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신약성경 중 두 권의 책을 씁니다. 하나는 베드로전서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후서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베드로후서는, 다른 말로 베드로의 두 번째 편지라고도 불립니다.
이 편지를 누구에게 보냈는가 하며는, 당시 로마 주위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교회를 향해 쓰여진 것이 아니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들을 위해 쓰여진 회람서신이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이교회 저교회 돌아가면서 이 편지를 읽어 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AD 66-67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의 중요한 목적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가 ‘고난에 대한 위로’라면, 베드로후서는 ‘당시 만연했던 거짓교사들, 이단들에 대한 경고’를 줘서, 성도들이 바르게 신앙생활 하도록 가르치고자 썼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도, 이런 내용이 조금 언급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베드로전후서를 보내는, 이유와 목적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진실한 마음이란,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성도들에 대하여 표현한 것인데, 성도들의 마음이 순수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순수한 그 마음을 일깨워서, 선지자들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의 편지목적은, 아무튼 저들의 착한 마음을 일깨워서, 저들로 하여금 구약과 신약의 말씀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서, 이단에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굳게 신앙생활 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어떤 이단사조가 밀려와도, 흔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교우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메일과 문자를 보내는 것도, 결국 같은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 중심으로 신앙생활해서, 어떤 어려움과 환란과 이단사설이 밀려와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베드로나 저나 다른 주의 종들이나 마찬가지로, 이런 목적 즉, 말씀 중심의 삶을 살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우리의 삶의 표준임으로, 이것만 붙들고, 이것만 의지하여 살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자기의 경험이나 이성이나 철학에 근거하여 생활하지 말고,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감으로, 어떤 이단들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말하는 당시 이단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여러 주장들이 있겠지만, 베드로는 본문에서 한 가지를 지적합니다. 그것은 주의 재림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3절에 말하는 ‘기롱하는 자’는 ‘누군가를 놀리다.’는 뜻인데, 이 자가 바로 이단이며 거짓선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도덕적으로 방종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단들의 생활상의 특징입니다. 돈과 이성과 명예에, 깨끗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조롱하며 말하는데,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우리 조상들 중에 주의 재림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또한 이 세상 만물이 창조될 때부터 지금까지 그냥 있지 않느냐? 그러니 어찌 우리가 주의 재림을 인정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거짓말이다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단7: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말씀임으로, 이것은 초림을 말하지 않고 재림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셔서, 이 땅의 모든 신자들을 데리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주님도 자신의 재림을,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요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이 말씀은 구약 다니엘서의 예언하고 비슷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또한 재림에 관하여는 사도들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여기서의 마지막 나팔은, 곧 주의 재림을 알리는 나팔인 것입니다. 그때에는 홀연히 다 변화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살전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약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이 외에도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무려 1500번 이상이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 이단들은 이것을 부정하고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은 이단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재림의 날짜를 정한다거나, 이미 왔다거나, 영적으로 온다거나, 본인이 재림주라고 하는 것도 전부 이단인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단들과 사이비들은, 훗날 반드시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마치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지 못하여, 물로 심판을 다 받았던 것처럼, 저들도 불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결국 이단자들은, ‘천지가 지금까지 그냥 있다’고 주장하지만, 베드로는 ‘천지가 간수하신 바가 되어 있다가, 그 천지가 멸망할 때에, 너희도 함께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단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주장과, 그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을 말하고 난 이후, 이제 흩어진 성도들에게, 주의 재림을 기다릴 것을 권면합니다. 단순히 재림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단들이 말하는, 왜 주의 재림이 늦어지는지에 대하여 해답을 말하고 난 이후에,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되, 어떤 모습으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의 말씀은, 주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곧 오신다고 하셨고, 그의 제자들도 주님은 곧 재림하신다고 하셨는데, 왜 아직까지 오지 않으셨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지가 벌써 30년이 지났고, 제자들이 그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는지도 오래 되었는데, 왜 아직도 그 주님이 오지 않으시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과 의문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8-9)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빌어, 저도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이며, 하나님의 시간 계산법입니다.
달력에는 세 종류의 달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력, 음력이 나와 있는 1년 12개월, 365일이 표시된 달력이 있습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시간과 날을 계산합니다. 둘째는 생태적 달력이 있습니다. 나이는 30대이지만 50대 체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고, 나이는 80대 이지만 50대 건장을 소유하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여름에만 채소를 먹는 게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채소를 먹을 수 있고, 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사이 생태적 달력은 천차만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달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운영되는 시간을 말하며,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본문에,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은, 우리가 쓰는 달력이나 생태적 달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달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주의 재림이 왜 이렇게 더디냐? 하루가 천년같이 느껴져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이 하루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기와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여 나가기 때문에, 그 시간표의 때가 되면, 반드시 주님이 구름타시고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대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롱하는 이단자들은, 재림의 약속이 너무 지연되었으므로,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강력하게,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은,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재림에 대한 약속의 실패가 아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기 위하여, 더 인내하시며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좀 더 참고 기다리시겠지만, 그러나 끝까지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기에 더디 보이는, 그 하나님의 시간 속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와 소망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주의 재림이 우리 눈에 더디 보일 찌라도, 하나님의 시간에 반드시 역사적 현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이 세상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까? 이 사항에 관하여서도, 베드로는 계시를 받아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10절과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10)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12)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말은, 생각지 않은 때에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화살이 제 빠르게 날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처럼 큰 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하늘이 종이처럼 말려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는 하늘은 심판을 면했으나, 이제는 하늘까지도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다 녹아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물질은 지구를 비롯한 해, 달, 별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런 체질들이 뜨거운 불에 다 녹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 바벨탑들이, 하루아침에 다 불타서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는 물로 이렇게 심판을 받았지만, 이제는 뜨거운 불로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재림의 현상을 리얼하게 말씀하신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이런 것을 바라보는 너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말세의 대 파멸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이미’(already)와 ‘아직은 아닌’(not...yet) 세대 가운데 끼어 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말입니다.
본문 11절과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11).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 한마디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고, 신천신지를 소망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경건함과 재림과 천국에 대한 갈망은, 여기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약성경에서 강조하는 크리스챤의 삶입니다. 또한 이것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에 와서도 강조되어야 할 기독교인의 삶의 덕목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말씀을 따라서, 항상 세상과 구별되게 살고,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면서,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말고,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11절과 13절의 말씀을 종합해서,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점과 흠이 없이 거룩하게 살아가시며, 불안하지 않고 죄우로 요동하지도 않으며, 평강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신대원 학생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2중성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성과 미래성입니다. 현재성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이미 임하여 있는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 있다 못할 것이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내가 만약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이런 말씀들이,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미래성은, 장차 도래하게 될 영광스러운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애통과 슬픔과 죽음과 눈물이 없는 영원한 그 나라, 곧 천국을 말하며, 새 예루살렘, 신천신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옛날에, 전부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만 강조했습니다. 부흥강사들과 목사님들이, 하나님 나라의 현제를 잘 몰랐기 때문에, 전부 죽어야 천당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살기가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전부다 황금 집으로 되어 있는 천국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의 재림과 천국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부터, 하나님 나라 현재에 대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과 교사들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 천국을 살지 못하면, 미래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역으로, 주님의 재림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교인들에게, 지금 예수 믿고 잘되고 복 받고, 자식들이 잘 되는 것을 더 오래오래 보며 살기를 원하지, 예수님의 재림과 미래 천국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물어볼까요? 여러분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십니까? 아멘. 그러면 한 가지 더 물어보겠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뭘 같이 하려고 기다리십니까? 이런 질문을 아이들에게 하면, 상당수의 아이들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놀이기구 타러 가려구요,’ ‘같이 피자 먹고 싶어서요.’ 그런데 이 질문을 어른들에게 하면,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직은 오시면 안돼요, 할 일이 더 있어요. 좀 더 이 땅에 살고 싶어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른들은 주님의 재림 자체를, 별로 반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들이 가끔 성도들의 집이나 사업장에 심방을 갑니다. 사전에 심방 장소와 시간을 약속해 놓습니다. 그런데 가끔 심방 갈 약속 시간이 임박해서, 심방을 취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 집안청소가 잘 안되어 있어서,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어서 그럴 것입니다.
어느날 주님이 천군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심방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은 예고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날 한 시에 다 심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음에 만나자고 피할 수 없고, 핑계를 델 수도 없습니다. 산 자도 볼 것이고 죽은 자도 볼 것이고,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입니다.
기왕이면 그 주님이 오실 때, 흠과 티가 없는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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