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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마7:16-20)
이정현목사 2014-10-12 추천 0 댓글 0 조회 1004

지난 8월 불교 조계종에서, 만 16세 이상 국민 1,500명을 대상으로, ‘2014년 한국의 사회, 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종교인들 중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높은 신앙만족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응답자 중에 무려 65.1%가, 나의 교회생활은 만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꼴지가 불교인이었는데, 34.3%였습니다. 불교인들보다 기독교인들이 무려 배가, 자기의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어느 종교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는, ‘천주교’가 45.5%로 높게 나타났고, 다음으로 ‘불교(41.6%)’, ‘개신교(26.1%)’ 순이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다수가, 기독교를 또는 교회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개인 개인은 신앙생활에 만족하며 지내는지는 모르지만, 국민들은 기독교를 별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만족도는 가장 높으나 신뢰도가 낮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물론 그 통계에서는, 왜 기독교가 사회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제가 볼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선한 열매가 적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좋은 열매가 많아야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기독교인들이 잘한다고 착하다고 쓸만 하다고 평가를 받을 것 아닙니까? 열매는 없고 대신 부정부패, 비리, 도덕적으로 타락하니까,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열매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창조 때,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하시니까 그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열매 맺는 나무가 생겼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이 심음과 거둠의 법칙이 쉬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계속하여 지금까지 낮이 있으면 밤이 있듯이, 과수를 심으면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과수나무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나무를 심으면 계속 열매를 따게 될 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열매의 종류도 많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과일나무의 열매를 비롯하여, ‘행위의 열매’(잠1:31)가 있고, ‘입술 또는 혀의 열매’도 있고, 잠언 31장에는 ‘손의 열매’도 있고, 이사야 32장에는 ‘공의의 열매’도 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가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있고 본문에서는 ‘아름다운 열매 또는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가 나타납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부활의 열매’, ‘전도의 열매’,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 ‘평강의 열매’도 있고, 또한 계시록에는 ‘생명나무의 열매’와, ‘열두 가지 열매’라는 특이한 열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다양한 열매들을 종합해서 정리한다면, 과일나무의 열매가 있고, 사람의 생활로 맺는 열매도 있고, 또한 영원한 열매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며, 결론 부분에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하시면서,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말로 시작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선지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보통 거짓 선지자라고 하면, 구약적인 배경에서는 참 선지자와 반대되는 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도 않았으면서도 받은 양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못되게 전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두 가지 사항(기준)을 가지고 거짓 선지자냐 아니면 참 선지자인지를 구분하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계시)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바르게 전하느냐 그렇지 않는냐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항대로 하는 사람은 참 선지자이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참 선지자의 예언은 이전 선지자의 예언과 모순되지 않으며, 그 예언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이 주신 것도 아님으로 이전 예언과 상충되며, 역사적으로 실현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는 누구인가? 혹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듣기 위해 나온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 이들이 끼어 있었을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관해 많은 것을 공부한 사람들이고,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가르치지를 못하였고, 뿐만아니라 예언된 말씀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중심인물이 메시야라면, 마땅히 그 메시야를 전파하고 가르쳐야 했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러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여기의 거짓 선지자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은 이런 자들을 삼가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실체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온다는 말은, 양이 아닌데 양처럼 보이려고, 가짜로 탈을 쓰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의 본성은, 순한 양이 아니라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것입니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입니다. 정통적인 교리를 가르칠지는 모르나, 삶은 거짓되다는 것입니다. 위선이고 가짜입니다. 양이 아닌데 양처럼 탈을 쓰고 그 속에 들어간, 노략질 하는 잔인한 늑대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성경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놈’과 같으며, 또한 ‘흑암의 권세’로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놈들은, 양들 속에 교묘하게 들어와, 양들을 해하고 죽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양들을 해하고 죽이는가 하며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것을 가르치고 전하므로 양들을 노략질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면 다 죽는데도, 올라가면 승리한다고 하고, 평강이 없는데도 평안하다고 말하고, 천국과 지옥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하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고 하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아무도 심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교회에서 회개를 외치기보다 위로와 격려와 성공을 말하고, 사단과 귀신의 존재를 꾸며낸 것으로 말하고, 그리스도의 이적과 부활은 이성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고, 어느 길로 가든지 끝에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며,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면 동성연애와 결혼도 허락해야 한다고 하고, 죄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구원을 얻는 길은, 믿음 외에 다른 방법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후에 베드로 사도도 저들의 가르침과 악한 행동을 그의 서신에서 지적했습니다. ‘너희 중에 거짓 선생이 있는데, 저희는 호색하며 사람들을 훼방하며 , 낮에 연락을 즐기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벧후2:1-2, 10, 12-14). 

 

이 같이 가르치고 전파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결코 양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혼을 좀먹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이 양들을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노략질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목적을 추구할 것입니다. 

 

참 성도들은 이들의 가르침과 선포를 잘 분별해야하고, 그들과 대적하여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그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또는 그들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을 알기 위해서 특별조사위원회를 조직하거나, 치리회나 노회 및 총회에 이 문제를 상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그 기준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맺는 열매를 보아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열매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여기의 ‘가시나무’는 못된 나무이고, ‘포도’는 아름다운 열매이고, ‘엉겅퀴’는 해를 끼치는 무익한 식물이고, ‘무화과’는 아주 값진 열매입니다. 못된 나무에서 아름다운 과일을 딸 수 있습니까? 해를 끼치는 무익한 식물에서 값진 열매를 따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따겠느냐’는 말은, 결코 딸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말합니다. 어느 청교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시나무에 포도열매를 얹어 놓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엉겅퀴에 무화과를 얹어 놓는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거기서 자랄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같은 병행구절의 말씀이, 누가복음 6장 45-46절에 있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 사람의 본성이, 말과 행동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곧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본성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 본성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 본성은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성을 속이려고, 자기 자신을 가장하고 포장하고 위선을 해도, 결국 열매로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고로 그 열매를 보면 그 본성이 어떠한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착한지 악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7절의 말씀은 긍정적으로 말한 것이고, 같은 내용을 18절에서는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똑 같은 내용을 긍정문과 부정문으로 각각 표현한 것은, 그 만큼 그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을 단순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와 모든 성도들로 확장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 산상에 모여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에게도 들려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에는, 이 말씀의 대상이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듣고, 자기들의 삶에 적용시켜야 하겠지만,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이 같은 삶을 삼가야 하지만, 우리 자신들도 성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간에, 참이 아니라, 거짓 직분자라면, 예를 들어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거짓 목자, 거짓 인도자, 거짓 직분자, 거짓 성도들은,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이고, 그 못된 열매를 보면, 그가 거짓 직분자인 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열매’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무슨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여기서의 열매는 과수 열매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고, 달리 사람들의 행동과 그 결과를 말합니다. 사람들의 모든 행실의 은유적 표현이, 열매입니다. 

 

그리고 ‘나쁜 열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원문 상으로 ‘썩은 열매’라는 뜻입니다. 주인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실망시키는 결과를 말합니다. 주인을 기쁘게 하지 못하며, 오히려 역겹게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이른 봄에는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합니다. 여름에는 포도나무 가지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잎을 피우고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주인은 풀을 매 주고, 약을 쳐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푸른 잎을 보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 것 아닙니다. 꽃이 아름답지만, 그 꽃을 보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땀 흘리고 애써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정말 힘들고 귀찮아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까지 수고하는 것은, 가을의 탐스러운 수확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수고하고 노력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쁜 열매, 썩은 열매를 맺었다면, 주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가지는 가차 없이 잘라내는 것입니다. 열매가 그 나무를 보는 기준입니다. 꽃이 그 나무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잎이 무성한 가지가 그 나무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데, 못 먹을 썩은 열매, 나쁜 열매를 맺었다면 그 나무는 찍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는 말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를 표현한 말입니다. 세례요한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자기에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면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느니라.’(마3:7-10)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고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잘라 불에 던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종말론적인 심판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땅히 열매를 맺어야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비록 잎이 무성하다할지라도, 꽃을 아름답게 피웠다할지라도, 주인이 바라시는 열매가 없음으로, 결국 이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주님이 스스로, 이 말씀의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열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보아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나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좋은 목사야, 좋은 직분자야, 좋은 성도야’-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야. 나의 신앙생활은 만족해. 예수 믿어서 행복해-라고 말하지만, 사회로부터의 신뢰도가 꼴찌라면, 그 말처럼 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가 없는, 말뿐인 그리스도인만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차이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로마서의 중심 내용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내용과, 그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과, 구원 받은 자의 삶에 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가르치지만, 그러나 더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역시 앞부분인 구원입니다.  

 

죄악 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율법을 지켜야하는가? 아니면 선행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득구’, 또는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 반면 야고보서의 내용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줘라. 나는 내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는 말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예를 제시합니다. 만일 형제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말로만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며, 그의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행함을 강조합니다.  

 

면밀하게 따지면 이것은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차이점도 아니고, 서로 상충되는 점도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믿음을 강조한다면,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 둘은 손바닥과 손 등의 차이라고 할 수 있고,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보여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행함이 동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 받은 사람임을, 행위로 들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함이 없으면, 어떻게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폐와 위폐를 구분하는 법을 아십니까? 다시 말해 진짜 돈하고 가짜 돈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조폐공사에서는 참폐에다가, 가짜가 따라할 수 없는 문양이나 약품을 넣어두는데, 그것에 관하여 공부하면, 진짜와 가짜를 분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잘 분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은행직원들은, 참폐와 위폐를 구별하는 방법을 배울까요? 물론 교육을 통해 배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제로는 그렇게 해서 위폐를 가려내는 것보다, 참폐를 많이 만지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손이 위폐를 가려낸다고 합니다. 진짜를 많이 접하는 것입니다. 많이 만지는 것입니다. 많이 다루어 보는 것입니다. 많이 거래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이 손이 가짜를 가려낸다는 말입니다. 손의 촉감과 느낌이, 진짜 가자를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이고, 어떤 나무가 나쁜 나무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기준은 열매입니다. 아름다운 열매가 있으면 좋은 나무이고, 나쁜 열매(썩은 열매)를 맺으면 나쁜 나무라고 하시면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부정적인 말 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고, 불평불만 하지 말고, 마음에 상처 주는 말 하지 말고, 믿음 없는 말 하지 말고, 남의 험담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고, 남을 비하하는 말 하지 말고, 예의바르게 말하고, 친절하게 말하고, 남을 세워주고, 감사한 말을 하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기독교인들은 회사에서 성실히 일하고, 열심히 일하고, 바르게 일해서 회사에 유익을 끼쳐야 합니다. 지각하지 말고, 조금 아프다고 결근하지 말고, 직원들 앞에서 술취하여 실수하지 말고, 선정적인 발언하지 말고, 서로 웃으면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사장님에게 동료들에게 불평불만 표하지 말고, 커피 한잔 얻어먹으면 두잔 사고, 돈 꾸지 말고, 어려운 부탁하지 말고, 청소나 뒷 마무리도 잘하고, 협력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고, 늘 찬송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어느 여 집사님은, 지금의 직장에서 8년을 근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8년 동안 한 번도 지각을 하거나, 결근을 한 적이 없답니다. 아파도 출근하고,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어도, 남들보다 항상 일찍 출근했다고 합니다. 회사 물건은 이면지 한 장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볼펜 한 자루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들은 월급 받은 것만큼만 일한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러면 자기에게는 유익하지만, 회사에는 유익이 되지 않음으로, 자기는 월급보다 더 많이 일하려고 한답니다.  

 

사장님이 더 높은 직책과 보수를 제시 했는데도, 자기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사양하고, 지금의 위치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분이야말로, 말과 행동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안 믿는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가짜로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과도,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열매를 보아,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믿는, 좋은 나무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곧 기독교인의 선한 열매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생각과 입술과 행동의 열매인 것입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꽃보다, 열매가 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아름다운 열매보다 꽃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바쳐 가꾸는 것 같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하여 땀 흘리는 시대가 아니라,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하여 살아가는 시대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발맞추어 여러분도, 삶의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서, 땀을 흘리며 살고 있지 않나,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은 화려한 꽃을 피워, 성공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꽃과 같은 인생을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려하게 살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화려한 출세를 바라보고, 좋은 집과 자동차를 타고 흥청망청 쓰며 사는 인생이,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일 수 있습니다. 꽃과 같은 화려한 삶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얼마나 갑니까? 길어야 한 달, 웬만한 것은, 한 두 주면 다 떨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이, 한 때만 반짝하고 끝나면 되겠습니까?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는데, 곧 떨어질 꽃처럼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꽃과 같은 화려한 인생, 성공하는 인생으로 사는 것보다는, 아름답고 탐스런 열매를 맺는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화초로 꽃을 피우기 위함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좋고 아름다운 열매로, 우리가 주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망교회 성도들은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좋은 나무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매 맺는 소망교회 성도들이,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높여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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