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출애굽 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했으나,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출애굽 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이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지만, 하나님은 이 일에 인간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역자를 세워서 역사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그 시대마다 필요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훈련시켜서 가장 적당하게 일꾼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광야 40년 동안의 생활 지도자로는, 모세를 세워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 왕궁에서 40년 동안 지냈고, 그 이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 받은 기간이 40년이고, 그 다음 마지막 40년 동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인도한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접어들어서 시내산에 도착을 합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다시 출발하여,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마까지 갑니다. 다시 돌아 나와서, 암몬과 모압 지역으로 가서, 마침내 요단강 근처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그 이름대로, 물에서 건짐을 받은자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물에서 건지고, 이곳까지 인도해 온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과 시련도 많았지만, 그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도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땅이 내려다보이는 이 느보산에서 죽고 맙니다.
이제 모세 대신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이 큰 민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마음에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라,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도 함께 있을 것이다. 너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걱정과 염려 중에 있었던 여호수아에게, 이 말씀은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큰 힘과 용기를 얻은 여호수아는, 이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진군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진군 앞에,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진입을 하려면, 반드시 이 요단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이 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이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로부터 물이 흘러내려서, 사해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쭉 뻗어있는, 320km 되는 긴 강입니다. 강폭은 20-30m, 수심3-4m, 우기가 아닐 때, 이 강을 건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기가 되면 강물이 넘쳐서, 강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도 깊어지고, 물살도 쎄지기 때문에,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건너가고자 했던 이 시기가, 바로 우기였습니다. 여호수아 3:15절에 보면,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가 태양력으로 3-4월 정도이고, 이른비가 오는 우기에 해당됩니다. 밀과 보리를 거두기 이전에 내리는 비로, 곡식에게 막바지 영양분을 공급하는 비이기도 합니다.
요단강이 곡식 거두는 이 시기에 범람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시기에 비가 많이 온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저 갈릴리 위쪽에 있는, 레바논 산과 헐몬 산의 눈이 녹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 물이 갈릴리를 거쳐, 요단강으로 흘러와서 사해로 들어가기 때문에, 요단강의 물이 범람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가 곡식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는, 유익할지 몰라도, 이 강을 건너가야 하는 그 당시 이들에게는, 결코 유익한 강이 아니었습니다. 이 강은 정복해야할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하나의 장벽이자 방해물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는, 가나안 땅으로 진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요단강의 장벽을 어떻게 넘어갑니까. 이 방법은 여호수아 스스로가 발견한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지략가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단지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그대로 행할 뿐입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앞에 세웁니다. 법궤라고도 불리는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임으로, 매우 중요한 기구입니다. 임마누엘의 가시적인 표현이 언약궤이며, 이는 적어도 81kg 정도라고 하니까, 무거워서 운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과 힘을 합해야 합니다. 네 명의 제사장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책임을 지고 울러 메고, 지탱해 나가야 합니다. 다른 어떤 기구를 통하여 운반할 수가 없고, 오로지 제사장이 어깨에 울러 메고 이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울러 메고, 범람한 요단강 물을 건넌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위험하기도 합니다. 모험입니다. 무게도 상당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시대로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 물을 밟았을 때, 오른 쪽 편의 물이 멈추어 섰습니다. 오른 쪽은 물 벽을 이루고, 왼쪽의 물은 사해로 흘러간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갈릴리에서 흘러내려오던 물이 끊어져서 벽이 되었는데, 그 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3:1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였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지도를 살펴보면, 지금 여호수아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지점이, 사해 바다와 인접해 있는 어느 지점, 곧 여리고 성 앞부분이라고 보는데, 거기서부터 북쪽으로 물이 역류해서, 사르단 지역과 아담 성읍까지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지점에서, 물이 역류해서 올라간 지점까지는, 무려 25km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그 무거운 법궤를 한마음으로 메고, 백성들 앞서 물속으로 들어갔더니, 여리고 맞은편 지역에서 저 북쪽 아담 성읍에까지, 요단강 물로 가득차서 하나의 큰 호수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호수라면 사방이 다 꽁꽁 막혀있어야 되는데, 여기의 호수는 한 면이 전혀 막히지 않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물 벽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왼쪽의 물은, 아라바의 바다 염해 곧 사해로 흘러갔습니다. 자동적으로 강에 길이 생긴 것입니다. 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17절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널 때처럼, 하나님의 이적적인 방법으로, 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널 때하고, 약간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홍해는,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 밀었을 때, 하나님이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하심으로,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양쪽의 물 벽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다에 길을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갈라놓고 건너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끊어질 줄 믿고, 발로 밟았을 때, 길이 난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길이 날 줄 믿고, 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홍해는 바닷길을 만들어 놓고, 그 길을 육지같이 건넜지만, 요단강은 믿음으로 물을 밝고 들어갔을 때,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홍해와 비교해 볼 때, 더 큰 믿음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
제사장들의 믿음이 좋았다고 봅니다. 뿐만아니라 제사장들은, 힘들어도 오래오래 인내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몇 명입니까? 20세 이상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었다고 했으니,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합하면 적어도, 200만 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 강을 건너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요?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이들이 1.6km 폭으로 이 강을 건너간다 할지라도, 적어도 4시간은 걸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제사장들은 그 언약궤를 메고, 그 요단강 중앙에 서 있는 것입니다.
힘들고 괴로워도, 서로를 격려하며 인내하며 서 있는 것입니다. 버티고 견디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다 지나갈 때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힘들다고 법궤를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무섭다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의 뒤를 따라서, 2천 규빗 쯤 떨어져서 걸어갑니다. 2천 규빗은 약 912m 정도입니다.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오라고 한 것은, 일반인들이 언약궤를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언약궤의 신성함 때문에, 아무나 가볍게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따라가는 백성들에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전진하는 백성으로서,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사 어떤 이적을 베푸실지 모르니,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자들은, 겉과 속이 깨끗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실 때에는, ‘자기의 의복을 빨 거나’,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거나’ ‘지난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이 세 가지를 다 시행함으로, 자신들을 정결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이렇게 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앞장서서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요단강 물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적을 눈으로 목도하고, 발로 밟고, 오감으로 경험하면서, 범람한 강을 마른 땅같이 건너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건너가야만 했던, 이 강을 자신들의 노력이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세 가지 사항을 알려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도 함께 있음을, 이것을 통하여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3: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하나님은 요단강을 이적같이 건너게 하심으로, 내가 너의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을,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3:10/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요단강 건넘을 보아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족속을 쫓아내실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편에서는, 가나안 전쟁에 이미 승리한 것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땅의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아울러 그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4:23-24/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라고, 이런 이적을 보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고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요단강을 평지처럼 건너감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고, 가나안 땅의 모든 이방민족들을 쫓아 내사, 약속대로 그 땅을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세 가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이적적인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이 백성들 앞서 법궤를 메고 갔는데, 이 제사장들을 오늘날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대의 제사장들은 가정의 부모들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정의 부모들은 어려운 난간들이 있거나, 장애물이 있거나, 가정의 우환질고가 있거나, 시련들이 있거나, 인간관계의 심한 갈등이 있거나, 정말 슬픈 일이 있거나, 근심걱정 되는 일이 있을 때, 그 모든 짐들을 힘들어도 울러 메고, 믿음으로 건너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힘들고 지치고 낙심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처럼,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며, 믿음으로 앞을 향해, 물을 밟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해야 가족들이, 그 장애물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의 땅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가족들이 당하는 어려운 일이나, 가족들 앞에 가로놓여있는 힘겨운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부모들의 믿음과 희생과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현대의 제사장들은, 교회의 목사와 중직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사장들인 목사와 중직자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일을, 짊어지고 앞장서서 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재정적 문제가 있으면, 헌금하라고 합니다. 교회의 시험거리가 있으면, 장로님들보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대출 받아야 할 때면, 장로님들 보증서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봉사하라, 책임져라, 모범을 보이라, 위원장을 맡으라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겠습니까?
목사인 제가 어느 때 보면 장로님들이 불쌍할 때가 있습니다. 안쓰럽고 안됐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목사는 사례비라도 받지, 장로님들은 헌금을 드리면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교회의 중직자들이 이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갈 때, 교인들은 정결한 마음으로 뒤 따라가기만 하면, 장애물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의 부모와 교회의 목사와 중직자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앞으로 나아가면 되고, 가정의 자녀들과 교회의 성도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그 뒤를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강에도 길이 나고, 문제가 해결되고, 장애물이 없어지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교회가, 새로운 예배당 건축이라는 큰일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허가가 날 것입니다. 12월 초에 착공계를 내서, 공사를 시작하면 됩니다. 적어도 1년 공사를 해야 합니다. 내년 성탄절에는 새 예배당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의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앞장서서 있습니다. 이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무겁고 힘들지만, 중요한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니까, 이 짐을 메고 앞을 향해 전진합니다.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 딛습니다.
건축위원장이신 민 장로님은, 사실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축복의 기회라고 여기고, 기쁨으로 인내하며 이 짐을 지고 계십니다. 그 외 많은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이 예배당 건축이라는 궤를 메고, 믿음으로 앞장서서 가고 있습니다.
모든 교우들은 앞에 서서 가는 분들을 믿고, 그 뒤를 깨끗한 마음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필요도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마침내 하나님의 이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떨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좋으신 하나님을 더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