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사도행전3:1-10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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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70423, 사도행전 3:1-10, 예수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정해진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오전9시, 정오, 오후 3시였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제 9시는 오늘날로 말하면 오후 3시가 됩니다. 하루의 기도 시간 중 마지막 시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시간은 유대인들의 전통인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그 전통을 그대로 지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그 기도 시간을 준수함으로 경건한 습관을 유지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날도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고, 성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회당에 가서 기도를 했고, 회당도 없는 곳에서는 적당한 장소에서 그 시간에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 간 것입니다.
여기의 ‘올라갔다’는 말은 단회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습관이 될 정도로 반복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도는 기도하기 위하여 이 길을 한두 번 올라간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수십 번 이 길을 따라 성전에 올라갔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성전 외곽에는 8개의 문이 있었습니다(동-스데반문, 황금문(미문), 남-시온문, 분문(오물문), 서문-욥바문, 새문, 북-다메섹문, 헤롯문). 그 가운데 성전 동쪽에 위치한 미문은 말 그대로 굉장히 아름다운 문이었다고 합니다. 금으로 입혀진 문이고, 높이가 무려 23m나 되고 폭이 16m 정도 되는 웅장하고 거대한 문이었다고 합니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이 황금문에 비취어서 번쩍번쩍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던 것입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있었던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이 거지에 대해 성경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고 했습니다. 40년 동안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던 사람입니다. 직업적인 거지였다는 말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이니까 자기 혼자의 힘으로 기거동작하기 힘드니까 구걸하는 신세가 된 것 같습니다. 날마다 한 장소에 나왔다는 것은, 매일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이야말로 동냥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을 통해 성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구걸하는 것입니다. 어느 걸인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기도하는 시간만 되면 이들에게는 무엇인가 많이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적으로 도와 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습은 오늘날 물질에 치우친 인간들이, 계속하여 돈만을 요구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던 그를 주목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 없이 지나쳤을 것입니다. 혹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저 동전 한 닢 던져주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그를 주목하였는데, 이는 이 사람도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한 사람, 한 인격, 한 영혼으로 여기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이 앉은뱅이 거지는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저 절망 중에 땅만 보고, 사람들에게 소리로만 구걸하는 것이지요. ‘도와 주세요, 한 푼 주세요.’-그랬을 때 사도들은 땅만 바라보고 인생을 절망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하니까 거지도 놀라면서 무엇인가 얻을까하여 사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도들이 이 거지를 주목하여 보았던 것과, 거지가 이 사도들을 바라보는 것에는 기대하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거지는 사도들을 오로지 무엇인가 적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쳐다 본 것입니다. 사도들은 영적인 무엇인가 주기를 바랐지만 거지는 육적인 무엇인가 얻을까 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는 무엇인가 얻기를 바랬던 이 거지의 마음을 일언지하에 포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은과 금은 없다.’고 했습니다. 네가 바라는 금은이 없다는 선포입니다.
대신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앉은뱅이에게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돈 일수 있습니다. 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주지를 못했지만, 그러나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었습니다. 돈 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단순히 일어나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서 걸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나 걸으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너는 일어나고 지금부터 계속하여 걸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1회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은 적이 없는 사람을, 이제부터는 계속해서 걸어 다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40년 동안이나 말라붙어 있었던, 앉은뱅이의 한스럽고 초라한 다리의 근육이 단번에 새로운 힘을 얻은 것입니다. 아무런 의학적인 치료를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다시는 성전 문에 앉아서 비참하게 구걸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을 얻은 그 사람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합니까?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는 베드로의 손을 잡고 뛰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걸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웠으면 이렇게 했겠어요. 40년 만에 발로 땅을 밟아보는 것입니다. 40년 만에 걸어보는 것이고 뛰어보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성전 문에 앉아서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들의 경멸과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비참하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성전 바깥에만 있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자기 발로 걸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당당히 성전 안에 들어가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학적 치유에서 이제 종교적 치유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종교적 치유에서 영적인 치유까지 이루어 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앉은뱅이가 치료되어 육체적 치유를 받았고, 성전 안으로 들어감으로 종교적 치유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영적인 치유까지 일어 난 것입니다. 자기 안에 온전한 치유가 일어남으로, 기쁨이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름발이를 사슴같이 기뻐 뛰게 하시겠다.’(사35:6)는 예언이,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가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송 하는 것을 보고,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심히 놀랐다고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놀란 것입니다. 이들이 무엇에 놀랐습니까? 복음의 능력, 예수의 능력이 주는 엄청난 사건을 보면서, 저들은 어리둥절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표현된 성전과 아름다운 황금문(미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외형적인 모습은 비까번쩍합니다. 황금으로 장식해 놓았습니다. 위엄이 있어 보입니다. 휘황찬란합니다. 웅장합니다. 많이 사람들이 즐겨 찾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말씀의 다스림을 받지도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이미 멀어졌습니다. 속이 텅텅 비어있는 이런 외식적인 모습으로는, 미문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돈 몇 푼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이 사람에게 참 기쁨과 만족은 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40년 동안의 앉은뱅이 신세는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능력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해냈습니다.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40년 동안의 비참하고 처량한 앉은뱅이 신세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나의 신체적 장애를 치료해 주셔서, 일어나 걷게 해 주셨습니다. 펄쩍펄쩍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나의 능력과 힘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나의 참 만족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인격, 사역, 평판 그리고 존재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평판과 존재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예수의 이름은, 예수님 자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지금까지 천대와 멸시를 받던 이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활승천하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 이름으로 하나님이 높여 주셨습니다. 지극히 높아지신 그 이름,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을 수밖에 없는 그 이름이 본문의 앉은뱅이를 낫게 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가치와 능력을 잘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조금 뒷편에서, ‘이 역사는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다.’고 하였고,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분이, 바로 이 사람을 성하게 하신 것입니다.
13세기 중세 로마 가톨릭의 전성시대에 필립스 교황이라는 사람이 교황궁에 재물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어느 추기경에게, 금은 보화를 가리키며, ‘이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며’라고 말하던 시대는 벌써 지났다고 말했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대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이, ‘교황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재물의 부함을 자랑하는 필립스 교황의 말은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고, 예수 이름을 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아퀴나스의 말은 가슴 아픈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 예수를 통하여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고, 예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교회 시대에 신천에 김익두라는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거리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처럼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가 김익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일어나라니 내가 어떻게 일어납니까?’라고 하더랍니다. 몹시 당황한 김전도사가 돈 몇 푼을 주고 얼굴을 붉히며 그곳을 떠나갔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마가복음에서,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16:17-18)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김익두가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간구하여 마침내 그 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1919년 12월 경북 달성군 현풍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하다가, 턱이 빠진 걸인이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김익두가 예수 이름으로 안수기도를 했더니, 그 사람의 턱이 재 자리를 찾아서 건강해 졌답니다. 정상이 된 거지가 예배 시간에 일어나서, 너무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춧다고 합니다. 역시 예수 그 이름이 그 사람을 낫게 한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이름으로 예배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했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원수를 짓밟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세상에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은금이 큽니까? 예수의 이름이 큽니까? 무엇이 더 소중하니까?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이 돈입니까? 예수의 이름입니까?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예수 그 이름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돈이 저들을 정하게 못하고 저들을 의롭게 못하고 저들을 찬송하게 못하고, 저들을 예배하게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정말로 세상에 주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높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자랑하며,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송/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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