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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15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이정현 목사 2023-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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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8:31-39절 개역개정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115, 8:31-39,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2023년의 교회 표어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라이고 1월의 주제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하나님의 고귀한 성품 중 하나인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주에는 호세아 선지자가 음탕한 여인 고멜을 그렇게 사랑했다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둘째 주에는 복음서 중의 복음이라 불리는 요한복음 3:16의 말씀을 살펴봄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세상의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을 통하여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 8장인데, 이 부분은 가락지의 보석과 같은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가치 있고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몇 가지 질문과 거기에 따른 대답이 나오는데, 먼저 31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의 이 일28-30절에서 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렇게 빚었냐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는 인간이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했는데, 이는 만일 하나님이 성도를 위하시면 그 무엇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유다서의 말씀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두고 마귀와 변론할 때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1:9)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선악간의 모든 일을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성도편에서 성도를 위하시면 그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위하시며,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자를 누가 어찌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장중에 붙들고 계시는 자를, 해할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장중에 붙들고 계시고 천군천사들로 호위하고 계시다면, 누가 여러분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듬뿍 담겨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22:12),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22:16)-이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음에 있어서, 이삭을 제물로 바친 기사는 아브라함의 절대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주므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에 그 이야기를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에게 내어주신 사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사건을 근거로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성부 하나님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 대속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때 많은 고통과 고초가 따랐으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김없이 준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로 하여금 온갖 수난과 고초가 따르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집행과정을 겪도록 그대로 허용하셨던 것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이상의 지극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대속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자기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고 재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우리 모든 사람은 소위 말하는 만인 구원’ ‘보편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2절의 우리 모두26절에 기록된 성령의 간구 하심을 힘입은 자들이요, 28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29, 30절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에 의해 선택된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32절만을 들어서 우리 모든 사람을 만인 구원설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없고, 그 말을 앞 구절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본다면, 이 구절을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음으로, 이 구절은 선택적 구원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만인 구원론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선택적 구원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음으로 그 외 이 땅의 모든 권세와 피조물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반드시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영육적인 것들을 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천사들도 우리가 부릴 수 있는 영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14).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위해 다른 무엇을 아끼겠는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성도의 가치와 중요성과 위치가 존귀하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과 대답은,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대답은 아무도 없다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셨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인데, 그분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두 번째 질문과 대답이 33절에 나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1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과 33절의 고발하리요라는 말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를 대적한다는 말과 성도를 고발한다는 말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고발하리요란 단어는 법정적인 용어로서 곧이어 언급되는 의롭다라는 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고발하는 목적은 상대편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스가랴 3장의 말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단이 여호와 앞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송사하였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송사하였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여호수아가 추악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다는 내용으로 고발을 한 것 같습니다. 이같은 송사가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거듭 책망하시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죄를 사하시고 아름다운 옷과 깨끗한 관을 씌우셨습니다. 여호수아 자신이 깨끗했기에 송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재판장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그를 깨끗케 하셨기에 여호수아는 사단의 송사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3:1-5).

 

이와 같은 상황이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는 것을 본 절에서 바울이 진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탄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것처럼 똑같이 우리가 죄인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아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의롭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기 때문에 너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성구.... 의롭다하신 분은 만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고, 최종 심판주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그 앞에서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운 우리를 대적하고 고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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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고, 아들까지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아무도 대적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풍성히 채워주시고, 우리를 고발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시고 높은 산성이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부터는(34절 이하에서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말하기는 하는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질문과 답이 34절에 나타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것은,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되었기에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로마서 8:1-2에서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이유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성도가 죄의 법에 사로잡혀 마음이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정죄를 당하지 않는 신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과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유와 해방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정죄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26절에서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성령은 성도의 연약한 삶을 위해 간구하시는데, 말할 수 없는 탄식하심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또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탄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 절에 언급된 간구하다’(엔튕카네이)는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변호적인 간청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자신이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자기 백성된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 변호해 주십니다. 나에 대한 누구의 정죄가 있을 때, 그것을 들으시고 우리를 변호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타인의 정죄에 대한 것을, 주님이 변호적인 간구를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또다시 죄와 사망에 빠져서 정죄를 당하여 지옥갈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질문과 대답이 35절 이하에 나타나 있습니다. 질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인데, 여기에 대한 답은 조금 길게 나와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이 질문은 앞에서 언급했던 질문들(31, 33, 34)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어느 누구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성도를 송사할 수 없고, 어떤 사람도 성도를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 구절의 질문은 39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 대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리요’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특별히 로마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의 삶의 터전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직접 과거에 경험했던 것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고후 11:23-27).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은 이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여섯 가지를 대표하는 큰 어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을 대표하여 한마디로 환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곤고는 행동이 제한된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옥에 갇힌 경험을 나타내고 있는 듯 합니다. 바울은 여러번 옥에 갇힘으로 행동의 제한을 받는 곤고함 가운데 있었습니다.


박해는 신앙상의 이유로 계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기근은 민족이나 지역적인 차원의 기근일 수 있으나, 본 절이 바울 자신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굶주리며 마시지 못한(고후 11:27) 경험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적신은 고린도후서 11:27헐벗었음과 원어 상 동일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자기의 겉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할 만큼(딤후 4:13) 항상 입을 것조차 변변치 않았던 것입니다. 헐벗고 다니며 적신으로 사역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위험은 바울이 당했던 모든 종류의 위험, 즉 강도의 위험, 강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등등을 말합니다.

 

칼은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위와 같은 일들로 인하여 자기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며, 우리가 마치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36, 44:22 인용). 매일 매일 자기들은 죽임을 당하는 것같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위로부터 당하는 환란과 곤고로 인하여 파 죽음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37절에서 극적인 반전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우리가 비록 날마다 환란의 울타리 안에서 살지만, 우리가 압도적인 승리를 얻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혁혁한 승리를 지속적으로 성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여유 있게 이긴다고 말하고, 환란 중에도 영광스러운 승리를 하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바울은 성도들이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이’(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승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두 구절을 통하여 어떤 피조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과 여건도 성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방해할 수 없음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읽기만 해도 절로 은혜가 되고 힘이 납니다.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 나오는 것들이 전부 9가지입니다. 사망과 생명, 천사들과 권세자들(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악한 영들), 현재 일과 장래 일, 능력(신적인 세력), 높음, 깊음까지입니다. 9가지 사항을 담아서 어떤 피조물이라도라는 말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피조물 중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구별할 것 없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언급하기 위해 바울은 아홉 가지의 단어를 나열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성도가 견인할 수 있는 근원이요, 불가항력적 은혜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아무리 큰 환란과 핍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고난과 시련과 궁핍함 중에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원동력이며, 살아가다가 그 누구라도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론

 

본문은 네 가지 질문과 대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1)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셨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인데, 그분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 편이 되시니까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2) 누가 능히 우리를 송사하리요?; 의롭다하신 분은 만유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시고, 최종 심판주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그 앞에서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3)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며 간구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송사하거나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4)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아무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며, 누가 우리를 송사하며, 누가 우리를 정죄하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시고,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해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시골에 있는 어떤 농가를 방문했습니다. 농가의 마당 한쪽 편에 큰 풍향계가 서 있었고 그 풍향계 끝에는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촉이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펄젼 목사님이 자세히 보니 흔들리는 화살촉 밑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쓰여진 표가 매달려있었습니다. 의아스럽게 생각되어 그 집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설마 하나님의 사랑이 바람 부는 대로 바뀐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정반대이지요. 바람이야 어떠한 방향으로 불던지간에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거기에 그 말씀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이 한번은 북극 근처의 바다 깊이를 재려고 긴 동아줄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끝이 바다 밑바닥인 해저에 닿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다가 이 동아줄보다 더 깊음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음날 더 긴 줄을 가져다가 깊이를 재 보았으나 역시 해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같은 작업을 며칠 계속하였지만 북극의 깊은 바다의 깊이를 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난센은 그의 일기에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이 근방 바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끝없이 깊은 바다이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히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여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알고 믿고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앞으로는 그 사랑을 더 많이 알고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 그 사랑

기도 제목/ 하나님,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체험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mem000003b40002.t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90pixel, 세로 630pix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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