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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3 17 거짓된 구제 이정현 목사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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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5:1-11절 개역개정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4317일 사도행전 5:1-11 거짓된 구제

 

사도행전 5장에서 83절까지는 초대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거짓 구제(5:1-11)와 구제의 불균형 문제(6:1-7)가 있었고 밖으로는 핍박으로 인한 중압감과 위기가 있습니다. 내적인 문제들을 다룰 때는 교회 지도자들이 신중하고 민감한 태도를 취하였으나 외적인 압력을 맏는 일에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 교회 지도자들은 우선순위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우리는 흔히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일명 교회의 헌금사건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이 본문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릴 때 속이지 말고 진실 된 마음으로 드리라고 교훈을 합니다. 물론 그런 교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것을 뛰어넘어 교회의 성결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교회의 성결을 해치기 위하여 공격했지만 성령께서 잘 지켜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거짓된 영으로, 거짓말로 교회를 공격하지만 성령께서 이 문제를 막아주시고 해결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계획과 죄악이 나옵니다. 그들의 계획은 밭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앞부분에 나오는 바나바를 통하여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밭을 팔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성령의 감동으로 계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밭을 팔아 그 일부만 사도들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 부부가 만약 헌금이 소유 전부가 아니라 일부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서 비난받을 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나바처럼 이것을 드림으로 칭찬이나 명성을 얻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성을 얻으려고 한 것이 잘못이라기보다 문제는 일부만 드렸는데도 전부를 드린 것처럼 찬양을 받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의 이면에는 허영심과 거짓된 욕심이 있었습니다. 헌금을 드리면서 허영심과 욕심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부부는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획을 하였습니다. 부부간에 완전히 마음을 같이하여 거짓말을 하기로 작정을 했고 그 작정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의 죄는 소유의 일부만을 헌금한 것에 있지 않고 일부만 내고도 전부를 드린 것처럼 한 것이 잘못입니다. 거짓과 위선이 그들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남을 속여서라도 칭찬을 받고 영광을 얻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촉발시킨 자가 누구인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동기의 이면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사탄이 네가 모든 재산을 헌납하지 않고도 희생적인 헌납자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준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의 마음을 사탄에게 열어 보인 것입니다. 사탄에게 마음을 열어 준 것은 마치 사막에서 낙타에게 코 끝을 허락한 것이나 같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하도 덥고 피곤하니까 잠깐 쉬었다 가겠다고 천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천막 안에서 잠깐 쉬는 동안에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까 낙타가 밖에서 천막 안으로 코를 디밀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낙타에게 코를 밖으로 빼도록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그랬더니 낙타가 사정을 했습니다. “주인님은 그늘에 계시지만 저는 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온몸이 타는 것 같습니다. 이 넓은 천막에 제 코 한 개쯤 좀 들어가서 쉰들 어떻겠습니까?” 마음씨 좋은 주인은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 보니 낙타의 머리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똑같은 부탁에 똑같은 허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앞다리까지 들어왔습니다. 주인은 안 되겠다 싶어 몰아내려 했습니다. 그러자 낙타는 배짱 좋게 말했습니다. “주인님, 제가 더워서 죽어버리면 주인님도 끝입니다. 우리 조금 같이 고생하고 같이 삽시다.” 조금 후에는 큰 덩치의 낙타가 아예 조그마한 천막 안에 통째로 들어와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주인은 눕기는커녕 앉아 있을 자리도 없었습니다. 화를 내고 꾸중하고 쫓아내려는 주인에게 낙타는 도리어 배짱 좋게 말했습니다. “답답하면 주인님이 나가시죠.” 문제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작은 코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탄에게 마음의 작은 구석이라도 열어주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것쯤이야 괜찮겠지라고 했는데 결국 큰 죄를 짓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사탄은 열린 작은 구멍으로 들어와서 완전히 그를 장악하여 마침내 그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그 놈은 지금도 같은 수단과 방법으로 사람을 속이고 악한 생각을 집어넣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여기에 아나니아가 속아 넘어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가 누구에게 범죄한 것인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들의 양심을 속이는 죄를 지었고 사도들과 교회 앞에 거짓을 말했으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하여 특별히 하나님과 성령님을 속이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결국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쉽게 속임으로 자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하나님을 속이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3절의 감추었다는 동사는 여리고 성의 전리품 중에서 얼마를 감추었던 아간에게 쓴 단어와 동일합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크게 패전하였습니다(7:1-26). 마찬가지로 아나니아 부부도 속이고 감춘 결과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 부부의 어리석은 계획은 탄로 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탄로 날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회중들도 그 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에 의해 그대로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탄로는 순간적입니다. 사전에 혐의나 이상한 추측이나 증거가 있어서 미리 심문한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 앞에 섰을 때 그대로 들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은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땅을 판 것, 그 값의 일부를 감춘 것, 두 사람의 협약 등 베드로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눈은 성령으로 조명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고전 2:10). 그 탄로는 공개적입니다. 그들의 죄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그 폭로는 공개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422절의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감추인 것이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려진 처벌도 갑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범죄자 아담에게처럼 신속히 내려진 벌이었습니다(3:8). 동생을 쳐 죽인 가인(4)과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27:5, 1:18)와 교만했던 헤롯에게(12) 하나님의 벌이 갑자기 임하신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도 갑작스럽게 그 벌이 내려졌습니다.

 

그 처벌은 엄중하며 초자연적이었습니다. 그들의 혼이 떠나갔습니다. 5절과 6절에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 쯤 지나서 이 일을 전혀 알지 못했던 그의 아내 삽비라도 주의 영을 시험함으로 결국 죽고 맙니다. 삽비라는 자기 남편의 죽음을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어리석은 여인이었습니다. 10절에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누구하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하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즉시로 초자연적으로 그들을 처리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녀의 거짓말을 비난하자 하나님의 영이 그 심판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6:23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15:8)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가 시작되고 이제 경건하고 거룩하게 그 교회가 유지 발전되어 나가는데 사탄의 속임수로 교회 안에 위선과 거짓이 들어오려고 했을 때 성령께서 이를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위선과 거짓이 발붙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제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신다. 거룩한 채 하는 것은 조롱거리밖에 되지 못한다고 한 칼빈의 말이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울러 조지 맥도날드(George MacDonald)이 세상의 비극 가운데 절반은 어떤 사람이 되고자 애쓰기보다는 마치 어떤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는 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와 지금의 교회를 비교해보면 하나님의 엄격한 징계가 그 때 이후로 관대하여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사람들이 아나니아보다 덜 가증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심판을 덮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자비로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바나바의 행위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여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행위가 사람이 보기에는 비슷해 보여도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구분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구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증하고 위선된 구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진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위선과 탐욕으로 내어놓은 것을 당신의 교회와 그 가난한 자를 위한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진실 속에서 주어지는 헌신입니다.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물질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통하여 구제를 확장해 가시거나 교회를 확대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교회의 금고를 감찰하십니다. 헌금으로 인하여 영광이 가리워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십니다. 헌금을 하는 사람이나 관리하는 사람이나 사용하는 자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게 드리고 관리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 더 살펴보면 왜 누가가 이 본문을 다루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초대교회의 어두운 부분일 것인데, 이 본문을 다루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교회는 인간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자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두 구절에 걸쳐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5절에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했고, 11절에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직접 본 사람은 물론이고 이 일에 관하여 들은 사람들도 다 크게 두려워 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면 죽는구나.’ 이 사실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말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성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살 수 없다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증거로서 오늘날 성도들이 온갖 나쁜 일들을 저질러도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두려움은 교회만이 가진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불신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11). 이 일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는 것은 불신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분명히 아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일평생 경건한 인생을 살아가게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면 그는 실제로는 불신자와 같은 자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조차 들을 수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경건한 신앙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대신에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의 눈치를 보려고 하거나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어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두려움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에 대한 계시적인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알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은밀하게 행한 것까지도 다 보시고 계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거짓을 징계하시고 교회를 순결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본문에서는 교회를 순결하게 하시고 거짓을 징계하시는 신적인 두려움이 죽음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듣고 한 사람들이 다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진실함과 깨끗함으로 구제에도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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