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0:1-11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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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여러분은 하루에 거울을 몇 번이나 봅니까? 화장실에서도 보고, 여자분들은 화장하면서도 보고, 밥 먹고 나서도 화장 고친다고 보고, 여학생들은 머리 만지고 입술 바른다고 수시로 거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요새는 핸드폰에도 거울이 있는지, 수시로 핸드폰의 거울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거울을 보고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도 거울을 많이 봅니다. 아무튼 어른 아이, 남녀를 불문하고, 여러 장소에서 거울을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울을 왜 보는 거지요? 거울을 보는 목적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잘 못된 부분이 있으면 고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고급 거울을 장식용으로 걸어두기도 하지만, 그러나 일차적인 목적은 보고 고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울을 통하여 똑바로 자기 자신을 보아야, 잘못된 옷맵시와 잘못된 화장, 이물질이 얼굴에 묻은 것, 고춧가루가 이 사이에 낀 것을 닦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반드시, 잘 못된 부분을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고치는 대까지 나아가야 거울을 보는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잘못 된 것을 보고도, 고치지 못하면 거울을 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잘 못된 모습으로 그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광야 생활은 우리의 본보기이다.’인데, 여기서의 본보기라는 말이, 본문에 두 번 나옵니다. 6절에,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그랬고, 11절에도,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보기가 무슨 뜻입니까? 국어 사전에 보니까, ‘어떤 사실이나 현상을 설명해 주거나, 증명해 주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보기라는 말이, 바로 거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곧 오늘날 성도들의 교회 생활에, 본보기,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령한 은혜를 많이 체험하였습니다(1-4절). 우리 조상들이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은혜 중에 홍해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1-2).
-‘그들이 구름 아래 있다.’는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 인도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광야는 낮에는 너무 뜨겁고, 밤에는 너무 춥기 때문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를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길을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침판의 역할을 하는 이런 것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 생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너가게 되었는데, 이것을 본문에서는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은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모세에게 속하다.’라는 말은 모세와 연합하다는 뜻으로 본다면, 이때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를 건너가게 된 것은, 곧 구원 받은 백성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아 그와 연합된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 되었고,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 신령한 식물인 만나를 먹었고, 또한 신령한 음료인 물을 마셨다고 했습니다(3-4a).
-이스라엘 회중이 출애굽한 지 2개월 15일 만에, 먹을 음식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출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실제로 그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면서, 고기를 먹었고 떡을 배불리 먹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굽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며,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게 생겼다고 불평,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양식을 하늘의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매일매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정말로 하늘에서 매일 아침마다 이슬처럼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나입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작고 둥글고 서리 같은 이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만후’입니다. 그래서 원래 만나의 정확한 표기와 발음은 만후인데,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만나’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출16:15)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만후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하늘의 양식을 주시면서, 단순히 일용할 양식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이스라엘을 연단하고 훈련하기 위해서 주시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보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평소 때는 적당히 주시다가,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로 주시면서, 안식일에는 양식을 거두러나가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안식일에는 양식을 거두러나가야 결코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후를 주시면서, 내가 이른 말을 잘 지키는지 아니지키는지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하늘의 양식이요, 농사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시험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생활하면서, 자기들이 농사를 하거나 목축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양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이적적인 방법으로 물을 공급 받았습니다. 다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었을 뿐만아니라,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는데,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르비딤에서도(민17:6), 가데스에서도(민20:11), 브올에서도(민21:16) 반석에서 나는 물을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물을 마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미완료형으로, 그 반석이 이스라엘 회중을 계속하여 따라 다니며 물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 당시 유대 랍비들은, 높이가 4m 30cm 정도 되는 반석이,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다니며 물을 뿜어냈다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유대 랍비들처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의 갈증을 해소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그들과 동행하셨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의미로 다 해석을 해도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는 어느 시대이든지간에 변치 않는 인류의 생수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4절 마지막 부분에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을 따라 다니며 물을 준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4b). 그들을 따라 다니며 물을 준 반석은, 곧 구약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이렇게 나타나셔서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생활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똑 같이 출애굽을 하여 종 된 생활을 청산 했고, 똑같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고, 똑같이 하늘의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마셨고, 똑같이 구름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와 인도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중에,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5절) 출애굽 1세대 장정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가 광야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도,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이처럼 다수가 멸망을 당한 것입니까? 왜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본이 되지 않는 남의 말이나 행동이 도리어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를 이르는 말)가 될 만한 것들이 무엇인가요? 신약교회에 교훈이 될 만한 네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7-10절까지의 표현 방식이,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를 하다가 ...게 되었으니...우리는 그들과 같이 ..하지 말자.’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중, 무엇 무엇을 하다가(죄, 악), 어떻게 되었으니(죽었다, 멸망했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광야생활 중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출32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오랫동안 그 산에 머무니까,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지도자가 산위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을 우리가 만들어 거기에 절을 하자.’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자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금은 보화를 바치고 그것을 녹여서 금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주로 섬기던 아피스 신입니다. 그 앞에서 절을 하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을 경배하며 불경스러운 향연을 버린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내며 금송아지를 녹여서 주동자들에게 먹여서 죽이고, 그 외의 많은 사람을 칼로 죽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들과 같이 우상숭배하지 말라.’ 너희는 우상숭배자가 되기를 멈추라. 지금 고린도 안에는 잡다한 우상들이 수두룩 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여기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우상숭배 사건을 말하면서, 너희는 이제 우상숭배를 그만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음행한 사실을 지적합니다(민25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해 동쪽 지방인 모압을 지날 때, 그곳에 살던 모압 여인을 취하여 음행을 하고, 이방 신을 숭배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압 여인을 취한 것이나 이방 신인 바알브올을 경배한 것은 서로 연관된 일입니다. 그들은 신전에 들어가 이방 신을 섬기면서, 그곳에 있는 신전 창녀들과 종교적 매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에게 염병을 내림으로, 23000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근거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주위에도 이와 유사하게 종교적 매춘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의 여신으로 여겼던 아프로디테를 숭배했는데, 그 의식 가운데 똑같은 종교적 매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뿐만아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서 일반 사회에서도 있을 수 없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아들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아버지의 아내이면 자기 어머니이지 않습니까? 어머니와 음행을 한 불륜의 자식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아버지의 아내는 계모를 말한다고 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도덕 윤리상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장소에서 누구하고의 간음이든,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세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을 제시합니다(민21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에돔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들과 부딪히거나 전쟁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우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같은 동족과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하여 우회하라고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치고 곧장 올라가기를 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에 대하여 원망한 것입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먹는 것도 시원찮고 마시는 물조차 별로 없다. 도저히 더 이상 험난하고 먼 길을 우회하여 갈 수 없다.’ 사실 이 사람들이 이런 것으로 원망 불평했던 것은, 이 번 만이 아닙니다. 지난날 여러 번 여러 사람이, 동일한 이유로 불평불만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원망’을, 오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둘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원망하는 것이, 곧 주를 시험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높은 곳에 세워놓고 시험을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천사가 와서 붙들어 주리라.” 그러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드러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우리의 욕망을 이루고, 나를 드러내기 위하여, 원망 불평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 뱀을 백성 중에 보내사 원망하는 사람들을 물어, 독이 퍼져서 죽게 하였습니다. 자기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이 뱀에게 물려 쓰러져 죽어가니까, 그들이 우리가 잘 못했다고 하면서, 이 불뱀을 떠나가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한 것이,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누구든지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산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해독이 되고 살아 난 것입니다.
이 사건을 들어 바울은, 또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마지막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원망 불평한 일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 말하는 원망과 불평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것으로, 아주 지독한 원망 사건입니다. 호르마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당을 지어서,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이름 있는 지휘관 250명을 꼬셔서,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너희들만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 우리도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너의 지도를 받지 않을 것이고, 우리 중 한 지도자를 세워서 우리는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세의 지도력에 대하여 강하게 부정하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나왔던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습니다. 모세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가나안을 이 백성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적인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망 불평하는 이 사람들에게 무서운 진노를 하셨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장막 앞에 서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이 서 있는 땅 밑을 갈라서 그들을 산 채로 스올에 빠뜨렸고, 하나님이 그 땅을 다시 덮어 버렸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산 채로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망 불평하는 그들의 흔적도 없이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예로 말하면서, 너희는 저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원망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망 불평할 거리가 여러분들 앞에 널부러져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거리가 많다하여 원망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감사거리를 찾아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비록 어렵고 힘든 상황 중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바울은 앞부분에서 자기 조상들의 심각한 죄악을 4중적으로 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였다. 그들은 간음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광야에서 죽었고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저들을 거울로 삼아(본보기)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경고로 주신 말씀입니다. 거울로 삼아야 하고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저들은 우상 숭배하다가, 간음하다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원망 불평하다가 망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현대의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의 간음은 육체적 간음뿐만아니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현대의 시험은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이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과 교회를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판 원망 불편은, 없어서가 아니라, 있으면서도 더 없다고 원망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보고 바울은, 너희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울로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보았으면(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으면), 빨리 고치고 닦아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저 앞에서 우회전을 하려면, 먼저 사이더 미러나 백 미러를 통하여 우측 차선에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를 확인합니다. 안 오거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 오른쪽 깜빡이를 켭니다. 그리고 제일 오른쪽 차선으로 진입했다가, 서서히 가다가 우회전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거울도 안보고, 우측차선으로 진입하는 사람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니까 바로 옆 차선에, 내 차와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깜빡이를 켜고 우측 차선으로 진입하는, 골빈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정신나간도 없을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거울을 똑바로 보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거울을 보고, 그 본보기를 보고, 신호등을 보고,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고 주의하라면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성경이 원하는 아름다운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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