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육이라는 말은, 기독교라는 단어와 교육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하려면, 기독교라는 말을 알아야 하고, 다음에 교육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독교 교육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구교인 가톨릭과 구분하여 개신교라는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개신교를 일컬어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육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라틴어로 ‘에두카레’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이끌어내는 활동’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능력과 지혜를 이끌어 내는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틴어에서도 교육에 대한 용어상의 상당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만, 한문에서는 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교(敎)자는 ‘가르칠 교’를 쓰고요, 육(育)자는 ‘기를 육’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것은, ‘가르쳐 기른다.’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좋은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의 현장에서 보면, 지식이나 정보를 가르쳐 주기는 하는데, 기르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전인적인 인성을 가진 아이들로 성장하도록 양육해야 하는데,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더구나 학교교육은 ‘교’는 있지만, ‘육’은 없는 시대라고 봐도 틀림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기독교교육이라고 할 때 이 두 단어, 즉 기독교와 교육을 합한 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잘 믿고 닮아가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행위’를 기독교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갑자기 만들어 본 것이라 조금 미비하고 어설 퍼지만, 기독교교육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누가 교육을 해야 하는가? 교육의 주체는 누구인가의 문제입니다. 본문에서는 가정의 부모가 교육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절에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분명히 ‘너’에게, 즉 부모에게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7절의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라는 말씀에서는, 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말씀을 근거하여 볼 때, 교육은 부모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교사는 부모여야 합니다. 부모만이 진짜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부모는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기르는 일까지 다 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학교 교사에게 약한 ‘육’(기르는 것, 양육하는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온 부모들은, 지금 이 말씀이 주어진 시기가, 가나안 밑인 모압 평지이기 때문에, 출애굽 1세대는 거의 다 죽었을 것이고, 이제 출애굽 2세대들이 부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부모는 출애굽 2세대들이라고 볼 수 있고, 이들에게 주어진 교육 명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기독교학교에서는 기독교사가 가르치는 자입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의 문제는, 정부의 교과과정 때문에 성경이나 신앙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성경 교육을 의무적으로 교육을 했었는데, 요사이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미션스쿨이나 기독교학교에서 자유롭게 성경을 가르칠 수 없는 입장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 학교에서의 성경교육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학교 선생이 교육의 주체이기 때문에,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부모 다음으로 아이들과 학생들의 신앙교육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 부모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아이에 대한 신앙교육의 전적인 책임이, 교회학교 선생님에게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각 반의 선생님들은 매우 소중한 분들이며, 막중한 책임을 가진 분들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비록 아이들의 부모는 아니라하더라도, 부모의 심정으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육의 승패는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그 교육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훌륭한 교육가였는데, 그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훈련을 시킬 때, 비록 선생이기는 하였지만 아비의 심정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절에 보면,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고 했습니다. 선생으로써 가르치고 권면한 것이 아니라, 아비로써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갈4:19)고 한 것을 보면, 이제는 어미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양육했음을 알게 됩니다. 너희들을 다시 말씀을 가르쳐서, 참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미가 해산하는 수고를 하듯이, 나도 그런 수고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서 아이들을 교육해야, 저희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면, 아이가 한 두주 주일을 빠져도 무덤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와 어미의 심정으로 가르친다면, 주일을 빠진 아이들을 결코 그냥 넘길 수 없지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전화하고 심방하고, 자기의 친 자식에게 권면하는 것처럼 권면, 격려해서 분명히 더 이상 빠지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자가, 부모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 교육해야 할 부모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모의 마음에 새기는 일이며, 또한 말씀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 바깥문에도 붙여서(8-9),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잘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율법으로 살고, 율법으로 신분을 삼으라(너라는 정체성을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할 부모는, 먼저 내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 교육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장 좋은 교수 방법은 모범보이기(roll model)인데, 이것은 기독교교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동일한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늘 읽고 묵상하며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고, 모든 일을 말씀에 비추어 생활하고자 하는, 신앙생활의 본을 보이는 것을, 자식들이 볼 수 있어야, 자식들도 그 길을 가지 않겠습니까? 훌륭한 영적 부모 밑에서 훌륭한 신앙을 가진 자식이 나오고, 이것이 대를 이어가야 그 가문이 신앙의 명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식들에게, 교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가르쳐야 할 내용까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고 했는데, 이는 곧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인데, 이것을 4-5절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4-5). 이 말씀은 유대교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으로서, 지금도 하루에 두 번씩 암송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전심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고, 부모가 모범을 보여주어야 내용입니다.
믿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사회적인 공부도 시켜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어야 할 내용이, 하나님 경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부를 잘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고, 보람된 일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데 취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자식들이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 장가가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와 중요성이 있습니다. 수억 원의 돈보다 성경의 가치가 훨씬 더 높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런 것을 다 얻어도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 않고 경외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이며 우선적으로 우리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도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흐지부지, 까지껏 대충, 적당히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고 다하여 사랑하라고 교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사랑할 수 있는 최대치를 쏟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것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만 잘되면, 인성교육과 지식교육도 자연히 잘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 잘 믿으면 인간 됨됨이도 좋고, 지식도 뛰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 없이 돈 많이 벌고, 여호와를 사랑함이 없이 지식이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잠시 잠깐 부귀영화를 누릴는지 모르겠으나, 영원한 가치와 참된 행복은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들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충실히 더 깊이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누구도 쫓아갈 수 없는 사랑으로 아이를 가르칠 수 있고, 눈물과 땀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어떻게 가르치라고 하셨습니까?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7).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말은, 교육에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는 ‘철저하게’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타협하여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교육하라는 말입니다.
나중에 하면 안 됩니다. 열심히 지금 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철저히 해야지, 나중에 하면 늦습니다. 자기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선택할 나이가 되면 이미 늦습니다.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세상적 가치와 세속에 물들어 버려서, 하나님 신앙을 가르치기가 늦었고, 힘들어집니다.
자녀들이 고등학생 대학생 되면 부모들 말을 잘 듣나요? 부모의 말에 권위가 떨어져서 귀담아 듣지도 않을뿐더러, 청소년들이 이런 저런 논리로 부모에게 대 들면, 부모들이 논리적인 말로 잘 설득할 수 있습니까? 특히 공부해야 된다고 하면, 주일이든 수련회든 신앙이든 상관이 없이, 공부하는 쪽으로 결정을 하고 밀어 붙이니까, 점점 자녀들 당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가르쳐 놓으면, 장성해서도 그들이 신앙을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시적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교육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도 밖에 나가서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놀 때에도 공부할 때도, 기독교인으로서 이럴 때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쉬지 말고 부단히 어떤 상황에서도 율법을 강론하라는 것입니다. 아이의 책상 위에도 항상 성경을 올려놓고, 말씀카드를 항상 챙겨주고, 핸드폰에도 성경말씀을 깔아서 볼 수 있게 해 주고,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지를 체크 해 주는 부모처럼,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가르치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또 가르쳐 놓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3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여호와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또한 가르침을 받아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가나안 땅에서 크게 번성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 마지막 두 구절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쉐마 교육을 철저히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세계 민족 가운데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얼마 전의 통계를 보니까, 세계에서 이혼율이 제일 낮은 국가가 이스라엘이라고 하고요, 세계에서 도덕적인 기초가 가장 잘 세워진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그들은 이 말씀을 하루에 두 번씩 외우면서 이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같이 큰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인 강철 왕 록펠러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겨우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왔지만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가장 선한 일을 많이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생활이 일치가 되는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부자 가운데서도 98세까지 살며 장수의 삶을 누렸습니다. 그는 평생 미국 전역에 24개의 대학교를 세웠고 4,9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수많은 복지 센터, 양로원과 고아원을 세우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으며, 그의 재산을 자선사업에 거의 다 헌납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엄청난 부요를 누린 까닭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던 시절 전깃불도 없이 촛불 밑에서, 그의 어머니는 다 떨어진 성경을 펴서, 어릴 때부터 성경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옥수수 두 개를 놓고도,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했던 그 어머니의 믿음은 참으로 위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성경말씀대로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날 인터뷰에서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큰 축복을 받았습니까?” 그 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산 때문입니다.” 기자는 의아해 하며 물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가난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유산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그는 답했습니다. “믿음의 유산입니다. 어머니가 쓰던 다 떨어진 성경, 이것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세 가지 유언을 하셨습니다. 첫째, 언제나 교회에 가면 꼭 앞자리에 앉아라. 둘째,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을 꼭 지키고, 늦지 않도록 달려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받아라. 그리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여 네 인격을 성숙시켜라. 셋째,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11조를 때 먹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이 세 가지가 록펠러 어머니의 평생에 소원이었는데, 그는 이 말씀을 잘 지켰다고 합니다.
건강한 교회 행복한 성도가 되려면, 가정과 교회에서 기독교교육을 잘해야 합니다. 특히 다음 세대에 복음을 잇기 위해서는 교육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가정에서는 부모가, 교회에서는 목사와 교사가 이 일에 매진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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