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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14 오 신실하신 주 이정현 목사 20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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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3:1-9절 개역개정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514일 히 3:1-9, 모세와 예수님의 신실하심

 

우리가 읽은 본문은 히브리서인데 이 성경이 쓰여지게 된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여러 곳으로 흩어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외적인 박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같은 동족이었던 유대인들로부터 유혹을 많이 받았고 문중에서 버림을 받았고 심지어 이단이라고 낙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박해 속에서 비밀리에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가정이나 동굴에서 모여서 소그룹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들은 과거의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을 회상하게 됨으로, 과거 유대교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이런 환란 속에서 계속 신앙생활 해야 하는가를 놓고 갈등과 회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님의 영감으로 이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 서신의 핵심된 내용은 예수님의 충분성과 탁월함입니다.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아브라함보다, 모세보다, 그 어떤 제사장보다 탁월하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그 어떤 사람보다 우월하신 분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떠나 표류하고 있는 기독교인들,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며 갈등 속에 있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도록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3장 앞부분은 특히 모세와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비교하면서, 이 면에서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탁월하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번 시간에는 하나님 여호와의 신실하심과 진실하심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주안점을 두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 장 1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지금 이 편지의 독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사방 팔방으로 흩어져서 고난 중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여기에 더하여 현실이 너무 힘드니까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라는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저자는 흔들리지 말라, 그리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자는 자기를 포함시켜 흩어진 유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 우리의 부르심과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곧 성도, 교회라는 말입니다. 결국 성도 및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역할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성도와 교회는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도 아니고 타인에 의하여 생겨난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대제사장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하고 후자는 예수님의 사명 가운데 희생적인 제물이 될 것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따를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이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중보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예수님에게 고정하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을 예수님에게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유혹에 빠지거나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지 아니하고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히브리서 12(2-3)에서도 거의 비슷한 말씀으로 교훈을 하셨습니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고난을 끝까지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위대한 사도 예수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해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뿐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장하여 영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적인 거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한다는 것은 내 삶의 초점을 주님께 맞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내 삶이 바르고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카메라의 렌즈를 잘 조절하여 초점을 맞추어야 찍고자 하는 사물을 선명하게 찍을 수 있습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이 흐려지게 되고 심하면 분간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카메라 렌즈뿐만아니라 볼록렌즈도 마찬가지입니다. 볼록렌즈로 빛을 통과시켜 초점을 맞추면 종이가 탈 정도로 강한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초점이 잘 맞춰지면 거기에서 강한 에너지와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처럼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하나님에게 고정할 때, 거기에서 발생하는 신앙의 에너지는 대단한 것입니다. 어떤 환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이단과 원수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변화, 성숙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대단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몇 구절에서는 모세의 신실하심에 빗대어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다섯 구절 가운데에서 이라는 말이 무려 6번이나 나타나는데, 구약에서는 이 말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였다라는 말을 몇 번 사용하는데, 이는 곧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하였다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 디모데전서 3:15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집을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같은 신구약의 대표적인 말씀을 볼 때에 이나 하나님의 온 집은 곧 성도들, 교회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 집에서 신실하였다고 말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온 집 위에서 신실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실신하다는 말은 믿을만하고 성실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고 또한 충성하다는 뜻으로도 사용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세나 그리스도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을 다했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의 충성에 대하여 기술하게 된 것은 민수기 12:7 말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확장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의 충성을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분의 신실함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5절 하반절에서 6절을 근거로 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셨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위에서 아들로서 그리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전치사가 분명히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데, 모세는 집에서(교회에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집 위에서(교회 위에서) 충성하였다는 표현하였고 또한 모세는 종으로, 그리스도는 아들로 충성했다고 말함으로 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집에서(교회의 일원으로써) 교회를 위하여 충성했으나 그리스도는 그 집을 지은 자(교회를 세우신 자로써, 만물의 창조자로써)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분이 충성하셨던 범위가 다릅니다. 모세는 집의 일원으로써 집에서 충성하셨고, 그리스도는 집을 지은자로써 집 위에서 충성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두 분의 신분과 권위가 완전히 다릅니다. 한 분은 종(사환)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신실함과 예수님의 신실함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모세가 받을 영광보다 그리스도가 받을 영광이 훨씬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하더라도 그 집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으나 예수는 그 집을 자신의 피로 세우신 분으로(20:28) 그 집에 속해 있는(제한 된 범위 안에 있는) 모세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전 영역에서 온전하게 충성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출애굽 직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얼마간 간직했었습니다(34:29-35, 고후 3:7). 그러나 그의 영광은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했습니다(고후 3:7, 13).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2:9) 하나님의 본체시며(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시므로(1:4, 5, 9) 모세가 받은 영광은 예수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될 만한 영광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큰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히브리서 2:9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는 예수를 보니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충성을 인정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본문의 몇 구절은 모세에 비해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강조하고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 하반절은 해석하기가 약간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여기에 나오는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둘로 보지 말고 하나로 보면 좋겠습니다. 다시말해서 기독교인의 소망을 증명하는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기독교인들이 부끄럽지 아니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끄럽지 아니한 천국의 소망을 굳게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참 성도이다라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성도(교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천국의 소망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흩어진 성도들의 갈등, 이리 갈까 저리 갈까하며 방황하는 그들에게,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혼동스러워 하는 그들에게 흔들림 없이 참된 성도는 우리의 자랑인 천국을 확실히 소망하며 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7-8절에서 또 다른 교훈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이르신 바라고 하셨는데, 구약 계시의 말씀을 성령의 음성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9:8에서도 이로써 성령께서 보이신 것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문의 기록자는 구약의 모든 말씀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오류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여기서 인용하는 구절에 시편 95:7-11의 말씀을 광범위하게 인용을 하셨습니다. 요약하면 오늘 너희가 천사나 모세나 선지자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아울러 즉각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과거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바로가 보였던 그런 마음의 완악함을 보여서도 아니되고 아울러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였던 그런 완고함이나 불평, 불만, 부정적인 반응, 믿음 없는 반응을 보여서도 아니된다는 얘기입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던 바로는 그의 신들과 함께 멸망하였고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하심에 불평 불만하고 지도자 모세를 거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현재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보다 더 크신 분이시고 모세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고, 천사나 선지자보다 더 크시고 더 높으시고 더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듣지 않는 것입니까?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왜 그 음성 듣기를 거절하시는 것입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듣는가는 곧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대하는가와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곧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짓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을 때 눈을 감거나, 딴전 피우거나, 졸거나, 자거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느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자기 교인들 6명이 교회를 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전부 신천지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었답니다. 그 사람들, 처음에는 말씀을 잘 들었답니다. 교회에도 열심히 봉사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신천지 명단에서 그들을 확인하고 계속적으로 교회에서 신천지 예방 광고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눈치를 챘는지, 설교 시간에 눈을 감고 있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래를 쳐다보거나 눈이 동태눈깔처럼 바뀌더랍니다. 그리고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중간에 앉다가 나중에는 뒷자리에 가서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전혀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말씀을 잘 들었던 것도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갈급해 하며 들었던 게 아니고 저 목사가 혹시 실수하지는 않는가, 말씀을 잘 못 전하는 것은 아닌가, 성경을 틀리게 인용하지는 않는가-이런 것을 책 잡기 위해서 들었던 것입니다. 이단들이 교회 와서 설교를 들을 때 제대로 듣겠습니까?

 

오늘날 너희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사람은 죽는 것이고, 회개하며 부드럽게 사모함으로 듣는 사람은 그 말씀으로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9절 말씀인데 이 구절도 해석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이 구절을 다른 번역본으로 보면 이해가 쉽게 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너희 조상들은 사십 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도 하나님을 시험삼아 떠보았다고 번역을 하였고, 바른 성경은 거기서 너희 조상들이 사십 년 동안 나를 시험하였고 또한 나의 행한 일들을 보았다고 번역을 하였고 표준 새 번역에서는 거기에서 그들은 나를 시험하여 보았고, 사십 년 동안이나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았다로 번역함으로 바른 성경과 거의 같게 번역하였습니다. 이렇게 번역본들을 볼 때에 우리는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눈으로 직접 보았고 몸으로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배반하고 불신앙하였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요구, 우리의 요구대로 안된다고 변하거나 변질되면 안된다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체험했으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믿고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확신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본문은 모세의 신실하심과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의 우월함(탁월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모세보다 월등함으로 그가 받아야 영광도 모세보다 우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뿐만 아니라 다른 성경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17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제사장이시라고 하시면서, 신실하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계시록 3:7/ “빌라델비아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달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주님을 가리켜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록 3:14에서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계시록 19:11에서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했습니다. 백마 탄 그리스도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라고 했습니다. 이같은 몇 구절의 성경을 보더라도 그리스도의 성품은 진실하고 신실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동일한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성품인 진실과 신실하심을 본받아 살므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

기도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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