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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2 09 - 주님이 비유로 가르쳐주신 교훈 이정현 목사 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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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8:9-14절 개역개정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9, 18:9-14, 주님이 비유로 가르쳐 주신 교훈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겸손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일평생 참으로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시기 전 하늘나라에 선재하셨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겸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본채이신 그분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이 사람이 되신 것은 큰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왕이시면서 베들레헴 말구유에, 비천한 자리에 태어나셨는데 이것 또한 그분의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밝히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겸손한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주님은 친히 무릎을 꿇고 제자들을 발을 닦아주시면서, 종이 주인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 마땅하나, 나는 주와 선생으로서 너희들을 발을 닦아준다고 하시면서 겸손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겸손한 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겸손한 분이십니다. 아무리 모세의 겸손이 사람들 중에 뛰어나다하더라도 예수님의 겸손하고는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오늘 우리에게 비유로, 교만과 겸손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비유라는 말은 곁에 둔다는 원문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과 가장 비슷한 것을 옆에 두고 그것을 설명함으로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는 교육 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A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것과 비슷한 A’를 설명함으로 A를 드러내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는 한 가지 뜻만 찾으면 됩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찾고자하면 잘못된 길과 이단에 빠질 수 있음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신 한 가지 뜻은 천국은 생명이 있음으로 이처럼 크게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설명하면 되는데, 그 가지에 깃든 새들을 마귀라고 설명을 하며, 교회가 성장하면 마귀가 들끓는다고 설명하면(호사다마)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이 확장되면 그 속에서 미물의 짐승들까지도 혜택과 쉼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이 비유로 교훈하신 대상자들이 누구입니까? 9절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했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믿고 타인을 멸시하는 자들을 위하여 이 비유로 말씀하셨으므로, 단적으로 말해서 교만한 자들을 위한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 자기가 맞다, 자기가 잘났다고 하니까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교만한 사람은 남을 멸시하고 업신여기게 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비유로 교훈을 하셨던 것입니다.

 

10절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서 예배의 장소이자 기도의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절기 때마다 이곳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또한 하루 세 번씩은 정해진 기도의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분리된 자들로서, 자기들만 잘 믿고 자기들만 거룩하고 자기들만 깨끗하고 자기들만 율법을 준행하고 있는자들인 척 위선적으로 살았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런 반면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받아서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또한 그 세금을 가로채서 부를 누리는 수전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로, 항상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악한 3대 죄인-세리, 군인, 창기- 취급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이며 일반적인 판단으로서는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욱 악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바리새인들은 의를 대표하는 자처럼 보였고 반면에 세리는 부정과 불의를 대표하는 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어떠했을까요?

 

11-12절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자세와 마음가짐과 그의 기도 내용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이 분리라는 뜻인데, 그 말처럼 그는 한 성전에 들어가서도 세리와 또 다른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서서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드러내기 위하여 잘 보이는 곳에 서서 기도했다는 뜻으로 외식적인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튼 그의 이 행동 자체는 자기는 저들과 같지 않다는 본인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서서 따로 기도했다는 이 행동은, 곧 그의 마음자세가 어떠한지를 밖으로 드러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이같은 행동은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의 내용을 보아도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11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의 탁월함과 우월함에 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토색(탐욕스러운 사기꾼)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불의를 행하지 않았으며, 간음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않다-매국노와 수전노-고 스스로를 분리, 구별시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삶이나 보편적인 생활상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내가 훨씬 더 낫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도덕적인 생활 측면에서 보더라도 나는 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임을 강조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 지위를 악용하여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을 행하였고(20:47), 이혼법을 마음대로 뜯어고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였고(16:17-18), 마땅히 부모를 공경하고 모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핑계로 부모공경을 하지 않은 불의한 자들이고(15:3-6), 또한 돈을 숭배하였고(16:14), 그 마음은 온갖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24:25-28). 그러니 이 바리새인은 지금 거짓으로, 위선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은 종교적 경건행위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에서도 나는 저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였는데, 이는 율법의 요구가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유대의 관습이었습니다. 그 근거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간 요일이 목요일이고 40일 후 내려온 날이 월요일이었다고 해서 그날에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온종일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요구가 아님으로 그들은 그 이상으로 금욕생활을 한 것입니다.

 

또한 소득의 11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소득의 11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 성경에서는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의 11조를 드리나이다’(give a tenth of all 1 get)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 소득의 11조를 말하지만 이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넘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11조를 드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태복음 23(:23)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11조는 드리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행하고, 11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실제로 성경이 요구하는 11조의 품목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요구하지도 않는 11조까지도 정하여 바쳤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밭의 곡식과 과일의 소득과 짐승의 새끼의 11조는 당연히 바쳤고, 또한 요구하지도 않은 이같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11조까지 바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 바리새인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면과 종교적인 탁월한 면을 하나님 앞에 아뢰며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종교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도 참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의 의와 공로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한 것일 뿐이지 진정한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랑거리만 늘어놓으며 하나님께 거만하게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업적을 읊조리는 기도는 종교적인 기만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넋두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화자찬한 독백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정결한 도덕적 삶을 자랑하며 뽐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온전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자랑할 인생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기의 바리새인은 참으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어서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세리가 기도하는 자세와 마음과 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한글성경에는 없지만 원문 성경에는 13절 앞부분에 그러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이 말은 앞에 나온(11-12) 바리새인의 기도와 본 절의 기도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대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말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와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다고 했지만, 세리는 멀리 서서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멀리는 일반 사람들이 기도하던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 즉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처럼 그는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다른 유대인 사이에 끼어서 함께 기도할 수 없었던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 기도한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데, 원문 성경에서는 약간 다른 면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경우는 수동형으로 되어 있고 세리의 경우에는 능동형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일어섰다는 이야기이고 세리는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 일어섰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 바리새인은 사람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를 하였는데, 세리는 자신의 비천함과 더러움 때문에 감히 그런 일반적인 자세를 취하지도 못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기를(애통한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기도는 단순하며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밝히며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며 떳떳하게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기도하고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말했던 기도하고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세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하였으며,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인정했고, 자비의 대상이 될 자격이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한 기도였습니다.

두 사람의 기도의 모습을 비유로 가르치신 주님이, 이제 직접 이 두 사람에 대한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누가 의롭다함을 얻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사람은 결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였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던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은혜를 바란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죄를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롭다함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의로움인 것입니다. 세리는 오로지 자기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비유의 교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교만과 겸손으로 결론을 내리신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 바리새인은 낮아지게 되고, 자기를 낮추는 자, 세리는 의롭다함을 받아 의인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한 사람은 불의한 자로 취급하시고, 죄인이라고 한 자를 의롭다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경멸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하셨습니다. 교만과 겸손의 결말을 대조하여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이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한 가지 교훈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교만한 사람은, 결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결국 낮아지고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지난번 시간에 바로의 교만과 모세의 겸손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들었습니다. 바로는 교만했다가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자기 국토가 초토화 되어 버렸습니다. 곡식을 제대로 수확할 수 없게 되었고, 가축이 번성하지를 못하고, 대를 이어갈 장자가 죽고 말았고, 애굽의 정예부대 마병과 특별병거가 물속에 쳐 박혀 죽고 말았고, 물질적이며 부동산적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는, 교만하면 즉, 자기를 옳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그런 사람의 결말은 영적으로 결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본 비유의 세리처럼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사람(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 높임을 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고, 뿐만 아니라 의롭다함을 받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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