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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랑치 말라 (요일2:15-17)
이정현목사 2014-08-31 추천 0 댓글 0 조회 877

요일2:15-17/ 세상을 사랑치 말라.

 

지난주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시시하게 쩨쩨하게 적당하게 사랑해서는 안 되고,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해야 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이처럼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은혜가운데 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힘과 능력임을 믿고, 또한 이웃을 사랑함이 우리의 복임을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씀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를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도 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우리가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세상은, 세상의 풍조와 사조, 유행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사탄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2)에 보면,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 영에 의해서 지배받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세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미워하는 자들로 구성된 체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상충되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군사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과 세상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은, 영구하지 못하며 잠시잠간 있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 속에서 구원을 받아, 다시 세상 속으로, 빛으로 소금으로 파송을 받은 자들입니다(요 15:19).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으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M. Luther)도, “세상은 속이며 속기를 원하므로,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속고 속이는 세상이기 때문에, 결코 진리가 그 속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을,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말라고 한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세상이고, 사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겠어요?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사탄은, 우리가 영혼을 무시하고 육체만을 위해 살도록 합니다. 삶의 목적과 행복의 조건이, 전부 육체(물질)에 있다고 믿게 합니다. 이 거짓말에 속아서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육체를 위해서는 동분서주합니다. 아울러 사탄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주인인 줄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인생 내 마음대로’라고 하면서, 자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또한 사탄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판과 영생도 없다고 합니다. 지옥이라는 말만 들어도 싫어하고, 과민반응을 보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낙을 누리며 살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온갖 쾌락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이 같은 속임수와 유혹에, 세상 사람들은 왠만하면 다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썩어질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처럼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이 세상에 빠져서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고, 그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세상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말씀하시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도 마태복음 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면서, 곧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교훈하셨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고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세상을 벗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명확한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5장에서(: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이 세상은 사탄에게 속하여 있다고, 분명히 구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혹자의 말처럼, 빛과 어두움을 결합하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결코 결합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이 말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으니, 신자는 죄악 된 이 세상과, 전혀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자라 하더라도, 세상과 접촉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불교에서처럼 산속에 들어가서 살라는 말도 아니고, 가톨릭에서처럼 수도원에 들어가서 은둔생활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금욕적으로 삼가 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TV와 영화를 보지 말고, 신문도 읽지 말고, 일반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음식도 먹지 말고, 부부생활도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도요한이,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은, 이 세상의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날 때,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세상을 외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결별하여 외톨이로 살고, 세상적인 것들은 모두 다 끊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어긋나거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들을 외면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것들은 쳐다보지도 말고, 그것들에 관심을 갖거나, 그것들을 사랑하지도 말고, 거기에 중독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의 모든 식구들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온갖 종류의 욕망을 말하는데, 특별히 성에 대한 열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당시 로마나 그리스의 사회에서는 성이 미화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영화나 TV, 책이나 컴퓨터, 그리고 핸드폰을 통해, 온갖 부도덕한 성적인 것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엽기적인 성적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체널을 통하여, 포르노물들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포르노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이런 각종 빨간 그림들을 통하여, 죄악 된 우리의 본성에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사였지만, 여자의 품에 빠져서 자기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스토리는, 결국 다른 여자와 불륜에 빠져서, 가정파탄이 나고 불행해지는 것처럼, 삼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사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는 2천여 명의 검사들이 있다고 하고, 전국에 지검장은 40여명에 불과하답니다. 지검장은 대단히 높은 사람이고, 나라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이, 술 먹고 대낮에 길거리에서 추태를 버리다가, 결국 불명예스럽게 퇴직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해를 주지는 않았다하더라도, 공인으로서 젊은 아이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는 한때의 육신의 정욕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귀한 자리에서 물려나고 말았습니다.

 

삼손과 모 지검장처럼 육신의 정욕대로 살면, 좋지 않은 결과가 온다는 점을 명심하고, 그렇게 살지 말고, 요셉처럼 정욕을 이기며, 자신을 거룩하게 잘 지키며 사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기록된 세상에 있는 것은,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것은 봄으로 소유를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눈은 많은 것을 갈망하지만, 특히 물질을 봄으로, 그것에 대한 탐욕을 부리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은 보는 것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눈으로 보면 욕심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옷을 보면 사고 싶고, 멋진 자동차를 보면 타고 싶고, 경치 좋은 곳을 보면 여행가고 싶고, TV에서 맛 집 소개하면 가서 먹고 싶고, 구경하는 집에 가서 보면, 우리 집도 이렇게 꾸미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절제하거나, 논리적으로 잘 생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안목의 정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물욕을 절제하지 못한 채, 카드와 남의 돈을 빌려, 겁도 없이 돈을 흥청망청 쓴 사람들이 있습니다. 높은 금리를 보장해 준다는 말에 속아, 일평생 모은 큰돈을 빌려주었다가, 떼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박이나 복권, 주식 같은 불로소득에 집착하다가, 몰락하거나 경제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문제로 형제간이나 교우 간에 원수가 된 사람들이 있고, 가정이 풍비박산(風飛雹散)한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빚 때문에 자살하는 사건까지 속출합니다. 잘못된 돈 관리로 그들이 받는 대가는 비참하며,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5-21). 통장에 쌓여있는 돈을 보면 더 쌓고 싶어 하는, 돈에 대한 탐심을 물리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롯의 가족들을 거기에서 구원하여 밖으로 내 보내시면서, 뒤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천사의 그 말을, 롯의 아내는 듣지 않았습니다(창 19:26). 자신의 두고 온 재산이 불타는 것을 못내 아쉬어 했던 그녀는, 안목의 정욕이 발동함으로,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불타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고 하셨으나, 그것을 바라봄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미련을 둠으로, 결국 죽고 만 것입니다.

 

구약성경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난 후, 아무도 이 성안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의 아간이라는 자가, 그 물건들을 보고 탐을 내서 취하게 됩니다.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와 은금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리고, 자기 소유로 하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그것들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아간은 이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장막 땅 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 전투에 실패하여, 결국 아간의 범죄가 패전의 원인임을 알게 된 여호수아는, 아간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들과 짐승들까지 전부 끌어다가, 돌로 쳐서 죽이고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 궤를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지만, 그도 결국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헌금궤에 손을 데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돈이 배신을 가져왔고, 결국엔 비참한 죽음까지 낳고 말았습니다.

 

롯의 처나, 아간이나 가룟 유다처럼 되지 말고, 돈에 대한 욕심 없이, 항상 청렴하고 깨끗하게 살았던 느헤미야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망교회 성도들은 돈 때문에 망하는 자들이 아니라, 돈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있는 것들은,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뿐만 아니라,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유에 대한 자랑이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집이나, 자동차, 학위, 건물, 자식, 돈 등등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자긍심, 자부심을 갖는 것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긍지를 자랑하는 마음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자랑이라는 단어는, 긍지를 나타내는 자랑(pride)이 아니라, 뽐내고 자만하고 뻐기는 것(boasting)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명의로 된 넓은 집을 자랑하거나, 멋진 자동차를 뽐내거나, 높은 지식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사업체나 높은 빌딩을 보이며 뻐기는 것을,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악인이라고 단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시 10:3).

 

또한 사도바울도, 믿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0). 불신자들의 삶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R. C. 채프만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자랑을 해도, 칭찬을 얻지 못했다.” 남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뻐기며 자랑했지만, 칭찬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생의 자랑은, ‘치명적인 교만이며 겸손을 가장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치명적인 교만이라는 말은, 그 같은 이생의 자랑은, 곧 멸망의 지름길이라는 뜻이 포함된 말이고, 겸손을 가장한 것이라는 말은, 겸손한척 말하는데 내심 자기를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이 집 하나남이 주셨어.’-그러면서 자기의 집 키를 자랑하는 것이고, ‘이번에 하나님이 선물로 차 한 대를 주셨는데, 이거 2억짜리야’-그러면서 자기 소유를 자랑하는 것을, 겸손을 가장한 치명적인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 우리는 주님 밖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이고, 자랑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자랑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부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함을 자랑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자랑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은총...그분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매일 매일의 동행과 선하게 인도하심...우리가 조금 조금씩 경건하도록 도와주심, 하나님의 일에 작게나마 쓰임 받게 하심, 헌신과 충성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꼴난 지식, 꼴난 집이나 자동차, 꼴난 자식, 꼴난 돈 자랑하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서 베풀어 주신, 은혜만 자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 이 세상의 사조와 풍속과 유행은 다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시간이 지나면 다 지나갑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들도, 그들이 붙잡고 있는 것들도, 결코 영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성과 이성적 쾌락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다 지나가게 되어 있고요, 돈이 최고라고 떵떵거리는 사람도, 잠시잠깐이면 다 지나가게 되어 있고, 내가 가진 것이 이렇게 중요하고 많고 크다고 자랑해봐야, 그것도 화무십일홍에 불과하며, 잠시잠간이면 사라질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 세상적 쾌락이나, 하나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여러분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하고, 다 지나가고 맙니다. 이 지구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지나가고 맙니다. 젊음도 화살처럼 속히 지나가고요, 사랑도 빠르게 떨어지고요, 내가 번 돈도 내가 써 보지도 못하고, 훨훨 날아갈 때가 있고요, 아무리 유행하는 것들이라 해도 다 지나갑니다.

 

17절의 “자나가되”(파라게타이)라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지금도 지나고 있는 중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도, 지금 지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스케마, fashion)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은 지금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를 말하면서, 인생 제반사에 초연하고, 거기에 몰입하지 말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에도 초연하고, 세상의 희노애락에도 초연하고, 경제생활에도 초연하고, 수입과 지출면에서도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다 지나가는 유행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다 지나가는 일시적인 유행에 왜 집착하느냐? 초연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유행은 다 지나가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가장 기본적이고 공통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공의롭게 사는 것이며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위정자와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이웃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는 말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영원히 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면, 그분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지나간다는 말과 반대적인 말로서, ‘남아있다, 머문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함으로 하나님 안에 머물고 계시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면, 그 분 안에 항상 남아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80-90의 인생을 살면서, 일시적으로 잠깐 있다가 없어지고 마는, 세상의 정욕과 욕심에 매여서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전도서 5장 10절을 보면,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세상을 좇아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이 말씀을 읽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초대교회의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록펠러는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에 한을 품고 무섭게 일했습니다. 야심찬 사업가로 변신한 그의 인생철학은, ‘나를 위해, 돈을 위해’였습니다. 청년은 미국석유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적인 대부호로 성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심하게 착취했습니다. 사람들은 존경심이 아닌 돈 때문에, 그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쉰 살에, 그의 몸과 마음은 심하게 망가져 있었습니다.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에 시달렸고, 의사는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때 신앙의 눈을 뜬 대부호 록펠러는, 세상의 욕심에 심취하여 있던 그의 인생관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인생관으로 바꾸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거액을 쾌척 해 시카고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리버 사이드교회도 세웠습니다. 여생을 ‘교육’과 ‘선교’와 ‘사랑실천’에 쏟았습니다. 그는 베푸는 삶을 통해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98세까지 장수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살았습니다.

 

만약 그가 50세까지, 자기와 돈을 위해서만 살았다면, 후세대에 그 이름은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수전노의 대명사로 남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약 50년의 인생을, 멋지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록펠러의 이름을 떠 올리며 교훈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영생하는 인생이 되고 싶으시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집착하여 살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집중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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