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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3 13 우리와 관계된 세 가지 기도 이정현 목사 202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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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6:11-15절 개역개정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2 3 13 6:11-13, 우리와 관계된 세 가지 기도

 

주기도문(예가기도)의 구조는 간단히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호칭, 간구, 그리고 송영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그 하나님께 간구하며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좀 더 넓게는 간구만 6개로 나누면 됩니다. 처음 세 개의 간구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기도이고, 다음에 나오는 세 개의 간구는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간구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하나님과 관련된 세 가지 간구는 먼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이고, 세 번째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입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보게 될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세 가지 간구는 먼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이고, 두 번째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이며, 세 번째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입니다. 이 세 가지 기도를 간단히 살펴봄으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본문의 양식’(알토스)은 무엇을 말합니까? ‘양식’, ‘’, ‘양식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bread’()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알토스으로 번역하는 것보다 양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빵보다 양식이 더 폭넓은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의 양식을 달라는 기도이지, 단순히 매일 매일의 빵을 달라는 기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튼 알토스양식으로 번역한 한글 성경의 번역은 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양식이 육체적 양식을 말합니까? 아니면 영적인 양식을 말합니까? 이것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양식은 사람이 먹고 배부르며 만족을 얻는 먹을거리를 말합니다. 빵이나 떡이나 쌀이나 야채나 과일 그리고 고기 등등을 말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들의 육체를 보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양식은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장해 하셨고 과일을 구하셨고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계실 때에는 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날의 양식을 먹어야 영양분을 공급받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굴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30:8).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식이 단순히 하루하루의 끼니를 때우는 먹을거리만을 가리키겠습니까? 혹자는 영적인 양식을 말하기도 하고또 다른 사람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양식을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광의적으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이 같은 광범위한 것을 의도하셨는지는 모르나 일차적으로 육적인 양식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광의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여기의 양식은, 영육적인 양식과 생활의 필요한 것을 다 포함한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그 범위가 굉장히 넓은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일용할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쉽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이 말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용할이라는 말은 매일의’, ‘나날의’, ‘일상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시간상으로 오늘이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가까운 미래를 말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먼 미래까지를 포함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가올 가까운 미래를 포함한 현재를 가리켜 일용할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을 쉽게 풀어서 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 양식을 달라고 구하는데 1, 5년 후의 것, 먼 미래의 것까지 구하지 말고 가까운 미래에 필요한 것만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내년에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을 주세요.’ ‘2023년도에도 양식을 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날에 필요한 양식, 아니면 2-3일 분량의 양식을 간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욕심을 부려서 1달치, 1년치의 먹을거리를 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날그날 필요한 양식만 구하면 됩니다. 내일 필요한 것은 내일 또 구하면 됩니다. 오늘 먹을 양식이 있으면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일 또 기도하면 내일의 필요한 양식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용할이라는 말과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이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까? ‘나와 우리 가정은 한 달 먹을 양식이 있다거나 농촌에서 가을에 추수를 하였기 때문에 1년 먹을 양식이 있다면 이 기도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넘쳐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못 먹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날의 양식을 애타게 구하는데 얻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지구촌에는 굶주림과 가난으로 5초에 3, 1분에 34, 1일에 5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굶주림과 가난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는 하루에 1,000원이 있으면 죽지 않고 영양분을 공급받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무려 15억 명이랍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를 우리라는 말에 포함시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간청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 생활을 합니다. 출애굽 한 지 한 달쯤 지나서 양식이 떨어지니까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굶어죽게 생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굽에 그냥 있었을 걸. 애굽에서는 고기도 맘껏 먹었는데.” 이런 원망을 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갓씨 같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은 만나였습니다. 이 만나는 매일 매일 주셨습니다. 한 가족 당 한 오멜(2.27리터)의 양식을 거두라고 하셨고, 아침에 거두어야 하고 욕심을 부려 많이 거두어 내일까지 남겨두면 벌레가 먹어 썩어서 냄새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그날그날 주시는 하늘의 양식이므로 그날그날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날그날 필요한 양만큼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200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일의 양식으로 40년 동안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의 이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게 되며, 하나님의 것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매일의 필요한 것으로 만족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당신의 자녀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관계된 두 번째 기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주님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신경에도 나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혹자는 이 기도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았는데 왜 또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내 모든 죄가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깨끗이 용서받았고 진홍같이 붉고 먹보다 더 검은 죄라도 희게 씻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범했던 인간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까지 말입니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이 용서는 심판주로서 자연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에서 용서, 해방, 그리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의 질책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시킨 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한 것 등등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성화 차원에서 지속되어야 할 요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이미 몸이 깨끗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씀 중 본문의 용서는 발 씻는 행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의 삶이 늘 연약함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하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따라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란 무엇입니까? 죄라는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빚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과녁에서 빗나간 생각과 말과 행동입니다. 죄는 불법이며 불순종입니다. 죄는 들어가지 말라는데 들어가는 것이고 들어가라는데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거역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불행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우리의 용서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공로(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거짓말을 했는데 그것을 제가 알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제가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저 사람의 거짓말 한 죄를 용서했으니 나의 거짓말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씀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용서가 우선이냐, 아니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우선이냐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의존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수직관계와 수평관계, 서로 간에 어떤 연관이 있느냐의 질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선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적게 용서받은 자가 적게 용서하며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용서하는법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여기에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먼저 나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것을 근거로 이웃의 과실을 용서합니다.

 

본문은 보상적이며 조건적 기도를 제시하지 않고 다만 원죄로부터 해방 받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어떤 자세로 서야 하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칼빈도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 것으로 인해 그것이 한 원인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을만한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18:21)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 이상의 죄에서 용서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악한 종의 비유’(18:23-35)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는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트렌치는 이것이 미화 16,500,000달러에 해당되는 돈이라 했다; 수백 억 원에 해당하는 돈) 빚진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빚을 갚을 길 없어 임금에게 호소했더니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은혜 입은 이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너무 적은 돈이다) 빚진 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대노하여 그 종을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18:32-33)라고 책망하면서 그 종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비유 말미에 주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자기 힘으로 결코 청산할 수 없는 거대한 빚을 지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용서받았건만 이웃이 우리에게 잘못한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사죄를 받은 죄인은 그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을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이 비유의 주된 교훈을 기술했습니다.

 

주인이 악한 종을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2-33)고 한 말씀 중에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그 용서의 은혜를 주위에 베풀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착한 일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833절에 나와 있는 마땅하지 아니하냐......?”(Should you not......?)라는 말은 이것이 너의 영구적인 의무가 아니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죄에서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받은 자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이웃에게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끝으로 여기에 첨가하고픈 것은 이 간구가 단순히 개인적인 죄에 대한 용서뿐 아니라 신앙공동체 전체의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어떤 조직체이든 내외부적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개인은 가정, 가정은 직장, 직장은 또 다른 단체와 단체는 사회와 국가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교회도 개인, 가정, 사회, 국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죄는 개인뿐 아니라 반드시 교회 공동체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현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죄가 상대방에게 미칠 수 있고 우리의 죄가 사회와 교회를 병들게 하며 무력하게 하며 부흥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서로 힘써야 할 공동 기도입니다. 개인의 죄를 회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정의 죄도 교회의 죄도 사회와 민족의 죄, 인류의 죄를 가슴에 안고 신자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매일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관계된 세 번째 기도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입니다.

 

이 기도는 예가기도의 간구 중 마지막 간청입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어떤 사람이 우리와 관계된 이 세가지 간구를, 현재, 과거, 미래와 연관시켜서 말한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오늘의 문제를 주님께 의탁하는 현재적 기도이고,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는 어제 잘못된 것에 대한 과거적 문제이고, 그리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는 아직 내가 당하지 않은 내일을 위한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항상 과거 위에 기초하고, 그리고 미래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기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문제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문제만을 가지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미래의 문제를 놓고도 기도합니다. 결국 신자들은 양식의 문제를 놓고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되고, 죄의 문제를 놓고는 과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시험의 문제를 놓고는 미래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한글 본문을 보면 13절이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두 개의 간청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원문상으로 보면 하나의 간구임을 알 수 있습 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요청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전반절의 시험’(temptation)과 후반절의 ’(the evil one)은 서로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전반절은 부정문으로 되어 있고 후반절은 긍정문으로 서술하고 있을 따름이지, 결국 내용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나 악에서 구해달라는 말은 거의 동일하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마귀로부터 오는 유혹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말은, ‘우리가 시험에 복종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항복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표현입니다. 또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라고 번역을 합니다. 결국 이 같은 표현은 전부 마귀의 시험에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이 사단의 시험에 넘어지거나 거기에 굴복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유혹한 사단은 지금도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시험하는 자이고 우리를 삼키고자 다니는 우는 사자이고 옛 뱀이며 시험의 덫을 가장 잘 사용하는 원수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시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사단으로부터 시험과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시험을 이겨 승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 시험, 사자의 시험, 이방인들의 시험, 악형의 시험, 희롱과 채찍과 옥에 갇히는 시험, 돌로 맞고 톱으로 켜는 시험, 궁핍의 시험을 당하여도 초대교회 신자들은 믿음으로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런 사람들을 시험한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교묘하게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하였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오죽하셨으면 예수님이 생전에 이런 말씀을 다 하셨겠습니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22:31).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다니면서 신자들을 밀 까부르듯 하기 위하여 쉴 새없이 청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하기 위하여 우리를 가지고 놀기 위하여 청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원수의 시험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마귀의 시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 표적이 되어 어떤 시험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에 시험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먹는 것 때문에 시험을 당하기도 합니다. 밥이나 떡 때문에 또는 술이나 담배, 뇌물 때문에 시험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혹자는 이성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성의 미모와 무드에 약합니다. 예쁜 여성을 보면 현혹이 되어 이성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드에 절제를 못하고 경솔하게 행동하여 실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심에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나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덤비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집착하여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직분을 명예로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분쟁이 생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돈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자도 많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돈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유다의 운명을 알면서도 물질에 미쳐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형제의 의리도 끊고 친구와의 우정도 끊고 그리고 부모와도 등지고 심지어는 신앙까지 팽개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독에 빠져 인격과 신앙을 망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 같이 여러 시대에, 여러 경로를 통하여 우리가 사단의 시험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시험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험에 들지 않고 승리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를 잘 해야 합니다.

 

먼저는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원수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우선 준비해야 할 것은 말씀 충만입니다. ‘성령의 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시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는 자를 물리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을 통하여 말씀 충만해야 원수의 유혹을 분별할 수가 있으며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기도 없이 어떻게 원수의 시험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무장해서 그것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의 시험을 이겨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단히 기도함이 없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시험 앞에 너무나 연약하고 시험하는 자는 강한 놈이기 때문에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을 입지 않고는 결코 사단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시험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아서 결국 시험에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적의 공격의 기미를 제일 먼저 알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는 군인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적의 공격을 예의주시하는 파수꾼이나 경계병처럼 늘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적이 침입할 때 다 맥없이 넘어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깨어있지 못함으로 다 주를 부인하고 주님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를 멀리하면 시험에 들기 마련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적게 기도하면 적게 은혜받고 많이 기도하면 많이 은혜받고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만 닥쳐온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심으로 날마다 주의 은혜로 승리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우리와 관계된 기도가 3가지 있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결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매일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약식을 주옵소서.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공급자이시며, 또한 우리와 매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죄를 용서받은 자들로서, 마땅히 타인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주옵소서. 기도와 시험은 서로 반비례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고,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만 닥쳐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이 기도를 따라서, 날마다 간구하여,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고, 죄 용서의 기쁨을 누리며, 시험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찬송/ 635(주기도문)

 

기도 제목/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기도하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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