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말씀을 통하여, 언제, 어디에서 찬송해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언제 찬송해야 합니까?-시간을 가리지 말고, 언제든지 찬송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찬송해야 합니까?-장소에 상관없이, 어디에서든지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일평생 동안 찬송함으로,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와 동행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누가, 누구에게 찬송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 찬송할 수 있는가? 이것은 어떤 사람이 찬송할 수 있는가의 질문으로, 찬송자의 자격을 묻는 질문입니다. 누가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습니까?
시편에 보면(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포함한 많은 주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찬송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목소리 좋다고, 음악을 공부했다고, 노래를 좋아한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성도가 되어야,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시편에서(시113:1)는, ‘여호와의 종들’이 찬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종들은, 넓게는 이스라엘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좁게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이나, 기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주로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주 안에서 구원 받은 우리 모두를 가리켜, 여호와의 종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은 아닙니다. 죄의 종도 아닙니다. 이런 것에서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데에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종 된 삶을 사셨고, 제자들도 그랬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종으로서 주인을 섬기며 일해야 하는 것이고,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종처럼,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는, 여호와의 종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여호와의 종들만이,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남녀노소, 흑인 백인 황인, 가진 자 못가진자, 배운 자 못 배운 자, 지위가 있는 자 없는 자-이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주 안에 있는 자면 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면 되고, 여호와의 종이 되었으면,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이고, 대단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백성은, 앞에 구절들을 근거하여 볼 때,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조성했다, 내가 너를 구속했으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면서, 21절에 가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을 통하여 찬송을 받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구속하신 일차적인 목적이,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나 와서 앉아 있으면, 예배가 되는 것입니까? 아무나 앉아서 입만 벙긋한다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까? 아무나 앉아서 돈 몇 푼 낸다고, 헌금이 되는 것입니까? 아무나 앉아서 눈 감고 고개 숙이고 중얼댄다고, 기도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고 기도하며 헌금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유일한 중보자도,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 참다운 영적 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라면, 마땅히 감격 중에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속 받은 우리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찬송을 받으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세상의 모든 족속들과 온 땅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나, 온 피조물들도 마땅히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니까, 그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존재들에게도, 하나님은 창조주이심으로, 찬양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67편(:37)에서는,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하셨고, 시편 66편(:4)에서는,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150:6)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모든 민족들이, 온 땅이, 호흡이 있는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148편의 말씀에 보면, 누가 찬양해야 하는지를 길게 쓰고 있습니다. 모든 천군 천사도 찬양하고, 해 달 별들도 찬양하고, 하늘도 찬양하고,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하고, 바다의 큰 물고기들도 찬양하고,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광풍과 산들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과,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찬송은 예수를 믿는 우리만 드릴 수 있지만, 성경은 모든 민족에게와 모든 피조물들에게, 찬송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지은 바 된 피조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이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찬송은, 여러 면에 있어서 불완전할 수 있지만, 장차 천국에 올라가서 부를 찬송은, 결코 불완전하지 않고, 온전한 찬송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 가서 찬송하게 될 모습을, 성경은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시록 4-5장에 보면,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옆에 일찍 죽임을 당한 자 같은 어린양이 계시고, 그 다음엔 네 생물이 있고, 그 다음은 24장로님들이 계시고, 그 다음은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구름같이 둘러 쌓여있고, 그 다음은 구속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으며, 마지막은 온 피조물들이 보좌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께 경배하는 데, 모든 존재들이 꿇어 엎드려 경배하며 찬송을 합니다. 네 생물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고 하니까, 이십사 장로들이,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옵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한참 있다가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 양 예수님께 새 노래로 찬송을 드리니까, 수만 수천의 천군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찬송 소리를 들은 모든 피조물들이 동시에, 또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노래하니까,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천국 가서 드릴 예배의 모습이고, 또한 찬송할 모습입니다.
우리도 그날에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라고 찬송할 것입니다. 시화 바오로 성당 건물 입구에 보시면, ‘쌍투스, 쌍투스, 쌍투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서,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는 말입니다. 한글로는 세 번 거룩하다라고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테러 쌍투스(Ter-Sanctus, 삼성송)이라고 합니다. 먼 훗날 앞서 간 성도들과 함께 우리가, 이 삼성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면 누구나, 이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누구에게 찬송해야 하는가? 이것은 찬송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드릴 찬송의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여호와 이십니다. 시편과 그 외 많은 성경에서,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 주님만이 우리의 찬송을 받으셔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대상29:13), 주님의 능력(시21:13), 주님의 기사(시89:5), 주님의 인자와 공의(시101:1), 주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구원하심을 찬양하라는 말씀도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결국 다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과,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찬송의 영광을, 다른 우상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데, 이것을 다른 신에게 돌린다면, 그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찬송과 영광은 창조주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드리는 합당한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시편 137편의 말씀을 보면, 남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가서, 고향을 생각하며 그발 강가에서, 슬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먼 이국땅에서 어떻게 살아갔겠습니까?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이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이방인들로부터 인권을 보장받았겠습니까, 대우를 제대로 받았겠습니까? 정말로 비참하게, 고통 가운데, 하루하루를 눈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70년 동안 바벨론의 노예로 살면서, 자기들이 왜 이렇게 포로로 잡혀 왔는지도 생각했을 것이고, 또한 왕위가 끊어졌는데, 그 왕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겠다던, 성전은 어떻게 될까도 생각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를 보살피고 계시는 분인가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그들은, 이런 묵상들을 통하여 점점 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포로지에서 그들은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나름대로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137편의 이 말씀은, 유다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중, 거의 마지막 즈음에 쓰여 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원래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민족이라, 이곳 포로지에서도 여전히 수금을 키며,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그들은 예배 중에도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목동들이 양을 치면서도, 악기를 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즐겁고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노래를 부르며 찬송했습니다. 회당에서도 노래와 악기를, 많이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아서, 노래와 시를 좋아했던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처럼 찬송을 좋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지에서 돌아갈 고국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어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수금을 타면서 시편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노예로서 심한 노동을 하면서도, 중간 중간 쉬는 시간에 몇 사람씩 모여서, 수금을 타며 찬송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바벨론 사람들이, 그 노래가 너무 듣기 좋고 감미로우니까, 우리를 위해서, 그 노래 좀 불러달라고 한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노래를 요구한 것이, 단순히 듣기 좋고 감미로웠기 때문만은 아니고, 새롭고 흥미로웠을 뿐만 아니라, 포로자들에게 노래를 시켜서, 승리자의 우월감을 들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유대인들에게 노래를 요구한 것입니다. 본문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정복자가 포로자들에게 노래를 시키면, 당연히 그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비록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위해서(바벨론 사람들의 흥을 돋구기 위해서), 찬송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고,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은 것입니다. 아예 다시는 수금을 빼지 못하도록, 단순히 걸어 놓은 게 아니라, 꽁꽁 묶어 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벨론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희들이 부르는 그 노래를,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정복자의 요구를 계속 듣게 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올려야 할 찬송을, 이방인들의 흥미를 위해서 결코 부를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기도 합니다.
“137: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137: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유대 사람들은, 비록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부르는 여호와의 노래를, 어찌 사람을 위해 부를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차라리 내 오른 손의 재주를, 잊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내 오른 손의 재주는, 수금을 탈 수 있는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수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못하고, 너희 폭군들을 위하여 노래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이 수금 타는 기능을 잊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을 위하여 연주할 바에는, 차라리 내 모든 재주를,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잊어버리고, 너희들을 위하여 찬송을 부름으로, 너희를 즐겁게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우리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면 좋겠다. 6절의 ‘혀가 입천장에 붙는다.’는 것은, 말도 못하고 찬송도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올려야 할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고, 바벨론 너희들을 위하여 찬송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벙어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 백성들은, 비록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도 예루살렘을 잊지 않고 다시 돌아가서, 조국에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예배드릴 것을 희망하며 살았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하나님께만 찬송하고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예배와 찬송의 대상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비록 삶의 현장에는, 고통과 눈물과 아픔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만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들에게, 바벨론 이방인들이 자기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드릴 찬송을 그들에게 돌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배자의 명령이라할지라도,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코 바벨론 사람들을 위해, 찬송을 부르거나 수금을 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습니다. 기악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입니다. 내 오른손의 재주를 잊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악기를 다루는 재능을 잊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벙어리가 되었으면 더 좋겠다. 성악을 못해도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체험한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여호와뿐입니다. 찬송의 대상, 기도의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다른 곳에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그의 거룩하심과 영광스러움을, 마음껏 찬양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여러분 개인이 가는 곳곳마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우리 교회의 예배 때마다, 여러분의 일터마다, 주님을 높이는 찬양소리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찬송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 자리에 임재 하여, 은혜로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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