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시편103:12-19 개역한글
-
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18.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은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1.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시 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는 말은, 인생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인생은 안개와 같다./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을 안개에 비유한 것은, 짧은 인생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인생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눈 깜짝 할 사이에 다 지나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깐 피었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3. 인생은 죽은 개와 같고, 땅속의 지렁이와 같다./ 다윗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인생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인생이 참으로 무가치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4. 인생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인생은 덧없고 연약한 존재이며, 아울러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들, 꽃과 같아서, 그것도 잠시 뿐이라는 것입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습니다. //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인생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순식간에 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인생의 덧없음을 말합니다.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런 인생인데, 이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어느 시인도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금화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것을 잃을까봐 잉크병 속에 감추어 두는가 하면, 지폐는 침대 밑에다 두었습니다. 편지를 받았을 때는, 행여 무슨 불행을 알리는 사연이 있지나 않나 해서, 뜯기를 주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밤에는 실탄을 장전한 권총과 단도를 가까이 두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60년에 사망한 그는, 가사 상태로 매장될까봐 두려워하여, 소정의 시간 이상으로, 오랫동안 관을 열어 두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하루는 어느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노 철학자는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는 채, 한없이 깊은 사색에 빠져 있었습니다. 공원지기가 문을 닫기 위해 들어와서 경내를 둘러보았습니다. 웬 노인이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석상처럼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해가 저물었습니다.” ... “아, 할아버지 가셔야 할 시간이 되었어요. 일어나십시오.” ... “아니, 이 영감님이 귀를 잡수셨나? 영감님, 어디서 오셨어요?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공원지기는 쇼펜하우어의 귓가에다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제서야 쇼펜하우어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고개를 들고 멀거니 눈을 떴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소?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요. 돌아가야 한다고 했소? 인생은 저물고 있는데,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구려. 내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만 있다면…!” 쇼펜하우어는 깊이 탄식하며 공원을 나섰답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는,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성인 싸르뜨르가, 폐수종 때문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는 임종 한 달 전부터 소리를 지르고, 문병 온 사람들을 향해 고통스런 절규를 토했습니다. 그는 ‘자유’라는 주제 하에 수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처럼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순간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불안감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울부짖었습니다. 그의 아내를 비롯하여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어떤 사람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그를 위로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자 프랑스의 신문들은 “싸르뜨르는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그렇게도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던 그가, 왜 그렇게 불안해하며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해야 했던가?”하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신문에 투고를 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싸르뜨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싸르뜨르에겐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쇼펜하우어도 싸르뜨르도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아무리 유명한 철학자들이라 해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영원한 실향민들에 불과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다가, 하나님께로 간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출발도 하나님이요, 과정도 하나님이요, 마지막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의 출발점이 되시고, 만물의 제1원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기자는 그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죄를 사하여 주시고 병을 고쳐주시고, 긍휼로 관을 씌어 주시고,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해 주시고,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구절구절 아멘 할 수 있는 너무 좋은 말씀들입니다.
또 8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이런 신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이런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12절과 13절에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동과 서의 끝이 서로 만날 수 없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 놓으셔서, 가까이 다가올 수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여호와의 사랑을 피부로 잘 느끼지 못하니까,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통해, 그 사랑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아비는 자녀를 사랑하고 귀여워하고 측은히 여깁니다. 자녀가 아프면 마치 자신이 아픈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자녀가 기뻐하면 자기가 더 좋아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이것처럼 여호와의 마음 역시,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긍휼과 자비는 한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서, 부모의 사랑에 견주었지, 실제로는 하나님의 긍휼은, 자녀에 대한 아비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지고지순의 긍휼과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지요? 왜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셨으며, 왜 우리에게 이렇게 애틋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나요? 의외의 대답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이유, 다함이 없는 긍휼을 쏟아 부어 주시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우리의 채질을 아시고, 우리가 단지 한줌 티끌과 같은 존재인지를 아시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시는데,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쉽게 부서져 버리는, 흙과 같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시고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에,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너희를 측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또 인생이 풀과 같고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은데, 뜨거운 아라비아 광야 바람이 불어오면, 그 아름다운 꽃도 없어지고, 나중에는 그 있던 자리도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덧없는 인생, 한 점 호흡과 같은 연약한 존재들, 유한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측은히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의 인생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와 같다고 하셨고, 잠깐 피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으며, 지렁이 같은 하찮은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유한한 존재, 유약한 존재, 죄악 된 존재, 비천한 존재, 한 줌 흙과 같은 존재,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존재, 덧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측은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심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감사한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이르게 하시겠다고 하셨고, 또한 우리의 자손의 자손에게까지 이르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분의 긍휼과 인자와 사랑하심이, 우리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손 대대로 이어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보좌를 펼치시고, 왕권을 가지고, 영원히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분이시기 때문에, 능히 우리의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그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실 분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결국 연약하고 유한하고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 가치 있고 보람되고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연약함 중에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할 수 있고, 유한하지만 영원한 세계를 꿈꿀 수 있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다가 결국 하나님 앞에 갈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생을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우리가, 여호와의 성호를 찬양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과 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맛보아 아시고,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시되, 가치 있고 보람되고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