를 출발해서 계속 항해한 그들은 돌레마이(Ptolemais, 35km)에 도착을 해서 그 곳의 성도들과 하루를 같이 있게 됩니다. 그 다음날 그들은 가이사랴(50-60km)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옛 친구인 빌립의 환대를 받게 됩니다. 빌립은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으로 팔레스틴 해안 평야와 사마리아에서 선교 활동에 전념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지역에서 살며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전도자’(8)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사도 빌립과 다른 인물임을 밝히고자 그렇게 썼을 것입니다.

 

빌립에게는 딸 넷이 있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여성들에게도 주어젔음을 다음의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리암(15:20), 드보라(4:4), 훌다(왕하 22:14, 노아댜(6:14), 이사야의 아내(8:3) 그리고 안나(2:36-38) 등입니다. 이들에게 임한 같은 성령이 이 처녀 예언자들에게 임하여 예언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바울의 앞일에 대한 그녀들의 예언이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유대로부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와서 예언을 합니다. 이 아가보는 사도행전 11:28에 보면 천하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을 때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을 봅니다. 그런 예언자가 유대로부터 가아사랴에 올라와서 바울에게 이렇게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11). 아가보는 행위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일종의 행위 예언이고 퍼포먼스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13). 비장한 각오를 다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예언하고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바울이 가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따라서 가는 것이고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사소한 인간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거기에는 자기의 생명을 건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육로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게 됩니다. 그들이 여장을 꾸려’(15) 떠났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의 여장을 어떤이는 말에 안장을 얹는 것이라고 표현을 했으나 단순히 짐을 꾸렸다는 말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용감한 몇 제자가 함께 올라가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갑니다. 나손은 아마도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 때 회심하였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멤버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오랜 제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 사람을 데리고 간 것은 올라가다가 그의 집에 유숙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못 미친 어느 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바울 일행은 모든 것을 준비하여 장장 100km 이상 되는 거리를 여행하게 됩니다. 말을 타고도 이틀은 걸렸으니 걸어서라면 시간은 훨씬 더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한 걸음 한 걸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박과 환난의 장소를 향해 걸어갔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찰스 5세가 소집한 보름스 국회에 소환을 당하였습니다. 친구들은 루터에게 의회에 가지 말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1521416일에 보름스 국회에 가게 됩니다. 당시 군중들이 루터를 보기 위해서 2,000여 명이 거리로 뛰쳐 나왔습니다. 루터는 군중들을 지나 보름스 국회의 담벼락에 놓여있는 수많은 기왓장을 보았습니다. 순간 루터는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보름스 국회의 기왓장 만큼이나 마귀가 많다하더라도 나는 그곳에 가리라.’ 결국 루터는 그 곳에 들어가서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담대하게 자기를 변호했습니다. 자기가 주장한 것이 성경적으로 옳다고 한 것입니다. 루터의 이 담대함, 물론 성령님이 주신 것이겠지만 아마도 본문의 바울에게서 배운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때부터 루터는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본문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의 귀환을 다루고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고스로 고스에서 로도로 로도에서 바다라로 다바라에서 배를 갈아타고 구브로를 왼쪽에 두고 항해하다가 두로에 도착하게 됩니다. 두로에서는 형제들과 같이 한 주간을 교제하다가 돌레마이로 갑니다.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로 가고 그곳에서 빌립과 친교하다가 아가보의 예언을 받고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본문의 바울을 통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과 마음 상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6:39)라고 하셨던 것처럼 오로지 아버지의 뜻에 자기의 삶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들었습니다. 올라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두로의 제자들도, 가아사랴에서 빌립의 네 딸과 아가보도, 가이사랴의 많은 사람들도 상경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갑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전진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가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기대와 부푼 가슴도 있었을 것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런 마음들이 바울에게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무튼 여기서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바울의 마음 태도를 충분히 엿보게 됩니다. 죽을 각오를 하면서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성도라고 한다면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오셨고 그 뜻대로 사셨고 바울도 그랬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7:17). 바울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달라’(1:9)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7-18).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긴다’(40:8)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고 하셨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에는 내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이 항상 옳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좋은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안되고 지금 당장 손해보는 일이라 해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면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주님 뜻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찬송/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기도 제목/ 주어진 환경 속에서, 늘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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