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목사설교

  • 예배 · 설교 >
  • 이정현목사설교
종말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라.(창5:21-27)
이정현 목사 2013-12-08 추천 0 댓글 0 조회 345

동행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니까, “같이 길을 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혼자 길을 가는 게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동행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동행이라는 단어가 31번 나타나고 있는데 거의 모두가 ‘사람이 사람과 같이 길을 가는데 사용하거나,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행하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결국 성경의 동행은 그 대상이 인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동행과 관계된 조금 특이한 표현이 있는 성구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인데요, 거기에 보면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9)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이 특이하다는 것은, 다른 성구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해 달라는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여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평생 동안 동행하시기 바라고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 다른 한 구절이 있는데, 이번에는 아모스의 말씀입니다. 암 3: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두 사람의 뜻과 마음이 같아야, 진정한 동행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부부가 같이 산다고 동행하는 것 아닙니다. 마음과 뜻이 맞아야 동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일평생, 진정한 신앙의 동행이 있기를 바라고요,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한마음 한 뜻이 되어서, 아름다운 동행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엄원태 씨가 지은 ‘동행’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부자지간의 아름다운 동행을 그린 시입니다. 가슴이 먹먹하고 감동스러운 동행 이야기입니다. 

 

동행

 

매일 오후, 스무살 아들의 허리춤을,

 

헝겊줄로 질끈 묶어 잡고 다니는 아버지가 있다.

 

오랏줄에 묶여가는 죄인 같지만,

 

아들이 심한 뇌장애로 잘 걷지 못해,

 

넘어지면 그대로 얼굴이며 어깨를 땅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은엽도 선청성 약시로 안구흔들림증으로

 

시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아이고, 먹은 것도 없이 엄청 눴네”하면서,

 

한덩이 묵직한 기저귀를 대견한 듯 갈아주고,

 

씹지 못하는 기독이를 위해 몸에 좋다는 마늘 몇 쪽,

 

자기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서 입에 넣어준다.

 

 

 

갓난아기에서 멈춰버린 아들이지만,

 

그랬기에 더 ‘세상을 내 손으로 움켜쥔 그런 기분’이었다는,

 

득남의 기쁨에서 그리 멀리 오지 않았다.

 

 

 

혼자선 일어서지도 못하던 기독이는,

 

한결같은 허리끈 산책 8년 만에, 혼자서 걷게 되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침 흘리는 아들 입에,

 

잇따라 뽀뽀를 하고는, 가만히 들여다본다.

 

사랑을 이 몸에다 채우고 채워놓으면,

 

나중에 나 없어도, 얼마간 혼자서도 잘 견딜테지요. 

 

이은엽씨는 자기도 시각장애인이지만, 심한 뇌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 기독이를 위해, 온갖 사랑을 다 쏟으며, 한걸음 한걸음 아들과 아름다운 동행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시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비록 똑 같은 상황은 아니라할지라도, 어떤 환경과 상황에 놓이더라도, 부모 자식 간의 아름다운 동행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창세기 5장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누구부터 누구까지의 족보가 나옵니까? 아담부터 시작을 해서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까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그 유명한 노아까지 기록되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창세기 5장의 기록형태는, ‘누구는 몇 세에 누구를 낳고,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에 대한 기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은 백 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 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3-5)  

 

그러면 이런 형태로 기록된 창세기의 족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누가 이 역사를 이어 갈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이후의 역사를 노아가 이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로 인류가 다 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의 맥을, 동방의 의인이었던 노와와, 그의 가족이 이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군 데 족보가 나옵니다. 창세기 10장, 민수기에는 각 지파의 족보가 나오고, 열왕기에는 왕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그러다가 신약으로 건너와서 마태복음에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에 대한 족보입니다. 그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을 해서,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끝이 납니다.  

 

마태가 보여주는 족보의 중요한 의미는, 족보의 마침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더 이상 족보를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족보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후로는 더 이상 족보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에는 세 사람이 나오는데, 이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역시 에녹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 관한 표현 중,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22절에 ‘하나님과 동행하며’라고 했고 24절에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에녹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는가? 

 

18절을 보면, 에녹이 누구의 아들인지가 나옵니다. 그는 야렛이 162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이 에녹이 장성하여 결혼해서, 65세에 므두셀라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때부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300년을 사는 것입니다.

 

  그는 땅에 365세를 살았습니다.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연수를 살았습니다. 다른 조상들과 비교하면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조상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그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보다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8-900년을 살았지만 에녹은 고작 3백 몇 십년을 살았으니 다른 사람에 비하면 반도 못살았지만, 에녹의 삶이 더 의미 있고 중요하다는 것은 그가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남다릅니다. 다른 사람은 몇 살 때 누구를 낳고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다고 표현되었지만, 에녹은 몇 살까지 살았다고 말하지만, 몇 살에 죽었다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에녹만의 독특한 기록입니다. 아담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 반드시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지만, 에녹은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한 참 후의 엘리야 선지자와 같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 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에녹에 대하여 이렇게 진술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 하나님과 평소에 동행 한 것 사이의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1-2년이 아니라 자그마치 300년 동안이나, 멋지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사, 죽음을 보지 않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원래의 계획처럼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난 이후에는, 줄 곧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그 이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고, 동행하지 못하는 것의 분기점은,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것 하고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에게 무슨 키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에녹이 아들을 낳았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하셨는데, 그 이름의 뜻이,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이름을 주셨는데, 너무 특이하고 두렵고 떨리는 충격적인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계시적이며 예언적인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 이름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그 이름에 담아서 예언적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이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아들이 죽으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했으니, 미래에, 먼 훗날 분명히 아들은 죽을 것인데, 그때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날인 것입니다.  

 

에녹은 자기도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아들이 언제 죽을지 압니까? 자식이 부모 앞에 죽는 것은 불효중의 불효이지만, 인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으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먼저 돌아가실지, 아니면 자식들이 내 앞에서 먼저 죽을지 알겠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에녹은 종말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 심판이 있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녹은 항상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내일 심판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오늘 하루를, 바르고 깨끗하게 사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종말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산 것이,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가 죽음으로 심판이 왔습니까? 25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5: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5: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므두셀라가 장가를 가서 187세에 라멕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라멕이 장가가서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7:8절에 보면, 노아가 600세 되던 때에,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다고 했습니다. 계산을 해 보면, 므두셀라가 187세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182세에 노아를 낳고, 노아가 600세 되던 때에 노아 홍수가 있었으므로, 그때가 므두셀라가 969세로 죽는 해였습니다(187+182+600=969). 하나님의 예언대로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노아 홍수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를 통하여, 그 땅의 백성들에게 이미 예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따라서, 종말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사람은, 에녹 혼자 뿐이었고, 나중에는 노아뿐이었습니다. 창세기 6: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에녹의 뒤를 이어 노아도 분명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모든 히브리인들은,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를 통하여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저 사람이 죽는 날이, 곧 심판이 있는 날이다.’ 그러므로 그 날을 생각하며, 현재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였던 에녹과 손자였던 노아만, 그 예언을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도둑이 내일 새벽에 올 줄 알면, 오늘 밤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쓰나미가 밀려 올 줄 알면, 또는 대지진이 내일 있을 것을 안다면, 지금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까요?  

 

거대한 초강력 태풍이 밀려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도, 지금 바닷가에서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시겠습니까?  

 

내 개인의 종말이 내년 일줄 안다면. 여러분은 지금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온 우주적 종말이 내일 온다는데. 지금과 똑같이 살아가시겠습니까? 

 

주님이 재림이 분명합니까? 예수님이 다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는 성경의 예언이 무려 1518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었듯이, 분명히 그분의 재림도 역사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오셔서 모든 불신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리고,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둘 째 죽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둘 째 죽음은 지옥에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가지 않고, 천국, 에녹이 있는 그곳, 주님이 계신 그곳에 가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생활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가시는 데까지 나도 가고, 하나님이 멈추시는 데에, 나도 멈추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좌회전 하시면, 나도 좌회전하고, 하나님이 우회전하시면 나도 우회전하고, 하나님이 유턴하시면, 나도 유턴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 나도 하면 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

 

마치 하얀 눈 위에, 하나님이 걸어가신 발자국이 있으면, 그곳에 맞추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에녹처럼 종말을 생각하며,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미가 선지자가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을 읽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미가 선지자의 요구대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벧후3:1-14) 운영자 2017.02.14 0 269
다음글 앞날에 좋은 일이 많기를.... 유기성 2017.02.10 1 1832

15010 경기 시흥시 배곧4로 42 (정왕동, 소망교회) 소망교회 TEL : 031-431-4817 지도보기

Copyright © 소망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56
  • Total358,216
  • rss
  • 모바일웹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