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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시편 146:1-10)
이정현 목사 2014-12-07 추천 0 댓글 0 조회 975

소망이란, 어떤 것을 이루고, 또 그것을 얻고자 바라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달리말해 소망은, 좋은 일이 오기를 기대할 때의 감정입니다.

 

이 소망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고통과 절망의 현실 속에서, 소망 중에 살아왔고, 지금도 역시 소망 중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성경을 찾아보니까, 소망이라는 단어가 37회가 나오고, 희망이라는 말이 21회가 나옴으로, 전체 58회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여성의 출산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망이라는 단어와, 여성의 출산 사이에는,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소망한다는 것은, 현재가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렵다는 것을, 전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다 해결되어, 평안하고 기쁘고 행복한 미래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더 좋은 미래를 소망한다는 것은, 항상 고통스러운 현실을 전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아이를 임신하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아이를 출산할 때의 산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산고의 과정 속에서, 산모가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은, 건강한 아이의 출산입니다. 건강하고 예쁜 아이가 태어나면, 그것이 소망의 성취가 됨으로, 그 동안 있었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은, 깨끗이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그래서 소망을, 여성의 출산과 연관지어 말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2012년 2월, 68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강영우 박사님은, 시각 장애인으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중학교 3학년 때, 뜻하지 않게 축구공으로 얼굴을 맞아서,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가 났을 때, 어머니가 쇼크를 받아 뇌졸중으로 인하여, 8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얼마 후 누나가, 동생 셋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공장에서 일하다가 과로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불과 3-4년 동안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부모와 누나를 잃은 강영우는 동생 하나를 고아원에 맡기고, 하나는 철물점에서 일을 하게하고, 자기는 맹인 재활원에 들어가서, 점자와 타자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춘기 시절과 젊은 시절은, 참으로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연세대학교에 들어갔고, 차석으로 졸업을 하였습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장애인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미국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유엔 세계장애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루스벨트 재단 고문으로 일하며,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힘쓰며 살았습니다. 백악관에서는 무려 11년 동안 일했다고 합니다.

 

매일 새벽에 온 가족이 일어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는데, 늘 기뻐하며 감사하며 보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을 이처럼 바꾸어 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감사하며 희망을 갖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커서 큰 아들은, 아버지의 눈을 고쳐주겠다고 안과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최연소, 선임 법률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큰 며느리는 산부인과 의사이고, 작은 며느리는 법률 대학원의 교수로 있습니다. 손자 손녀들도 믿음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강영우 장로님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았지만, 밝은 빛을 우리에게 던져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 직전에, 암으로 인한 고통, 절망, 고난, 시련, 암흑을 헤쳐 나와,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가 희망과 관련하여,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와 삶을 통하여,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희망이 있는 곳에는, 절망이 자리 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은, 절망이 크고 무겁기 때문이 아니라, 희망을 찾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희망이 없다면 살아 있지만 죽은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최고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의 상황이 힘들고 고통과 슬픔이 있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소망 중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 146편에서 시인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귀인들은 고관이나 방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정치인들, 권력이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118편에도 보면,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또한 범위를 좀 더 넓혀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높고 권세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인생들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들은 도울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60편에도,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사람의 도움은 헛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귀인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그저 사랑해야할 대상이지, 의지해야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너무 의지하고 사람을 빽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누구이다.’ ‘우리 삼촌이, 형이 검사다.’ ‘회장이다.’ ‘총장이다.’ ‘경찰 간부다.’ ‘갑부다.’ ‘국회의원이다.’ ‘시장이다.’ 이런 것을 자랑하며, 이런 것을 빽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자기의 먼 친척이, 권 모 안기부장이라고 하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걸리는 것도 없고, 막히는 것도 없이 사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렇게 자랑하고 그 사람을 의지하여 살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자리에서 떨어지고, 목사 면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법정 소송이, 얼마나 많이 걸려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꼭 맞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5-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오늘 성경에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어기고,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으면, 저주를 받아 이 같은 비참한 꼴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방백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러면 그들의 모든 계획들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진정으로, 나를 도와 줄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처음 시작이 흙에서 왔기 때문에,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죽음의 날에는, 인간의 계획과 의도가 단번에 끝나버리고,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런 인생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우리의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나의 도움으로 삼아야 합니까? 누구에게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합니까?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을 삼으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야곱이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았듯이, 너희들도 그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야곱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이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가던 중에 그래도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합니다. 그리고 외삼촌 집에서 20년 동안이나 노동을 했고, 결혼생활도 오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곳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도움으로, 형의 영접을 받아,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그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결국 모든 가족들이 애굽으로 피신하여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다가, 또한 죽을 때에도, 가나안 땅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의 시체를, 고국으로 가져가 달라고 부탁을 하고, 하나님이 너희들을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말하고, 애굽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젊은 날 동안, 속고 속이는 인생을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너희들도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을 받으며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 있는 분명한 근거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시기 때문이며, 인간의 소망이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62:5)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제 네 눈에 눈물을 멈추어라, 네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들이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렘31:15-17)

 

이 외에도 성경 여러 군데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0장 7절에서는 ‘여호와는 의로운 처소이시며 그의 조상들의 소망이시라.’고 하셨고, 시편 42편과 43편에서는 동일하게 후렴으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11, 43:5)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낙심과 불안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도와주심을 바라며, 그에게 소망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뿐만아니라,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라는 말씀과(시119:49), 연약한 인간이 오직 주께만 소망을 둘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말씀도 있습니다(시39: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결국 우리의 소망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주님께 소망을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멸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악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우리를 회복시켜 기쁨을 주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슬픔 중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둡니다.

 

사방팔방이 꽉 막혀 있는 상황 중에서, 이 상황을 뚤어 주시고 형통하게 하실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면초가 중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독일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 체험”이라는 책에서, 자기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말하면서, 희망, 불안, 신비적 체험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고통과 슬픔과 불안 가운데서, 끊임없이 희망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체험신학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희망의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도 역시,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 6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할 때, 과연 그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기에 충분하신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여호와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말입니다. 또한 영원히 진실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흘러도, 그분의 진실함은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7절에는,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바르게 판단하시는 분이시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며’,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마디로 공의로운 분이시고, 공급자이시며,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8절을 보시면,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이시고’,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 분이시고’, ‘의인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9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10절에서는,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에 관하여,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장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몇 구절을 통하여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공급자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의인을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소망하고 의지해야 할 충분한 분이지 않습니까? 이만하면 소망을 둘만하지 않습니까? 소망할 분은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다. 이런분에게 소망을 안두면, 누구에게 소망을 둘 수 있겠습니까?

 

살아계시며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몸만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앞에서 강영우 박사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의 유고집이 한 권 있는데,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평생 주님만 보고 걸었습니다. 나를 보면 어두움인데, 주님을 보니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만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칠흙 같은 어둠 속을 살면 어떠냐고 묻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난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다. 늘 빛으로 가득했고, 그 빛이 너무 눈부셔, 짙은 썬그라스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썬그라스를 쓰니 빛 속에 계신이가 더욱 선명합니다. 손에 잡힐 듯 하고, 보고 있으니 언제나 가슴이 뜁니다. 지난 한평생, 그분과 함께 걸어온 지난날에 감사합니다. 또 그 길에서 만난 소중한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책은 나와 같이 육신의 썬그라스를 쓰고 있지만, 늘 빛 가운데 거하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앞서 그 빛 가운데 들어가신 분도 있고, 저와 같이 그 길을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 여러분도 빛의 길로 들어서길 소망합니다.”

 

세상은 절망과 어두움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강영우 장로님은 죽어가면서도, 희망과 빛을 노래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빛 가운데 들어가기만 하면, 빛이신 그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풍성히 누린다고 하면서, 그 빛의 길로 들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다시는 어두움이 없는 천국을 소망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도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4년도를 마무리하는 여러분, 내년도는 올해보다 더욱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 한 분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개인과 가족들과 우리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소망 중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복이 무엇인지 다 체험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우리 가정에, 이런 복을 주셨다.’고, 간증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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