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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5 15 한계를 넘어서는 은혜 황종석 20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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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열왕기하6:33절 개역개정

33.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열왕기하7:1-2절 개역개정

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515일 주일 설교

열왕기하 6:33-7:2 / 한계를 넘어서는 은혜

 

제가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50대 중반이 된 지금, 문득문득 지난날을 이렇게 돌이켜보면, ‘그래 그때 참 힘들었지~’라고 생각이 드는 시기가 있습니다. 제가 2000년도에 결혼을 했는데요 그때는 제가 유학 중이어서 잠깐 한국에 들어와서 결혼식만 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신혼집이 문제가 되지 않았었는데요 결혼하고 3~4년 지나서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오니까 집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에 놓였었습니다. 전셋집 얻을 목돈이 없어서 당시에 집사람이 조그맣게 운영하던 학원을 정리하고 대출을 받아서 조그만 아파트를 사자고 결정을 하고 이사를 했습니다. 집을 얻고 현금을 조금 남겨두고, 그때까지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지 했는데 생각처럼 그렇게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3~4년 동안 계속 빚을 어떻게 어떻게 얻어서 생활을 유지하면서, 살얼음판을 걷듯이 생활을 하다 보니, 아마 집사람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길었던 유학 생활만 마치고 나면 학교에도 금방 자리가 날 줄 알았는데, 시간강사 자리도 여의치 않고, 언제 강의가 들어올지 모르니 전임 사역을 할 수도 없고 얼마나 앞이 캄캄했을까?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많이 미안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을 보낼 때 집사람이 섬기던 교회가 바로 소망교회였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배곧이 아니라 정왕동에 있었는데요, 저도 잠시 청년부를 맡아서 사역했던 적도 있습니다. 유학 중에 일 년에 한 번 씩 한국에 오면 늘 저에게 설교 기회도 주시고, 학교 강의 자리도 알아봐 주시고, 이제 막 공부를 마치고 어려운 중에 있는 저희 가정을 늘 격려해주셨던 이정현 목사님과 사모님께 큰 은혜를 입으며 그런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2009년에 생각지도 않았던 백석대학교 대학원에서 감사하게도 교수 임용 제안을 받아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학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집사람하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때 힘들었던 거 생각하면, 지금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때 소망교회에서 목사님뿐 아니라 성도님들이 위로해주시고 기도해 주신 거 생각하면 지금도 잊을 수가 없지. 참 감사하다. 그때 정말 저희 가정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났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는 정말 고통이 느껴졌던, 물론 사람마다 한계상황을 규정하는 범위가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제게는 일종의 한계상황 같았습니다.

 

이런 한계상황에 대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부딪혔을 때(예를 들어 죽음, 고통, 죄 등의 문제를 대표적으로 말했는데요) 가 바로 한계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계상황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하더라는 겁니다. 누군가는 이 상황에서 도피하거나 눈을 감아버려 자신의 존재를 상실해 버리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그때 인간은 자신의 좌절스러운 한계상황 앞에서 비로소 초월자에게 시선을 돌려 본래의 자기 존재가 되살아나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계상황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이 마주하는 한계상황은 초월적 존재 즉 신이 인간에게 보내는 암호이다. 신이 보내는 암호는 느껴지고 깨달아지는 것이지 이성적으로 절대 직접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은 초월적인 영역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암호를 한번 해독해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암호를 해독해 나가야 한다.’

 

저와 여러분은 온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죄인 되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한계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나아온 사람들입니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저와 여러분의 이 믿음의 고백이 우리 스스로 사유하고 고민한 결과로 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존재하며, 그 창조주께서 인간의 절대적 한계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약속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해결하시겠다는 것을 믿게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실현되는 통로이자 증거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지만 죄와 죽음의 문제라는 한계상황을 해결 받았다는 우리는 왜 여전히 살아가면서 불안, 좌절, 낙심, 우울, 절망들을 경험하게 될까요? 왜 여전히 이것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걸까요?

우리는 문제해결을 통해 행복한 삶 혹은 인간다운 삶을 꿈꿉니다. 예를 들어 취업 때문에 고민한다면 그것은 취업하면 해결이 되고, 돈 때문이라면 돈이 있으면 고민이 해결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직장에 들어갔다고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요.

동료 간의 관계에서, 자신이 맡은 업무에서, 승진에서 등등 회사를 들어가도 문제는, 고민은 여전히 일어난다는 것을요.

돈이 생겨도 그 돈으로 일어나는 또 다른 고민과 문제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찾아오는 불안, 좌절, 낙심, 우울 등의 고민과 문제의 실체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이고 뿌리 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그에게 나타나는 문제들은 소소한 문제들이며 그것들은 뿌리 없는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뿌리 없는 문제는 결코 우리의 존재를 흔들 수 없습니다. 뿌리 없는 문제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문제에 메이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한계상황에 대해 자유 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이 이전에 내가 한계라고 느꼈던,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삶의 벽 같은 문제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문제와 상황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며 그래서 한계상황이라 느꼈던 내 삶의 틀이 넓어지고 내 삶의 경계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도 무수히 많은 한계 상황들이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전히 현재 우리도 경험하고 있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육체적 질병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들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런 다양한 상황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먼저 인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여전히 한계상황은 존재하며, 이것에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특별하게 마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평범하게, 때로는 너무 가혹하게 찾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지나쳐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였던 엘리사도 한계상황을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아람이라는 나라가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며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68절부터의 말씀이 실은 오늘 말씀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람 왕이 북이스라엘을 침략하고자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길목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람의 공격 실행은 번번이 좌절되고 맙니다. 그러자 아람의 왕은 누군가 이스라엘에게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면 이러한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면서 밀고자를 찾으려고 자신의 신하들을 추궁합니다. 신하들은 자신들 중에 누군가가 밀고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엘리사가 자신들이 왕과 함께 하는 모든 말들을 미리 알고 준비하도록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여 준다고 말합니다. 이에 화가 난 왕은 엘리사를 붙잡기 위해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을 보내어 엘리사가 거주하는 성을 둘러 포위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기적을 보게 하시지요. 엘리사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자 성을 둘러싼 모든 아람 군인들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아람 군사들을 이끌고 사마리아 성으로 인도합니다. 그 광경을 본 이스라엘 왕이 적군인 아람의 병사들을 죽일지를 엘리사에게 묻지만 엘리사는 죽이는 대신 잘 먹여서 자신들의 나라로 돌려보내시라고 조언합니다. 그 이스라엘 왕은 이러한 엘리사의 말대로 적국의 병사들을 죽이는 대신 살려 보내는데, 그냥 보내지 않고 잔치를 베풀어서 극진하게 대접하여 보냅니다. 그 뒤로 얼마 동안은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땅을 침략하지는 않습니다. 이 내용이 68-23절까지 나오는 말씀이구요.

그러나 24절부터는 다시 반전이 일어나는데 아람 왕 벤하닷이 온 군대를 모아 사마리아를 에워싸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가 살려 보낸 병사들이 다시 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적국 아람이 군대를 이끌고 침략한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병사들에 의해 수도였던 사마리아 성이 포위를 당하고 그것 때문에 한때 잔치를 베풀어 적국을 먹여 살려 보낸 성에는 오히려 양식이 떨어져 극심한 배고픔을 겪게 된 것입니다.

혹시 이스라엘 왕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난번에 아람 군을 다 죽였더라면 이렇게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그때 엘리사의 말을 듣지 말고 그들을 죽였더라면 이러한 극심한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그러한 생각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이 보이는 곳이 나타나긴 합니다. 바로 631절에서 왕이 하나님께 저주받을 각오를 하고 엘리사를 죽이고 말겠다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저는 엘리사에게 과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어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했던 선한 의도, 물론 어쩌면 하나님의 의도였을지도 모를 행동이었겠지만, 사마리아 성이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된 상황 앞에서 엘리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마리아 성은 자식을 잡아먹기까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나는 과연 옳은 결정을 하였던 것일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고민되었을까요?

아마 저라면 그 상황이 엄청난 한계상황으로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에 부딪혔을 때 누군가는 이 상황에서 도피하거나 눈을 감아버려 자신의 존재를 상실해 버리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초월자에게 시선을 돌려 본래 자기 존재가 되살아나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감당하기 힘든 한계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는 한계 범위를 스스로 결정해 버리며 자신의 존재를 상실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같은 한계상황을 맞이했지만 누구는 한계를 스스로 결정하여 제한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존재를 상실해 버리는 두 부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왕의 곁에서 시종무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 한계상황을 능히 해결하실 수 있다고 할 때 그것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일지라도 해결할 수 없다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고를 여시더라도 이 성의 양식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시종무관에게 엘리사가 이렇게 말하지요.

너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심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스스로 결정해 버린 정한 그 범위 안에 갇히고 말 것이다’. 라고는 것이지요. 결국 그 시종무관은 그 성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때 죽고 맙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도 해결 못 하신다며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해 버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한계 상황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상실해 버린 또 다른 한 부류는 바로 이스라엘 왕입니다.

 

30절 말씀에 보면 왕이 겉옷 속에 베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백성과 나라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왕과 그 백성들은 아람의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러 왔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엘리사를 구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벌써 다 잊었는지, 왕은 하나님께 물으려고 엘리사를 부르거나 엘리사에게 나아가지도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 지금의 상황을 묻고 도움을 구하며 돌이키려고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께 나아와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우리가 받은 이 모든 재앙을 보시오, 이런 재앙이 주님으로부터 왔는데, 내가 어찌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기다리겠소?”라며 한계를 스스로 결정해 버리고 말지요.

 

이렇게 어려운 상황 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상실해 버리고 한계를 결정해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엘리사 역시 이들과 동일한 한계상황 앞에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한계상황 앞에서 자신의 시선을 하나님께 돌려, 이 상황을 해결하실 분이 하나님 한 분만임을 믿으며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계상황은 한계상황보다 더 큰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었습니다.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상황도 힘든데 왕이 자신을 탓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된 상황에서 엘리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71절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습니다. ~” 바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하실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비록 절망적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이 해결해주신다는 약속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어 밤낮으로 눈물이 흐를 때, 너는 하나님을 기다려라 말씀하시니 내가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또다시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했던 시편의 말씀같이, 한계상황보다 더 큰 힘을 가지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계는 맞서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으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앞으로의 일들을 예측하거나 내 계획대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살다 보니 계획을 세운다 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로 낙담할 때도 있고, 예상치 못한 변수로 기대하지 않았던 은혜를 누리기도 합니다.

혹시 상수변수라는 단어를 잘 아실 겁니다. (제가 문과 출신이라 고등학교 수학책에서 얼핏 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상수란 변하지 않는 고정된 수를 말하고 반대로 변수는 조건에 따라 크기가 변할 수 있는 수를 말합니다. 상수와 변수는 주로 수학이나 과학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지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변수투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입니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어떤 것을 변수 자리에 두고, 어떤 것을 변하지 않는 상수 자리에 두느냐에 따라 현실을 바라보고, 삶을 바라보는 해석이 달라집니다.

김경집이라는 인문학자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삶의 상수와 변수가 전도되거나(뒤바뀌거나) 잘못 해석되면 모든 삶의 체계와 해석이 어그러진다. 삶의 상수와 변수를 분별하지 못하면 그는 삶을 그저 운에 맡기에 된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적용해 볼 수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한계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깨닫도록 보내시는 싸인이자 암호일 수 있습니다. 그 싸인을 느끼고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우리의 존재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싸인은 1회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얘야, 내가 너의 하나님이란다. 너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벽을 만날 때 기억하렴, 그 벽은 너를 절대 넘어뜨릴 수 없단다. 눈을 들어 나를 보렴. 나를 믿고 그 벽을 넘어서렴.”

혹시 지금 한계 상황 앞에 놓인 분이 계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변함없는 상수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한계를 넘어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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